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77
00676 3. 한편, 같은 시각. =========================================================================
실로 오랜만에 사용해보는 제 3의 눈.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곧바로 정보가 출력되지 않는다. 부여된 설정을 읽어내는데 시간이 걸리는지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우선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설정을 읽는 게 늦는다는 소리는 그만큼 효과가 엄청나다는 방증일 테니까.
그러는 동안.
짝! 짝!
“오늘따라 입을 상당히 재밌게 놀리는구나. 그렇게나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느냐?”
“아악! 조, 좋습니다! 아악! 더 강하게 때려주세요!”
한쪽에서는 어느새 건져냈는지 베히모스가 지면에 엎드려 있고, 게헨나는 한쪽 발로 베히모스를 짓밟은 채 처벌을 가하는 중이었다.
아니. 처벌이라고 말하기에는 상당히 애매하다. 게헨나의 채찍이 한 번 후려칠 때마다 베히모스는 온몸을 비틀어 젖히며 교성(?)을 지르고 있었으니까.
“이! 이 못된 것! 말하는 꼴이 음란한 암퇘지나 다름없구나! 처음에는 고결하기 그지없던 영혼이, 어이하여 이렇게나 타락했다는 말인가!”
“좋아요! 좋다고요! 저를 더욱 비난하고, 더욱 매도하라는 말입니다! 하아아악!”
…처, 처음에는 고결했던 영혼이라. 아무리 좋게 봐도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데.
아무튼 계속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기분이 서서히 더러워진다.
띠링!
더는 볼 수 없어 눈을 돌리려는 찰나, 때마침 익숙한 음이 들렸다. 이어서 허공으로 상당한 장문의 설명이 출력된다. 마침내 제 3의 눈이 정보를 읽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허공에 떠오른 설명을 읽기 시작했다.
『게헨나의 수호 요새(Protected Fortress Of Gehenna).』
1. 설명.
수천 년의 세월을 간직한 용암의 정수와 최강의 염화인 지옥 겁화가 어우러져 탄생한 최고의 마력 갑옷. 원래 겁화는 파괴 성향이 짙은 속성이나, 보호 요새를 만들어낸 지고의 존재가 착용자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수호 속성을 띠게 됐다.
사용자의 마력으로 발현되는 마력 갑옷의 일종으로, 마력이 허락하는 이치상 외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행사를 무시한다. 이론상이기는 하나, 착용자의 마력만 무한하다면 전략 병기 급의 공격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사실상 이미 보통의 갑옷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거의 보호 요새를 구가하는 방어력을 구축하고 있다.
딱 하나 단점이 있다면 마력 소비가 무시무시하다는 것. 단순히 마력 갑옷을 발현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마력이 소비된다.
2. 효능.
① 기본적으로 사용자의 마력에 기반해 발동되는 만큼 착용한 보호구에 적용돼 형태가 드러난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모든 물리적, 마법적 행사에 의한 충격을 무시한다. 그러나 그만큼 사용자의 마력 소비는 가속화되며, 동격의 힘을 갖춘 공격은 무시하지 못한다.
② 의지가 깃든 정수로 만들어진 만큼 착용자를 맹목적으로 보호하려는 자아를 갖고 있다. 이제 갓 탄생한 터라 아직 어린 자아에 불과하나, 서로 지속적인 교감을 나누고 성장하며 호흡을 맞출 수 있다. 현재는 모든 공격 당하는 상황을 스스로 판단하고 방어하려고 한다. 그로 인해 사용자가 인지하지 못한 기습을 방어할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사용자 스스로 방어가 가능한 상황에서도 마력 갑옷이 발현될 수 있다.(현재 성장 정도 : 0%)
모든 정보를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눈을 비비고 말았다. 한 번 비비고 또 보고, 두 번 비비고 다시 보고.
그렇게 네 번이나 거듭해서 읽고 나서야 나는 정보를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와.”
절로 탄성이 나온다. 세상에. 모든 물리적, 마법적 행사를 무시한다니. 거기다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장비라니.
허겁지겁 정보를 지우고 아래를 쳐다보자, 내 품에 얌전히 안긴 채 은은한 붉은빛을 흘리는 둥글둥글한 정수가 보였다. 보석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크고, 구슬이라고 보기에는 약간 작다.
나는 넋을 잃은 채 발그스름한 빛을 띤 구슬을 응시했다. 이게 보호 요새라는 이름을 지닌 장비라는 말인가. 그리고 조금 전까지 그 기암괴석이었다는 말인가.
