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79
00678 4. 약속된 이별. =========================================================================
아주 오래 전….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처음에는 그리 좋은 사용자는 아니었다. 실력이나 사용자 정보가 일천한걸 떠나, 사용자로서 정신적인 각성이 상당히 늦었다. 살아남을 적극적인 행동이나 궁리는커녕,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이 두렵고 힘들어 맞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도시 안에 틀어박힌 채 겁쟁이처럼 벌벌 떨면서 끝없이 외톨이가 되어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살아남으려면 언젠가는 세상으로 나가야 했다.
‘그래. 한 번 해보자.’ 라는 생각으로 용기 내서 나간 건 아니었다. 세상으로 나간 내 첫 번째 걸음은, 우습게도 돈이 없어서, 배가 고파 거의 떠밀리듯이 나간 경우였다. 그래도 초심자의 행운이 따랐는지, 가까스로 내디딘 첫걸음은 미약하게나마 그럭저럭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때 처음 배분 받은 돈으로 사먹은 고기 맛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언제나 성공만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0년 차 사용자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이후 겪어야 했던 현실은 지극히 냉혹하기만 했다.
‘우리와 나간 게 첫 번째 탐험이었다고요?’
‘어쩐지. 그래도 성장 가능성은 꽤 있어 보이더라. 괜찮으면 다음 탐험도 우리랑 같이 가도록 해요.’
그렇게 두 번째로 나간 탐험에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미끼 역할을 맡고 있었다. 정말 천운으로 간신히 도망쳤을 때, 캐러밴의 리더를 맡은 여인은 겨우 살아 돌아온 나를 보며 표정을 찌푸렸다. 그리고 선심이라도 쓰듯이 아주 약간의 돈을 던져주기까지. 그때 나는 바보같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돈을 들고 돌아서야만 했다. 그저 도시 내 노숙하는 장소 구석에 웅크리듯이 누워, 억울함에 겨운 눈물 한 방울만 찔끔 흘렸을 뿐.
돌이켜보면 그 당시의 나는 무모했다. 무모하기만 한 게 아니라 멍청하기까지 했다. 그 사건을 경험 삼아 무언가 깨닫기라도 한 게 있어야 하는데, 이후로도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쩌다 탐험을 나가면 항상 이용당하기 일쑤였고, 탐험을 나가지 못하는 날은 하루 종일 광장을 서성이다가 힘없이 걸음을 돌렸다. 잠잘 곳을 마련하기는커녕 하루 끼니를 잇는 것도 요원한 일이었다.
그뿐일까. 친구라고 믿었던 사용자에게 배신당해보기도 했고, 악착같이 모은 돈을 한순간 도둑맞아보기도 했다. 그러고도 하소연할 곳이 없어 속으로만 삼키며 울었다. 겉으로는 울지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늘 울면서 지냈다.
그나마 한 가지 괜찮았던 건 적어도 미워할 상대는 있었다는 것. 나를 이용한 상대를 원망했고 부족한 나를 탓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볕 들 날이 올 거라 믿고 기다리면서. 아마 그때가 내가 마지막으로 순수했던 시절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기다려 마지않던 볕 들 날이 왔을 때부터였다. 정말 우연히 어느 사내의 주도로 새로운 캐러밴 창설에 참가하게 된 이후, 나는 항상 캐러밴 주변을 겉돌았다. 또 미끼가 되는 게 아닐까, 또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지는 게 아닐까 매일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그 캐러밴의 사용자들은 진심으로 나를 대했고, 사용자가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생각해주었다.
언젠가 리더를 맡은 사내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왜 저를, 이런 저를 캐러밴에 받아주신 겁니까?’
그 말에 사내는 이렇게 말했다.
‘왜냐고? 그거야 간단하네. 확실히 수현 자네는 그렇게 매력 있는 사용자는 아니야.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말해주겠네. 비록 사용자 김수현은 조금 볼품없더라도, 사람으로서의 김수현은 매력이 넘치는 이라고. 적어도 나한테는 말이야.’
‘이래봬도 사람 보는 눈은 좋다고 자부하거든. 자네는 배신을 당할지언정, 먼저 그것도 스스로 배신할 사람은 아니야. 그래서 자네를 내 캐러밴에 참가시킨 걸세. 나는 우리 캐러밴을 실력을 우선하는 집단이 아닌, 서로가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가족으로 만들고 싶어.’
아마 그 말에 상처받은 내 마음이 열린 게 아니었을까. 이 각박한 세상에서 처음으로 믿을만한 사람을 만났다는 게 기뻐, 이후 나는 늘 사내를 믿고 따랐다. 그러면서 확실하게 캐러밴 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동료를 믿고 의지하자, 어느 순간부터 어엿한 동료로 각인될 수 있었다. 상처와 눈물로 얼룩진 내 사용자로서의 삶에 처음으로 행복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는 단 한 번, 푸른 산맥에서 잘못된 탐험을 한 결과로 전멸이라는 피해를 낳고 말았다. 리더는 물론, 탐험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동료들이 모조리 몰살당했다. 살아남은 이라고는 겨우 도주에 성공한 나와 다른 한 명뿐.
가족처럼 생각하던 이들을 잃었다. 그 당시 받았던 충격은 진정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고, 나와 하나 남은 동료는 서로 아무런 말도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결국에는 나는 또다시 외톨이가 되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그때 그 사건이 차후 이어질 기나긴 홀 플레인 인생의 전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가끔 생각하듯 내 1회 차 기억은 항상 비슷한 경험으로 점철돼있었다.
동료를 잃고 울고.
친구를 잃고 울고.
친형을 잃고 울고.
여인을 잃고 울고.
상실하고 우는 것이 반복되는 일상.
