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78
00677 4. 약속된 이별. =========================================================================
시간이 흐른다.
게헨나는 베히모스가 김한별을 보쌈(?)하고 사라진 이후로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왜 그러는지 이유라도 알려주면 좋으련만, 정작 게헨나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저 내 귀환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할 뿐, 나는 함부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현재 나름 괜찮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는 하나, 현실은 지극히 냉정하다. 둘러싼 관계는, 여전히 게헨나가 갑의 입장에 서 있으며 나는 무언가를 요구할 처지가 아니다. 부탁이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말이다.”
결국 게헨나가 말문을 연 것은 약 5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자연스레 긴장감이 샘솟는걸 느끼며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과연 게헨나는 내가 돌아가는걸 허락해줄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문제라도 있는 걸까?
그렇게 오만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갈 무렵.
“실은 베히모스의 말은 옳지 않다.”
비로소 들려온 첫마디는, 약간은 예상을 빗나간 말이었다.
“으, 응?”
“그, 그러니까! 그, 그 말이 아주 틀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아예 맞지도 않는…?”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다가 말끝을 흐린다. 그래. 듣는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너도 그렇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해달라는 뜻을 담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나 한 번 당황하자 걷잡을 수가 없겠는지, 게헨나는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결국 나는 게헨나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았다.
게헨나는 베히모스의 말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고 했다. 여기서 베히모스의 말은 게헨나의 임신을 의미한다. 정리하면 왕의 잉태가 불확실하다는 말인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게헨나의 말은 잉태가 확실하지 않다는 소리야?”
“그래! 그렇지!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그 순간 게헨나가 반색하며 외쳤다. 어찌나 기꺼워하는지, 마치 목욕탕에서 넘치는 물을 보고 ‘Eureka!’ 를 외친 아르키메데스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면 있잖아. 무간 구간이 변화한 건 결국 어떻게 되는 거야?”
별 뜻이 있는 질문이라기보다는, 그냥 개념을 확실히 잡으려는 의도로 건넨 말이었다. 설령 게헨나의 말대로라고 해도, 관계 후 발생한 무간 구간의 변화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왕의 잉태를 확신할 수 없다면, 수천 년 동안 죽은 상태로 단 한 번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던 세상이 왜 갑자기 그런 변화를 보인 걸까?
조금 깐깐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최소한 이 부분만큼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정말 안타깝게도, 게헨나는 또다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얼굴이 흡사 정곡을 찔렸다는 듯 삽시간에 굳어졌다. 달싹거리기만 하는 꽃봉오리 같은 입을 보고 있으려니, 이제는 나도 머리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애초 예상하던 요지와 한참이나 빗나간 건 차치하고서라도, 게헨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감을 잡을 수조차 없다.
– 아, 머리 아파…. 김수현. 쟤 지금 도대체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화정도 여태껏 듣고 있었는지 기나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낸들 알겠냐. 당혹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라고.’
– 어휴. 저런 애가 나와 동격의 존재라니…. 창피하네 정말. 야, 야. 혹시 쟤 너랑 더 자고 싶어서 저러는 거 아니야?
응? 나랑 더 자고 싶어서 저러는 거라고? 그 지옥 대공, 아니 게헨나가?
‘…에이. 너는 말을 해도 참.’
설마 그러겠냐는 생각에 나는 싱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 하기야…. 그래도 지고의 존재인데, 그런 파렴치한 생각은 하지 않겠지?
화정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흐흠. 베히모스는 아무것도 모르느니라. 잘못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함부로 입을 놀렸다. 그래서 아까 죄를 다스린 것이다.”
문득 어색한 헛기침과 동시에 게헨나의 조용한 음성이 이어졌다. 시선을 들자 어느새 조금이나마 진정된 얼굴을 하고 있는 게헨나를 볼 수 있었다.
게헨나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거라. 무간은커녕 대 초열도 이 몸이 허락해야만 출입이 가능한, 고작해야 군단장에 불과한 놈이다. 그러면서 무얼 그리 잘 알고 있겠느냐. 무간의 탄생과 소멸에 얽힌 비밀은 군단장들도 문외한이나 다름없느니라.”
“아. 그래? 듣고 보니 그러네.”
이거는 그래도 말이 된다. 확실히 군단장들도 접근이 불가능한 영역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비밀’ 이라고 한다면, 게헨나가 아까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모습도 설명이 된다.