물론 가만히 보면 단점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정보에 명시돼있듯이, 마력 소비가 엄청나다는 점을 유일무이한 단점으로 꼽을 수 있다.
허나 그 점을 감안하고서라도 이 장비가 갖는 매력은 부인할 수 없다.
우선은 마력으로 발현되는 마력 갑옷의 일종이라는 것. 그리고 착용한 보호구에 적용돼 형태가 드러난다는 것. 이 말은 내가 또 하나의 보호 장비를 착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말인즉 현재를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기존 영광 세트에 더해서 이 요새 장비의 방어 효과를 추가할 수 있다는 소리.
그뿐일까. 자아를 갖고 있고 정신적으로 성장한다는 점 또한 굉장한 장점이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공격까지도 스스로 판단해 보호해준다고 한다. 이건 난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기습이나 암살을 당할 가능성이 0%로 줄어들었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이 정도의 장비는 홀 플레인 전 대륙을 통틀어도 몇 개 없는, 아니 내 사용자로서 인생을 통틀어 처음 가져보는 최고의 장비였다. 마력 소비가 심하다고는 하지만 내 마력 능력치가 낮은 것도 아니고. 아마 강철 산맥 공략 전에 이걸 갖고 있었다면, 파더든 쿠샨 토르든 가볍게 결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정말 장난이 아닌데. 진짜 물건이네. 앞으로 한 번 잘해보자. 하하.”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기쁜 마음이 들어, 나는 구슬을 들어올려 볼에 비볐다. 보물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그때였다.
띠링!
『게헨나의 방어 요새가 사용자 김수현의 애정 표시에 부끄러워합니다. 성장 정도가 0.17% 상승합니다.』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뭘 부끄러워해?
띠링!
『자아를 지닌 채 태어난 장비는 탄생 목적에 따르는 고유한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성질에 부합되는 경험을 하고 착용자와 호흡을 맞추면서 성장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장비의 자아를 완전하게 각성시킬 수 없습니다. 게헨나의 수호 요새 경우 ‘보호’ 라는 사명을 갖고 태어난 만큼, 자신을 사용하는 주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사용자 김수현도 그에 상응하는 관심을 보인다면, 장비의 자아 성장 또한 급격한 상승 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나는 멍한 기분으로 새로 떠오른 메시지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수라 같은 경우는 내 나쁜 버릇을 자세하게 알고 있다고. 그걸 기억해두었다가 전투 때 나도 모르게 버릇이 나오게 되면, 스스로 움직여 궤도를 수정해주는 경우가 있거든.’
그러자 문득 예전에 공찬호와 나눴던 대화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갈 즈음.
“흐응. 보아하니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구나.”
고혹적인 목소리가 살금살금 귓가로 다가왔다. 게헨나가 흐뭇한 표정을 짓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순간 처벌 결과가 궁금해 베히모스가 어찌됐는지 보려고 했지만, 시선을 돌릴 때마다 게헨나의 몸이 홀연히 이동해 시야를 방해했다. 마치 절대로 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처럼.
결국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이자, 게헨나가 싱긋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렇게 볼에 비빌 정도로 좋아하다니…. 만들어준 입장에서 흡족하기는 하다만, 이미 그 정수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눈치인데?”
“응. 따로 정보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
어차피 게헨나 앞에서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나는 제 3의 눈의 존재를 순순히 인정하는 동시, 아직도 내가 정수를 볼에 비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게헨나가 한 손에 입을 대고 쿡쿡 웃고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후후. 그렇다면 따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아도 되겠지.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명심하거라. 분명 그 정수의 보호 능력은 쓸만하나, 어디까지나 그대의 마력을 기반으로 발현되는 능력이다. 그러니 항시 가용할 수 있는 마력을 점검해야 할 것이다.”
“응. 알겠어. 그런데….”
어차피 메시지에도 적혀 있던 주의 사항. 그 정도야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허나 지금은 그보다 더욱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 게헨나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거…. 정말로 받아도 되는 거야?”
“응?”
그랬다. 아까 베히모스의 말을 들어보면 거의 대 초열의 산 증인에 해당하는 보물을 받은 것 같은데….
물론 받은 입장에서는 고맙기 한량없으나, 고작 임신(?) 한 번 시켰다고 이런 대우를 받는다는 건 사실 묘하게 신경 쓰인다. 한 마디로 정리해보면, 무언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게 아닐까라는 막연한 추측이 들었다.
