MEMORIZE RAW novel - Chapter 673
00672 3. 한편, 같은 시각. =========================================================================
죽은 세상에도 밤이 찾아오는가.
죽어버린 세상에, 밤이 찾아온다. 누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든 간에 여러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실지(實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현상을 경험하고 있었다.
지옥 대공과 관계를 맺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른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지옥 대공이 굉장히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반응을 보였고, 그에 따라 나 또한 어느새 진심이 돼버리고 말았다. 아무런 생각도 못한 채 오직 짐승처럼 서로를 탐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몇 번이나 했더라? 한 여덟 번은 한 것 같은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서로가 서로를 갈구하며 어찌나 격렬하게 몸을 섞었는지…. 오죽하면 관계가 끝난 직후에는 마주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뭐, 사실 쳐다볼 힘도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마는.
아무튼.
여덟 번에 걸친 관계가 끝난 이후, 나는 탈진한 상태로 바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가 변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잿빛 일색으로 이루어진 하늘은, 어느덧 종말을 고하듯 어둑어둑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 비단 하늘뿐만이 아니라, 이 무간 지옥이라는 모든 세상이 이제 막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처럼 어둡게 변했다.
변화한 현상은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넋을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유는, 다름 아닌 하늘은 물론, 온 세상을 점점이 수놓는 붉은 빛무리 때문이었다. 마치 반딧불과 같이 말간 빛을 내뿜는 붉은 불똥은, 흡사 춤이라도 추듯 너울너울 움직이며 고요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과연 내가 기억하는 무간 지옥과 지금 보는 무간 지옥이 동일한 세상일까. 이런 의문이 들 정도로 현재의 무간 지옥은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내는 중이었다.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이런 풍경은 어디 가서 돈 주고도 구경할 수 없거니와, 근 몇 달간은 항상 강철 산맥 공략에 쫓기지 않았는가. 그런데 정말 간만에 한가로우면서 신비한 기분을 느껴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왜 갑자기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그래서 나와 똑같이 힘들어 보이는(?) 지옥 대공에게 물어봤지만, 그저 알 듯 말 듯한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뻗어 있는 내 옆으로 스리슬쩍 다가와 나를 빤히 쳐다보길래, 팔 한쪽을 펴주니 냉큼 머리를 베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나와 지옥 대공은 서로 입을 닫은 채, 지금껏 조용히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진심으로 썩 기분이 나쁘지가 않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한가로움 때문인지, 아니면 관계 후의 여운 때문인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 마음이 넉넉해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옥 대공이 더는 밉게…. 아니. 더 이상 공포스럽게 느껴지지가 않는다고나 할까.
‘처음부터 이야기를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갑자기 아쉬운 마음이 들어 흘끗 옆을 쳐다보자, 눈을 꼭 감은 채 작고 고른 숨소리를 흘리는 지옥 대공이 보였다. 어두운 세상. 흐드러진 머리카락 틈으로 반딧불 같은 빛무리가 스며들어 발그스름한 빛을 흘려내는 자태는, 지옥 대공을 더욱 신비롭게 보이게 했다.
“…….”
나도 모르게 팔베개를 해준 손을 살짝 움직여 지옥 대공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듯이 빠져나가는 보드라운 감촉은 내 정신을 한층 멍하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으응….”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 것 때문일까. 지옥 대공이 자그마한 비음을 흘리며 살며시 눈을 뜬다. 이어서 드러난 흡사 홍옥을 연상케 하는 어여쁜 눈동자가 깜빡깜빡 움직이며 나를 응시한다. 그렇게 한동안 곁눈질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 불현듯 지옥 대공이 낯을 발그레하게 붉히는 게 보였다.
…아. 갑자기 빛무리가 내려앉아서 그런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도로 눈을 감은 지옥 대공이 몸을 움직여 내 품으로 파고들어왔다. 조금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살과 살이 맞닿는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지자 전신이 나른해졌다. 편안하다. 나는 마치 작은 동물을 안는 것처럼 지옥 대공을 따뜻하게 안았다. 돌연 목 부근으로 가는 숨결이 느껴졌다.
“그대는….”
관계가 끝난 이후, 지옥 대공이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나도 모르게 이어질 말에 집중했다. 과연 어떤 말을 하려는 걸까? 혹시….
“그대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겠지…?”
그러나 이어진 말을 들은 순간, ‘좋았다.’ 등의 칭찬을 기대하던 나는 반성하고 말았다. 허나 한편으로는 살짝 놀라기도 했다. 설령 그런 티는 조금 냈을지 몰라도, 먼저 말을 꺼낸 기억은 없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꺼냈다는 건 지옥 대공도 암암리에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바로 내가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걸.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한순간 무수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고 싶겠지…?”
그 순간 지옥 대공이 한 번 더 되물었다. 강압적인 어투가 아닌, 무언가 조심스러워하는 어조에 힘입어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응.”
어차피 말을 해야 한다면 미리 말을 해두는 게 좋을 터.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약간은 힘없는 목소리로 긍정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내가 왜 힘없이 말한 걸까? 이러면 마치 그러기 싫다는 것처럼 들리잖아.
잠시 후.
“역시…. 그런가….”
아래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무언가 안타깝게 느껴졌다면 내 착각일까.
