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75
00674 3. 한편, 같은 시각. =========================================================================
그 순간 갑자기 살에 닿는 공기가 한층 후끈후끈해진걸 느꼈다. 마치 따뜻한 온탕에 있다가 뜨거운 사우나에 들어간 기분이랄까.
코가 탁 트이는 감각에 힘껏 숨을 들이키자 미미한 유황 냄새가 맡아졌다. 김한별은 이미 한 번 와본 적이 있는지 크게 놀란 얼굴은 아니었으나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다른 세상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베히모스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다른 세상이라. 아직까지는 딱히 별다른 게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어느새 10 미터는 앞서나간 베히모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처음 맡았던 유황 냄새가 차차 짙어졌다. 나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냄새의 근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황 냄새는 발 아래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는데, 쩍쩍 쪼개진 황무지 틈으로 언뜻 붉은색이 비쳤다. 이따금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큼지막한 기포를 생성했다가 툭 터뜨리는 게, 흡사 용암을 연상케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황무지의 균열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틈으로만 보이던 균열은 점차 사방팔방으로 갈라졌고, 이내 아래 흐르는 용암이 완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드넓던 황무지는 시시각각 드러나는 용암에 잠겨 들어가, 종래에는 하나의 길처럼 변했을 정도였다.
그래. 베히모스의 말대로였다.
어느새 나는 좌우로 용암이 가득하게 들어찬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깡…!
어디선가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음이 은은하게 흘러들었다.
콰르르르!
바로 이어서 흡사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소리까지.
아직 거리가 있는지 명확하게 들려오지는 않았으나, 모종의 소리만은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앞서가던 베히모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이제 저곳만 지나치면 됩니다.”
거무튀튀한 금속 장갑이 정면 방향을 가리켰다.
앞쪽은 길은 점점 좁아지는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용암이 강을 이루는 듯한 풍경을 보이고 있었다. 거기다 용암에서 흘러나오는 연기가 자욱한 운무를 이루기까지.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수증기가 심해집니다. 발을 잘못 디뎠다가는 용암에 흔적도 없이 녹을 수 있으니, 저를 잘 따라와 주셔야 합니다.”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베히모스가 약간 심각한 목소리로 충고해와 나는 안력을 돋우며 대답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베히모스가 한쪽 팔을 살며시 내밀었다. 뭐지? 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 김한별이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다가가 베히모스의 팔을 붙잡았다.
이윽고 둘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처음 아가씨를 데리고 왔을 때가 떠오르는 군요.”
“나름 신기한 경험이었죠.”
“저도 재미있었습니다. 설마 살짝 장난 좀 쳤다고 그렇게 애처롭게 울어 젖히실 줄은….”
“닥쳐요.”
“네? 닥치라고요? 아하. 그때 엉엉 우시면서 누구를 계속 부르시던데 말이죠. 수…? 수 무슨 오빠였는데. 누구더라?”
“죄, 죄송해요. 제발 조용히 해주세요.”
…저 베히모스라는 해골 기사, 왜 자꾸 탐이 나는 걸까?
그렇게 안개 속으로 들어온 이후, 나는 둘 사이 오고 가는 만담을 반주 삼아 길을 걸었다.
잠시 후.
콰르르르르르르르!
약 200 미터 가량 걸었다고 생각될 즈음, 돌연히 안개가 살그머니 가라앉아 시야가 탁 트였다. 이어서 드러난 풍경은 1, 2회 차를 통틀어도 몇 번 보지 못했던 비경(祕境)을 품고 있었다.
산의 절반을 뚝 꺾어 놓은 듯한 깎아 세운 낭떠러지와, 어디서부터 내려오는지도 모를 세차게 쏟아지는 용암 폭포. 그 아래로는 차마 헤아릴 수 없을 깊이를 보이는 용암이 바다처럼 흐르고 있다. 붉은 빛을 띤 각양각색의 기암괴석들이 용암에 절반 정도 몸을 담근 채 굳건히 박혀 있었다.