“그, 그런가? 너무 부담스럽느냐?”
“그렇다기보다는…. 사실 내 입장에서는 감이 잘 안 와서. 왕의 잉태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그 순간이었다.
“어, 어?”
뜻밖에도 게헨나는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왕의 잉태라는 말을 꺼낸 순간 느닷없이 몸을 움찔하며 탄식을 지른 것이다. 낯에 한껏 당혹한 빛을 역력히 드러낸 채 빠르게 눈을 깜박거린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와, 왕의 잉태에 성공했다니…. 그건 또 어디서…. 아, 아니. 그게 무슨….”
“응? 성공한 거 아니었어?”
“그, 그게….”
“베히모스가 그러던데. 무간 구간의 변화를 보지 못했느냐면서….”
그 순간 게헨나가 아미를 와짝 찡그리더니 두 눈을 희번덕 빛내며 재빠르게 옆을 돌아보았다. 따라 시선을 돌리자 마침 온몸에 묶인 채찍을 풀며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 베히모스를 볼 수 있었다.
“응? 대공. 또 왜 저를 노려보시는 겁니까? 무섭게.”
이윽고 완전히 몸을 일으킨 베히모스는 귓가에 거슬리는, 그러나 까닭 없이 해맑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게헨나는 부르르 몸을 떨더니 어디선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너, 너는 정말…. 도대체 무슨 말을….”
“응? 아아. 네.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부왕 대우도 해드렸고요. 어때요. 잘하지 않았습니까?”
양손을 허리에 척 얹으며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미는 베히모스. 그러나 베히모스를 보는 게헨나의 눈초리는 결코 곱지 않았다. 마치 일생에 도움이 안 된다는 듯한 눈빛을 빛내며 죽일 듯이 노려본다. 베히모스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얼른 손을 내리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아니 왜 그렇게…. 제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사실…. 이잖아요….”
“오빠. 다들 여기 계셨어요?”
그때, 마침 공교롭게도 김한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나와 베히모스가 걸어온 흔적을 보고 따라온 모양.
그러한 찰나, 나와 같이 김한별을 돌아본 베히모스의 행동은 굉장히 신속했다.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김한별을 확인한 순간, 매우 맹렬한 기세로 마주 달려가더니 달려오는 그대로 업어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그 상태로 앞으로 달려가기까지. 김한별의 낯에 멍한 기색이 서린다.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빨리 내려주세요! 오, 오빠! 오빠!”
“자자, 우리는 이만 갑시다. 제가 경치가 아주 좋~은 장소를 알고 있어요!”
“됐으니까 놓으라…! 꺅! 어딜 만져! 어딜 만지냐고!”
“응? 항문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이내 삽시간에 도로 멀어지는 김한별을 보며 나는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도로 몸을 돌아보자, 여전히 낯을 찡그린 채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씹고 있는 게헨나를 볼 수 있었다. 무언가 계획이 틀어졌는지 상당히 고심하는 표정이다.
“저기, 게헨나?”
“후…. 베히모스…. 정말 도움이…. 이래서야 내가 할 말이….”
“게헨나! 왜 그래?”
“으, 응?”
약간 목소리를 높이며 다가가자 게헨나가 깜짝 놀라며 걸음을 물러섰다. 그러나 곧 자신의 행동을 깨달았는지 재빠르게 표정을 관리하며 어색하게 기침한다. 그러자 나 또한 덩달아 어색한 기분이 들어 가만히 정수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야장에는, 나와 게헨나 둘만 남았다.
============================ 작품 후기 ============================
조금 애매한 느낌은 있으나 외전 3 챕터는 여기서 끝났습니다. 다음 회부터는 외전의 마지막은 4 챕터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일전에 말씀 드렸듯이 아마 이번 주 안으로는 끝날 예정입니다. 저도 이제 슬슬 머서녀리 클랜이 그립네요. 다음 회는 겸사겸사 머셔너리 이야기도 조금 넣어야겠어요. 하하.
그리고 아마 독자 분들께서 이번 외전 중 가장 궁금하신 부분이 ‘앞으로 게헨나는 어떻게 되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 부분은 4 챕터 안에서 확실하게 풀어드리겠습니다. 나름대로 얽힌 비밀은 하나 있어요. 🙂
마지막으로 어제 코멘트로 응원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집안에 결혼이라는 경사와 교통 사고라는 조사가 겹치다 보니 상황이 상당이 미묘하네요. 그래도 저는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