“그러면 그 비밀이라는걸 좀 말해줄 수 있을까? 어쨌든 나도 협력하는 입장이니까.”
부왕의 자격이라고 말하려다가 갑자기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어 협력하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음. 좋다. 허나 지금부터 듣는 내용은 그 누구에게라도 발설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게헨나는 안될 것 없다는 듯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키더니 차분히 호흡을 고르기 시작한다. 저건 긴장된 마음을 추스를 때나 하는 행동인데…. 그 게헨나가 저럴 정도라면 진정 어마어마한 비밀일 것이다.
이후 게헨나는 절대로,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약조를 거듭 받고 나서도, 두어 번 나를 흘끗흘끗 살폈다. 그리고 처음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인 것과는 달리, 약간 마지못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지옥의 입구라 불리는 등활부터 시작해서, 왕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불리는 무간까지. 그대도 알고 있듯이 지옥은 총 8개의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니까 등활부터 하나씩 넘어갈수록 상위 구간 개념으로 보면 되는 거지?”
“정확하다. 그렇게 각 구간은 독립된 세상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어탑으로 연결된 연속된 구간임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겠지.”
“그리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구간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무간이다. 즉 왕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모든 구간을 아우르는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지.”
“아우르는 역할이라…. 확실히 이해했다.”
말을 들어보니 게헨나가 왜 그렇게나 왕을 원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기분이다. 현대적으로 생각해보면 지옥은 현재 무정부 상태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를 보던 게헨나의 두 눈이 살그머니 옆으로 이동한다.
“그러면…. 그대도 기억할 것이다. 그때 무간에서 그대와 내가 치렀던 의식을.”
한순간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애써 떨쳤다. 애초 게헨나와의 관계는 왕의 탄생을 목적으로 한 일종의 협력이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게헨나도 굳이 의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테고.
나는 쓰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그때 우리는…. 총 8번의 의식을 치렀지.”
“음. 그랬지. …응?”
“그리고 금방 말했듯이 무간 구간은 8번째 구간이고.”
“……?”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 거지? 왜 갑자기 삼천포로 빠진 기분이 드는 걸까?
“저기…. 게헨나? 무언가 조금 이상한….”
“조, 조용히 하거라! 아직 이 몸이 말하는 중이지 않느냐!”
이상하다는 생각에 질문을 하려 했으나 게헨나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고 보니 낯을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고, 시선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지 않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않느냐. 아까도 말했듯이 무간은 모든 구간을 아우르는 구간이다. 그러므로 그에 마땅하면서도 합리적인, 긴 의식을 치러야 한다.”
“긴 의식?”
“그래. 우선 말해보면, 나와 그대는…. 이, 이 대 초열에서도 무, 무간에서 치렀던 의식을 이어가야 한다는 소리다!”
“…….”
그 순간 내 안에 있던 어이가 차곡차곡 짐을 정리하더니 싱긋 웃으며 가출하는 착시가 보였다. 떠나가려는 어이를 붙잡으며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대 초열은 7번째 구간이니까, 여기서는 7번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소리야?”
게헨나가 몸을 움찔 움츠렸다.
“초열에서는 6번?”
그러자 한 번 더 움찔했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게헨나.
결국 어이는 기어코 내 손길을 뿌리치고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아니. 이게 당최….
– 미친! 그게 무슨 개 헛소리야! 애초 구간이랑 관계 횟수랑 서로 무슨 상관인데?
화정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줬다. 그냥 헛소리도 아니고 개 헛소리란다.
– 이거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결국에는 내 말이 맞잖아!
– 어쨌거나 너랑 떡 좀 더 치고 싶다는 소리잖아!
– 고, 고작 몇 번 쳤다고 고새 맛 들려서 말이야!
– 파, 파렴치해!
화정은 그야말로 길길이 날뛰었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화가 난다기 보다는 허탈하다고 해야 할까? 엄청 중요한 말을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한다는 소리가…. 이건 완전 억지가 아닌가.
까닭 없이 긴 한숨이 나온다. 한숨 소리를 들은 걸까. 게헨나는 애써 오연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으나, 얼굴 한 켠에 그늘진 시무룩한 기색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그래. 자신도 알고 있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결국 나는 정면 직구로 승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게헨나의 말은…. 나와 조금 더 관계를 갖고 싶다는 소리지?”
“그, 그게 무슨 말이냐? 허, 헛소리도 그 정도면 수준급이구나!”
역시나 게헨나는 강하게 부인했다.
