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74
00673 3. 한편, 같은 시각. =========================================================================
“오빠, 오빠!”
나를 부르는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그 음성에 이끌려 살그머니 눈을 떴을 때, 나는 상당히 깊은 잠에 빠졌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한순간 이마에 강한 현기증이 감돌며 전신에서 노곤함을 느꼈으니까.
이윽고 가물가물한 시야에 초점이 잡혔을 때, 눈에 들어온 건 잿빛 하늘도 어두운 하늘도 아니었다.
붉은 하늘이 보였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는 화들짝 몸을 일으켰고, 동시에 옆에서 새된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지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얼떨결에 시선을 돌리자 엉덩방아를 찧은 채 토끼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한별이 보인다.
“왜?”
“…그건 오히려 제가 해야 하는 질문 아니에요?”
왜 그렇게 쳐다보냐는 뜻으로 물어보자 김한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나는 세차게 머리를 저은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멍한 기색은 가시지 않았으나 그래도 두 가지 의문은 잡아낼 수 있었다.
우선 여기는 어디인가. 그리고 나는 왜 여기서 깨어났는가.
내가 기억하기로는 무간 세상의 변화를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든 것 같은데 말이지.
– 흥. 네가 잠든 사이 고 계집이 수작을 부렸지.
그때 화정의 음성이 머리를 울렸다.
– 옷도 차근차근 입혀주고. 혹여 깰까 봐 이동도 조심조심하고. 아주 푹 빠져서는 말이야. 흥!
어딘가 모르게 뾰족한 목소리가 뇌리를 찌르는 듯하다. 그래도 덕분에 의문 하나는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면 게헨나가 잠든 나를 들고 구간을 이동한 건가? 그리고 김한별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준 거고?
“오빠. 이제 좀 정신이 드세요?”
그렇게 하나하나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즈음, 성큼 몸을 일으킨 김한별이 다가와 물었다. 그러는 와중 화정이 계속해서 종알종알 쏘아붙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선은 김한별에게 집중하기로 마음먹고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그러자 김한별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한다.
“응? 괜찮으냐니?”
“기억 안 나세요? 그분한테 업혀오셨잖아요. 완전히 푹 잠드신 상태로.”
“아…. 어, 어. 그랬나? 그렇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어제 계속 기다리면서 걱정했는데.”
흠. 여기서는 화제를 돌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냥 여러 이야기 좀 했어. 힘들더라.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야?”
“이야기가 힘들어요…? 아, 여기는 오빠가 기절해있는 동안 제가 생활하던 구역이에요.”
“생활하던 구역?”
“네. 다행히 그분이 구역을 임시로 할당해주셔서요. 아무것도 없다는 것 빼고는 나름 지낼만해요.”
나는 잠깐 김한별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주변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지옥에서 처음 눈을 뜨고 봤을 때처럼, 그저 드넓은 붉은 황무지만 눈에 들어올 뿐. 그리고 구역 임시 할당은 또 무슨 말일까.
“정말로 나름 지낼만하다니까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김한별이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를 보이며 말을 잇는다.
“생각해보세요. 오빠도 조금 전까지 한 번도 안 깨시고 푹 주무셨잖아요.”
흠. 생각해보면 확실히 잘 자기는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름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하는데.
“말씀 드렸잖아요. 이 세상은 집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어느덧 김한별은 내 옆에 은근슬쩍 앉은 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나와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좋은 걸까.
아무튼 화제는 잘 돌린 것 같으나, 문득 내가 지금 아는 게 굉장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직면한 상황을 정리하려면 조금 더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별아.”
“네.”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을까?”
“물론이죠. 어떤 게 궁금하신데요?”
*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통과의례를 시작한 직후, 김한별은 나를 찾아와 예비 사용자들끼리 토의한 내용을 요약해서 들려준 적이 있다. 그때 이야기를 들으면서 애가 말을 참 잘한다고 느꼈는데, 김한별은 이번에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정리해보면, 지옥은 총 여덟 개의 구간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각 구간은 하나의 세상이라 볼 수 있다. 여기까지는 나도 알고 있는 사실.
그러나 어탑에 관한 말이 나왔을 때부터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어탑은 그냥 단순한 구조물이 아닌, 바로 구간을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이동 수단이라고 한다. 어느 구간의 마수든 이 어탑을 사용하는데 제한은 없다. 하지만 구간의 출입에는 제한을 받는다. 말인즉 각 마수마다 출입할 수 있는 구간이 한정된다는 말이었다.
가령 예를 들면, 내가 지금 있는 ‘대 초열’ 이라는 구간은 현재 지옥 대공의 관할 하에 있는 구간으로, 다름 아닌 군단장 급에 해당하는 마수들만 출입할 수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
거기다 지옥 군단장은 총 66 개체가 존재하는데, 애초 대 초열 이하로는 출입하는 일이 드물다는 말까지.(66 개체라는 말을 듣고 나서, 나는 막연하게나마 직감하고 있던 지옥 군단장들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비비앙을 떠올리면 답이 나온다.)