이윽고 조금은 어색한 침묵이 다가왔다. 말끝을 흐린 지옥 대공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내 가슴에 고개를 묻은 탓에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빛무리를 품은 정수리를 바라보다가, 돌연히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지옥 대공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을 간질이는 기척으로 내 말을 듣고 있는 거라 확신할 수 있어,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혹시 네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이름?”
이 말은 확실히 의외였는지 지옥 대공이 언뜻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시선을 받아넘기며 나는 힘주어 머리를 끄덕였다.
“응. 이름.”
생각해보면 그동안 막연히 지옥 대공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지, 진정한 이름은 모르고 있었다. 사실은 자세히 알 생각도 못한 거지만. 어쨌든 지옥 대공의 진명은 1회 차에서도 밝혀내지 못한 탓에 자못 호기심이 일었다.
“글쎄. 이름은 나한테 큰 의미가 없는 터라.”
허나 이미 이름 따위는 초월했는지 지옥 대공은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쏘냐.
“그래도. 어쨌든 이름이 없지는 않을 거 아냐.”
“그렇기는 한데…. 이미 몇 천 년을 이름 없이 살아온 몸인데, 이리도 갑자기 물으면 당황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래도.”
“…….”
지옥 대공이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짓는다. 너무 조르듯이 말했나?
그냥 제 3의 눈을 사용할까도 생각해봤으나 그만두기로 했다. 애초 지옥 대공 정도의 존재라면 읽지 못할 가능성이 크거니와, 이번만큼은 제 3의 눈으로 정보를 파악하기 싫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름.”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한 번 더 채근하자, 지옥 대공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싱겁게 웃는다.
“…나.”
이내 무어라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제대로 듣지 못했으니 다시 말해달라는 의미였다.
“흐흠.”
그러자 살짝 눈을 흘기며 한두 번 가볍게 헛기침을 한 지옥 대공은.
“게헨나. 굳이 이름을 알고 싶다면 게헨나라고 부르면 되느니라.”
한층 또렷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게헨나라…. 잘은 모르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다. 그러니까 신약 성경에 나오는, 지옥을 묘사하는 단어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게헨나, 게헨나.
“어울리는 이름이네.”
“응? 평가 한 번 애매하구나.”
“말 그대로야. 지옥이라는 세상에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해.”
“…상관없나. 아무튼 그럼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지?”
그때 고개를 갸웃하던 지옥 대공이 내 이름을 되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달링…. 아니 아니. 자기. 아니면 자기야 라고 불러도 좋아.”
그러나 지옥 대공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져, 결국에는 이실직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김수현.”
“김수현?”
“응.”
“김수현, 김수현이라….”
지옥 대공, 아니 게헨나가 내 이름을 연거푸 중얼거린다.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 차이가 있다면 속으로 하지 않고 직접 말로 되뇌고 있다.
이윽고 마치 소중한 것을 다루듯 자신의 배를 부드러이 쓰다듬는 게헨나를 보다가, 나는 가볍게 머리를 젖혔다.
어느새 무간의 하늘은 오로라와 비슷한 커튼 모양의 붉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아름답다.
“흥…. 흐흥….”
문득, 내 이름을 되뇌던 소리가 미미한 음이 섞인 콧소리로 변했다. 그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계속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나는 내 이름은 어떻느냐 물어볼 생각을 접고서 자연스레 들려오는 음에 집중했다.
“응…. 흐흐흐흥….”
소리는 여전히 내 이름을 되뇌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또는 콧노래로 들렸고, 한편으로는 그냥 숨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소리가 매우 나직하고 조용한 음을 품고 있다는 것.
그렇게 한참을 이어지는 음을 듣고 있자, 어느 순간 전신이 사르르 내려앉는걸 느꼈다. 서서히 눈이 감기고 머릿속에 점차 어둠이 찾아온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수마. 나는 완전히 눈을 감았다.
이내 꿈결처럼 들려오는 음을 자장가 삼아, 나는 깊은 잠을 청했다.
============================ 작품 후기 ============================
사실 저번 회는 제 필살기였습니다. 회심의 일격이었죠. 조금 욕을 먹더라도, 기필코 ‘아 씬 좀 그만 쓰세요. 지겨워 죽겠어 정말!’ 이나 ‘알았어요. 앞으로 씬 써달라고 안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좀 쓰세요.’ 라는 코멘트로 도배가 된 인터넷 창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진도 나갈게요~.’ 라고 미리 아양을 떤 다음, 나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업데이트를 눌렀죠.
그런데….
1. 에이. 씬 위주도 좋은데요?
2. 아뇨 괜찮아요더쓰세요ㄲ
3. 아뇨 일주일간 이것만 쓰셔도….. 될지도?
4. 그냥떡신 몇편더써주새요
5. 부족합니다.
6. 좋기만 하구먼 왜?.,.
7. 좋지아니한가!!!
8.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9. 꼭 궂이 안그러셔도 됩니다만…?
10. 이보게 잠깐. 그러지말고 한편만 이대로 가보세 한편만 더..!
11.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도나가야하나요 좋은데? 이씬만한세번더하죠
12. 좀만 더 갑시다. 대공이 귀여움
……. ……. ……. …….
0ㅁ0….
…사실 그 정도면 나름 만족하실 줄 알았는데, 제가 독자 분들을 조금 얕봤던 것 같네요.
우선은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일단은 깔끔하게 물러나겠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재도전을 할 때는, 저도 결코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