“이 몸을 고작 육체적 쾌락을 좇는 파렴치한이라고 생각하다니…. 실망이구나 그대여! 이건 우리 세상의 부흥을 목적으로 한 매우 정당한 요청이다!”
게헨나는 살짝 아미를 찌푸리고는 당당한 태도로 외쳤다. 그래. 말만 들으면 아주 숭고하지. 정말 드높은 목적이야.
그러나 불안하게 흔들리는 진홍색 눈동자나 낯 전체에 깔린 애타는 기색은, 게헨나의 속을 능히 짐작하게 해주고도 남는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몸의 반응은 정직하기 그지없다.
사실 그렇게나 기분이 나쁜 건 아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게헨나가 나를 원하고 있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나는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거 하나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요청이다. 비록 ‘언젠가’ 라는 꼬리가 붙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옥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전혀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여러 방면에서 말이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게헨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게헨나. 네 마음은 알고 있고, 또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정말로 미안해. 나는 이제 그만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아. 말해버렸어. 말해버리고 말았어.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돼버려.
– 아이고~. 속 시원해! 그래! 바로 이거지! 우리 김수현 아주 예뻐 죽~겠네? 잘했어 잘했어!
드물게도 화정이 나를 크게 칭찬했다.
화정의 응원에 힘을 입어 겨우 속을 추스르자, 뜻밖에도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헨나가 보였다.
“…그, 그래? 그렇구나.”
…아니. 뜻밖이 아니었다.
게헨나가 태연한 건 잠깐에 불과했다. 돌연 나를 마주하는 두 눈동자가 삽시간에 그렁그렁하게 변한 것이다. 부르르 떨면서 오물오물 움직이던 입은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이어서 게헨나가 애처로이 시선을 내리깔더니 하얗고 탐스러운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다.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
잠시 후.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것도 줬는데….”
게헨나로부터 살짝 젖은 음성이 흘러들었다. 나는 재빠르게 정수를 들어올렸다.
“아. 이거? 도, 돌려줄까?”
“다른 구간에도 좋은 것들이 많은데…. 그것들도 주고 싶은데….”
“그, 그건 고마운데 말이지. 그, 그래도….”
“그대는…. 정말 너무하다….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무하는구나….”
결국 게헨나의 목소리가 완연한 울먹거림으로 일변했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생긴 반려인데…. 그대의 마음은 얼마나 차갑길래 이렇게 매정하게 구는 것이냐….”
“저 게헨나. 그게 아니라. 옛말에 이별은 빠를수록 좋다는 말이….”
“되었다. 평생을 함께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일곱 밤만 같이 지내는 것도 싫다는 게 아니냐.”
“…….”
계속 이어지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나는 굳건한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는걸 느꼈다.
“이건 내 아이이기도 하나, 그대의 자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앞으로 아비 없이 키울 생각만 해도 서러운데….
그래. 나는 차치하고서라도.
앞으로 태어날 아가가 안쓰럽고, 불쌍하지도 않더냐…?”
불현듯 게헨나가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소중히 감싸 안고는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애절하게 마저 느껴지는 눈빛과 마주한 순간, 나는 느닷없이 머리를 강타하는 거센 충격을 느꼈다.
문득 예전 우정민이 원혜수에 관해 했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스스로 몸 안에 아이가 있는걸 알고 있나 봐. 자신의 배를 감싸고 나를 애절히 쳐다보는데…. 그 순간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더군.’
게헨나의 말이 이어졌다.
“최소한. 최소한 앞으로 태어날 아가에게…. 네 아비는 어느 사람이었다. 어떠한 인간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만한 시간을 주는 게, 그리도 어렵느냐…?”
그동안 나를 꽁꽁 옭아매던 내면의 무언가가, 스르륵, 풀려나가는걸 느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한소영 표지가 나왔습니다.
이 표지를 제대로 감상하고 싶으시면 원본으로 보셔야 합니다. 정말로 디테일이 엄청나거든요. 저는 처음 그림을 보고 넋을 잃는다는 기분이 어떤 건지 제대로 느꼈습니다. 하하하.
원본은 PC에서 제 작품을 클릭하시면요. 우측 메뉴에 작품 설정이라는 칸이 보이실 겁니다. 그 중 맨 위에 글을 클릭하시면 사진이 하나 뜨는데, 그 사진을 한 번 더 클릭하시면 원본으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작은 표지로 보시는 것보다 훨씬 더 와 닿는 감정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