여기서 김한별은 관할과 출입의 차이점을 강조했다. 게헨나가 7 구간을 관할하듯 1 구간부터 6 구간까지도 각각을 분할해서 관할하는 존재들이 있다. 즉 그 존재들이 바로 군단장이라는 소리였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은 나는, 어느 정도 지옥이라는 세상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에는 영토의 개념이었다.
설령 어느 마수가 출입할 수 있다고 해도 구간 내 모든 지역을 돌아다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지역을 돌아다니려면 관할하는 존재의 허락이 필요하다. 아까 김한별이 말한 구역 임시 할당은 이러한 의미에서 나온 말이었다. 한 마디로 마수들이 함부로 건들지 못하게 한, 게헨나의 호의라고나 할까.
잠시 후.
“후유. 힘들다.”
그 어느 때보다 길게 말은 이은 김한별은 턱을 주무르며 힘들다는 말을 꺼냈다. 어느 정도 궁금증을 해소하기는 했지만, 사실 아직 궁금한 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만 질문을 멈추기로 했다. 나보다 조금 더 겪었을 뿐이지, 김한별도 모든 걸 알지는 못할 테니까.
…그런데 대장간이나 도서관이 있다는 말은 진짜로 궁금한데. 도대체 어떻게 지옥에 그런 구조물들이 존재하는 걸까?
“그런데요. 오빠.”
그렇게 질문을 하나 더 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김한별이 턱을 주무르던 손을 떼고 말을 걸었다.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요. 도대체 그분이랑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하신 거예요? 그리고 왜 기절한 채로 업혀오신 거예요?”
그리고 이어진 질문에 나는 한층 곤란한 기분을 느꼈다.
아 그렇잖은가. 여기서 ‘응. 섹스 좀 했어.’ 라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까.
“네? 도대체 얼마나 힘든 대화를 하셨길래 기절까지….”
김한별이 진정 궁금하다는 얼굴로 은근슬쩍 채근한다.
미치겠네 정말. 그렇다고 몸의 대화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때였다.
철그렁….
김한별의 낯에 수상하다는 기색이 깔릴 즈음, 어디선가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시선을 돌린 나는, 지금 이 상황을 구원해줄 구원자, 아니 전신에 시꺼먼 갑옷을 입은 한 기사가 걸어오는걸 볼 수 있었다.
“이야. 지금쯤이면 일어났을 거라 하시던데, 정말로 일어나 계셨군요.”
성큼성큼 다가와 거슬리는 음성으로 인사를 건네는 존재는, 얼마 전 어탑에서 게헨나와 함께 마주쳤던 해골 기사였다.
“아가씨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나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인 해골 기사는 김한별을 보며 두터운 금속 장갑을 들어 보였고, 김한별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받았다. 그러자 가만히 있기가 뭣해 나도 같이 일어선 후, 안도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또 만나네요. 그러니까 제 3 군단장 맞죠?”
“네. 이곳에서 부여 받은 이름은 베, 히, 모, 스, 죠.”
왜인지 자신의 이름을 한 글자씩 끊어서 말하는 해골 기사, 아니 베히모스. …사실은, 잊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민망한 기분이 들어 나는 헛기침 후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게헨…. 지옥 대공의 명으로 이곳에 왔나요?”
“어? 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금쯤이면 일어났을 거라 하시던데. 이 말씀에서 유추했죠.”
“이야, 역시나. 날카로우십니다. 그리고 말씀이라니요. 말씀 낮추셔야죠. 이제는….”
그 순간 무어라 말하려던 베히모스는 나를 보고서 말을 흐렸다. 나는 들키지 않게 최대한 김한별을 곁눈질하며 무언의 의사를 보내려 애썼다. 그러자 투구 안, 깜빡깜빡 안광을 점멸하던 베히모스가 갑자기 뼈만 남은 이를 딱딱 부딪친다. 웃는 건가?
“이제는요…?”
“…네. 이제는, 잠깐 어디를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돌연 김한별이 의아한 음성으로 반문하자, 베히모스가 구변 좋게 말을 잇는다.
“그런데 왜 말씀을 낮추….”
“대공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면서 얘기하시죠.”
베히모스는 의도적으로 김한별의 말을 끊으며 걸어온 방향을 가리켰다.
이윽고 빙글 몸을 돌리는 베히모스를 보며 나는 무언가 감동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이 사람, 아니 이 해골. 꽤나 수완이 좋다. 눈치도 상당하고 말이야.