설마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다. 조금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베히모스의 말이 한층 와 닿는 걸 느꼈다.
그때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구경하던 김한별이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요.”
“응? 혼자서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아가씨?”
“저번에 눈 여겨봐둔 장소가 있거든요. 그때 자세히 보지 못했으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구경할 거예요.”
“흠. 상관없겠죠. 허나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번처럼 길 잃은 두려움에 오줌 싸시는 것까지는 좋은데, 어지간하면 강에 대고 싸주세요.”
그러자 김한별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Shut The Fuck Up. Suck My Asshole.”
영어까지는 알아듣지 못했는지 베히모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응? 셔러퍼겁…? 석마애쏠…?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정말 고맙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뜻이에요. 그럼 다녀올게요~.”
김한별은 입에 침을 바르며 밝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어딘가로 조심조심 걸어가기 시작했다. 베히모스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김한별을 배웅하다가, 곧 빙글 몸을 돌려 다가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로 그런 뜻입니까?”
“…아니요. 제발 닥치고 내 똥구멍이나 빨아 라는 뜻입니다.”
나는 쓰게 웃으며 진실을 말해주었다. 조금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진실을.
“으음. 역시나. 그런데 조금 충격이네요. 설마하니 그런 분으로 보이지는 않으셨습니다만.”
그러자 작은 탄식을 내뱉은 베히모스는 꽤나 놀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가씨가 항문을 빨리는걸 좋아하셨다니…. 취향은 존중합니다만, 상상해보니 상당히 더럽군요.” 라고 중얼거렸다. 김한별이 졸지에 변태가 됐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어색한 헛기침을 한 베히모스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외쳤다.
“아무튼, 대 초열의 야장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야장이라 함은 다름 아닌 대장간을 뜻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대장간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응? 반응이 왜 그렇습니까? 조금 더 놀라실 줄 알았는데.”
“예. 이미 충분히 놀랐습니다.”
“그렇기는 한데. 좋은 의미의 놀라움이 아니라, 무언가 탐탁잖아 보이는 놀라움 같습니다만.”
“…뭐, 그냥.”
“그냥?”
“글쎄요. 그냥 이런 세상에 대장간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달 까요.”
말 그대로였다. 대장간이 있다 길래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조금 김이 새는 기분이랄까. 사실 대장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게, 그냥 아름다운 풍경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다못해 용광로나 모루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이거 이거. 이런 세상이라니. 우리 지옥을 꽤나 무시하시는 발언이시군요.”
내 표정을 읽은 걸까. 베히모스가 내 속을 딱 짚어 말하더니 근엄하게 팔짱을 꼈다. 약간이지만 자존심 상한다는 기색이 깃든 음성이었다.
“하지만 이해합니다. 하기야 인간의 관점에서는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망치질을 하는 장소를 대장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실제로 지옥에 그런 장소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그건 또 어디 있습니까?”
“…초열 구간에 있습니다.”
“흠.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하네요.”
비꼬려는 의도가 아니라 정말로 신기해서 한 말이었다.
“하나도 신기하실 거 없습니다. 야장은 인간들의 전유물이 아니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왠지 모르게 발끈하는 것처럼 느껴진 탓에 나는 가볍게 수긍해주었다. 베히모스는 투박한 장갑으로 투구를 긁더니 피리 부는 소리를 흘렸다.
“아무튼 지옥의 마수들도 밥만 먹고 똥만 싸는 놈들은 아닙니다. 각 구간마다 차이는 있어도, 나름대로 발전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혹시 다른 마수들도 자아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베히모스처럼요.”
베히모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요. 물론이죠! 물론 많은 마수들이 이 지옥이란 세상에서 태어나 본능적으로 살아가지만 서도, 다들 기본적인 자아는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개중에는 외부에서 끌려들어와 구성원이 된 경우도 적잖게 있지요. 그럴 때는 과거의 인격을 유지한 채 구성원이 되는 경우도 있어, 조금 더 확실한 자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말을 할 수도 있어요. 저처럼요.”
“오?”
“또한 그걸 활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까 말씀 드렸던 초열 지옥의 야장도, 생전에 인간이었던 마수가 건축한 구조물이지요. 어때요. 이제 좀 이해가 되시나요?”
“조금 더 봐야 알겠지만, 우선은 알겠습니다.”
조금 감탄하는 척을 하자 베히모스는 신이 나는지 굉장히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아직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이해는 가는 말이라 나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깡!
어디선가 쇠와 쇠가 부딪치는 듯한 철성이 울렸다. 아까 미미하게나마 들었던 소리였다. 이번에는 더욱 확실하게 들려와,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아차. 거의 다 와놓고서는….”
베히모스는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더니 무언가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잠시 가면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응? 도착한 거 아니었나요?”
“그렇기는 한데. 대공께서는 조금 더 안쪽에 계십니다.”
“아.”
그러고 보니 게헨나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윽고 바삐 걸음을 놀리는 베히모스를 따라가며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대 초열은 게헨나가 관할하는 구간이라고 했고, 이 지역은 대 초열 야장이라 불리는 장소다. 그리고 게헨나는 감사 인사를 하려고 나를 부른 거라고 한다.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고 하니 무언가를 줄 것 같기도 한데. 설마 만들어서 주려는 건가? 아니면 리본을 머리에 예쁘게 묶고 자신이 선물이라고….
그렇게 나름 행복한(?) 상상에 빠져 있을 즈음.
“들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이 대 초열은 군단장을 제외하면 들어올 수 없는 구간입니다.”
앞서 걸어가던 베히모스가 돌연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입고 있는 시꺼먼 갑옷을 툭 건드렸다.
“이 갑옷, 보이십니까?”
“예. 잘 보입니다.”
“그렇군요. 자랑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 갑옷은 여기서 만들어낸 작품, 아니 걸작입니다. 바로 대공께 하사 받은 갑옷이죠.”
“걸작이라.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갑옷에 대한 애착심이 대단하시군요.”
“네. 그럴 수밖에요. 오직 군단장들만이 받을 수 있는, 대공께서 직접 만들어주신 물건인데요.”
“음?”
게헨나가 만들어줬다고?
이건 조금 의외였다. 망치질을 하는 지옥 대공이라니. 상상하기 조금 힘들지 않은가. 하기야 못할 이유도 없겠지마는.
“혹시 야장에서 무언가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다시 뜬금없는 질문이 날라왔으나 나는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글쎄요. 물건을 만드는 재료?”
“후후.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
“저는 불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이요?”
“네. 얼마나 좋은 불을 쓰는지. 또 얼마나 알맞게 온도를 조절하는지. 한 마디로 열처리가 관건이라는 거죠. 이에 따라 질 나쁜 철도 날카로운 명검으로 변할 수 있고, 고급 미스릴도 쓰레기로 변할 수 있습니다. 즉 재료도 중요하지만, 결국에는 부차적인 문제라는 거죠.”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 말을 하는 걸까?
“그러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문득 우뚝 걸음을 멈춘 베히모스가 갑자기 주변을 돌아본다.
“이 최고의 재료들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용암이 흐르는 바다와, 반쯤은 고개를 내민 핏빛을 머금은 기암괴석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 어느 것과도 비할 수 없는, 차원 최강의 불이 만난다면.”
다음 순간, 베히모스의 시선이 낭떠러지 방향 더욱 깊숙한 곳으로 향한다.
“…과연, 어떤 걸작이 탄생하실 것 같습니까?”
이윽고 나를 힐끔 돌아본 베히모스는, 시뻘건 안광을 뿌리며 이를 딱딱 부딪쳤다.
“저로서는…. 감히 예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 순간.
깡!
낭떠러지 안에서 들려온 맑은 소리가 한 번 더 귓가로 흘러들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에는 완결까지 가는 장비가 하나 나올 예정입니다.
다른 장비들보다 설정에 조금 더 공을 들였습니다. 부디 기대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