어쨌든 이렇게나 도와주는데 외면할 수 없어, 나는 빠른 걸음으로 베히모스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러자 등 뒤로 김한별이 무어라 투덜거렸지만, 이내 얌전히 쫓아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얘 혹시 알면서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
*
그렇게 해골 기사를 따라 잠에서 깨어난 자리를 떠난 이후, 약 5분 가량 흘렀을 무렵.
“대공께서 계신 곳으로 가는 중입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는 내 질문에, 앞서 가던 베히모스가 스리슬쩍 걸음 속도를 줄이며 대답했다. 아니 이 해골아. 그건 아까도 말했잖아.
내 표정을 봤는지 베히모스가 또다시 이를 딱딱 부딪친다.
“무얼 그리고 걱정하시는지요. 설마 우리가 고마운 분에게 해라도 끼치겠습니까? 하하하.”
“고마운 분이라니요?”
그때 김한별이 냉큼 끼어들었다. 아까 따라나올 때부터 벼르고 있었는지, 이번만큼은 꼭 사정을 듣겠다는 기세였다. 그 기세에 약간 걱정이 들었지만, 베히모스는 되레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운 분이지요. 이분께서는 저희 대공을 달래주셨는데요.”
…응? 달래다니. 무언가 표현이 상당히 의미심장한데. 설마 이제 와서 나를 엿 먹이려는 건가?
“다, 달래다니요? 제가 듣기로는 그저 대화를 했다고 들었는데요. 아주 힘든 대화요.”
역시나 어감이 이상함을 느꼈는지 김한별이 강력히 이의를 제기했다.
“으음…. 힘든 대화라. 하기야 틀린 말은 아니군요.”
그렇게 말한 베히모스는 돌연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몸의 대화. 음음.” 이라고 속닥거렸다.
…이 해골. 나와 생각하는 게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똑같다. 아마 같은 사용자였다면 매우 친해지지 않았을까.
“그게 무슨….”
“왜냐하면 저희 대공께서는 아주 오랜 시간을 외롭게 보내신 분이지요.”
김한별의 끈질김에 베히모스는 차분한 태도로 명료하게 받아쳤다.
그러자 김한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런데요?”
“간단합니다. 저분은 대공의 흥미를 이끄는 무언가를 갖고 있습니다. 그 무언가에 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눔으로써 대공의 외로움을 달래주셨지요. 그래서 고마운 분이라는 겁니다.”
“그, 그래도. 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가요. 고작 대화 한 번 했다고 고마운 분이라니…. 그것도 초대까지.”
“하기야 인간의 관점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여기 와서 느낀 지루한 감정을, 앞으로 수천 년 동안 겪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시죠.”
그 말이 나온 순간 김한별은 할 말을 잃을 듯한 얼굴을 보였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저 의심 덩어리를 말로 찍어 누르다니. 물론 엄밀히 파고들면 이의를 제기할 거리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것조차도 ‘인간의 관점’ 이라는 말로 연막을 쳐놨다.
그렇게 김한별을 K.O 시킨 베히모스가 어깨 갑주를 으쓱거리며 나에게 바싹 붙는다. 으음. 고마운데 부담스럽다.
“아무튼 의심은 구석에 넣어두시고 마음 편하게 가지십쇼. 대공께서는 아마 감사 인사를 표하려고 이렇게 부르셨을 겁니다.”
속닥속닥 말을 건넨 베히모스가 안광 하나를 잠시 꺼지게 만들었다가 반짝 터뜨렸다. 이건 또 무슨 표정으로 해석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나를 머리를 갸웃했다.
“감사 인사라니요?”
“에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대공 화끈하신 거는 알고 계시죠? 직접 겪어보셨으니…. 하하하. 아무튼 말로만 감사 인사를 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왜 갑자기 감사 인사를….”
“어라, 모르시는 겁니까?”
그러자 베히모스는 입을 딱 벌리더니 피리 소리 같은 바람을 흘렸다.
“허. 말씀을 듣지 못하신 건가? 지옥 수천 년의 염원을 이루어주신 분이 정작 이런 반응이라니….”
“……?”
“설마 무간 구간의 변화를 보지 못하신 겁니까?”
“…아!”
그 순간 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염원.
무간 구간의 변화.
“무간 구간은 왕의 탄생과 소멸을 함께하는 곳입니다.”
베히모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지옥 대공도 비슷한 말을 한 것 같다.
나는 이제야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왕의 생명이 태동되기 시작할 때부터, 무간 구간의 변화도 시작된다. 잠들기 전 봤던 붉은 빛무리는 무간 세상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였던 셈이다.
이 말인즉, 결국 내가 지옥 대공을 임신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소리였다.
그래. 그렇구나.
…잠깐만. 그러면 지옥 대공은 왜 그 사실을 나한테 알려주지 않은 걸까?
갑자기 하나의 의문이 추가로 떠오를 즈음.
“오. 도착했군요.”
불현듯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려와,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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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이요? 아마 다음 주에는 끝날 것 같아요.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