지금은 회상해도 그저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아련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일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지금 그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봐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계속 반복해서 경험하는 일상에 어느 순간 지쳐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잃고 상처받고 몸서리치고 울면서 지내며, 나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는 동시에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말인즉,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방법이야 간단했다. 상대를 사람이 아닌 사용자로 생각하고 대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정으로서 대하는 게 아닌 필요로서 대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단이나 도구로 생각되는 일이 많아졌다.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단적인 예로 이번 공략에 헬레나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그렇게나 격한 슬픔을 느낀 건 아니었다. 그저 내 시야가 넓지 못했음에 진한 아쉬움을 느꼈을 뿐. 애초 정을 붙이지 않았으니 미련이나 후회를 느낄 리가 없다.
그래서 나는 형과 한소영을 제외하고, 다른 사용자들에게는 어지간하면 정을 붙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대여….”
지금 내 정을 갈구하는, 자신에게 정을 붙여주기를 부탁하는 여인이 나타났다.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아버지라는 자격을 들먹이면서. 그 말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왜냐면 게헨나는 진정으로 나를 원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들은 말이 진심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까 생각했듯이 이 지옥에서 게헨나는 철저한 갑의 위치에 있는 존재다. 마음만 먹으면 나를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게헨나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애처롭게 눈을 빛내며 애절한 목소리로 나를 붙잡았다. 평생 붙잡지 않겠다고.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앞으로 태어날 우리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옆에 있어달라고. 역지사지로 생각했을 때 나는 과연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제발….”
이윽고 한 번 더 애타는 음성이 들려왔을 때, 나는 조금씩 마음이 돌아서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찰나의 순간, 한시라도 빨리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엄습했지만. 그리고 형과 한소영을 비롯한 클랜원들이 얼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
지금 눈앞에서, 평생도 아닌 딱 일곱 밤만 같이 지내달라는 게헨나의 요청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게헨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게헨나. 정말로 미안해.”
그 순간 게헨나가 눈동자가 물결처럼 일렁였다가 눈을 질끈 감는다.
“나는, 너와 평생을 같이 있어줄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래. 이게 정답이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게헨나의 말대로 지금 잉태한 아이는 내 아이이기도 했으니까.
“아…?”
이윽고 무언가 예상치 못했는지, 화등잔만 하게 눈을 뜬 게헨나가 살며시 입을 벌렸다.
“정말 일곱 밤만이라도 괜찮다면….”
그런 게헨나를 보며 나는 한 번 더 말을 잇는 동시에.
“그, 그대?”
게헨나의 바로 앞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당황해 하는 게헨나의 배를 양손으로 부여잡고서 차분히 귀를 밀착시켰다. 비록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으나, 무언가가 느껴지기를 기대하며 온 신경을 귀에 집중시켰다.
잠시 후.
나는 정수리를 감싸 안는 아늑한 손길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
– 신 대륙, 아틀란타.
한 청년이 간이 침대에 누운 채 천막의 천장을 응시하고 있다. 일견 멍해 보이는 눈동자는 흡사 죽은 사람은 연상케 할 정도로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낯에는 물론, 침대 시트에도 물 자국이 얼룩져있는 게 눈물이 흐르다 마른 모양이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또 한 번 주르륵 흘러내리더니, 청년이 얼굴을 와짝 찌푸리며 한 차례 작게 떨었다. 잠깐 참아내는가 싶었지만, 결국에는 몸을 돌리며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찡그린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지금 간이 침대에 누워 우는 청년은 다름 아닌 안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3주 전, 정확히는 김수현이 지옥 대공에 의해 끌려들어간 이후, 안현은 며칠간 꼬박 밤을 새고 울었다.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계속해서 흐느껴 울기만 했다.
이후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기는 했으나, 언제나 밝고 쾌활한 모습을 보이던 안현은 더 이상 없었다. 거의 항상 천막에 틀어박힌 채, 간이 침대에 누워 지내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보다 못한 고연주나 정하연이 따끔하게 혼을 내려고 들어가보기도 했지만, 안현이 우는 모습을 보고 침통하게 고개만 젓고 말았다. 두 여인 또한 김수현의 죽음에 가까운 실종에 크게 상심하고 있었거니와, 안현이 평소 김수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안현이 우는 소리는 진정으로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자신도 어떻게든 참으려 울음을 삼키려 노력은 하는데, 그럴수록 끅끅 거리는 신음 비슷한 흐느낌이 흘러나온다. 바로 지금처럼.
그때였다.
– 달칵.
조심스레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단아한 인상의 여인이 사뿐사뿐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손에 음식 그릇을 담은 쟁반을 들고 들어오는 여인은 다름 아닌 임한나. 안현의 몸을 걱정해 손수 음식과 물을 가져온 것이다.
“현아. 누나 왔어. 이것 좀 먹어봐. 응?”
사실 이 상황에서 임한나도 서글프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른 클랜원들, 특히 김수현과 통과의례부터 함께 해온 애들을 보면 도저히 티를 낼 수가 없었다. 보는 사람의 슬픔을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안현은 온몸으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안현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더니 임한나 몰래 주먹 쥔 손으로 눈을 훔치기 시작했다.
“예. 누나 오셨어요?”
그렇게 한참을 눈물을 닦던 안현은 억지로 목소리를 가라앉힌 티가 역력한, 쉰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의외로 순순히 몸을 일으켜 임한나를 마주했다.
사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입맛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안현은 최소한 클랜원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는 주고 싶지 않았다. 얼마 전 자신처럼 똑같이 음식 그릇을 가져온 임한나에게, 괴성을 지르며 난리를 치는 이유정을 우연히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안현은 이유정의 심정을 이해는 하면서도, 저렇게까지는 하지 말자고 다짐한 상태였다. 말마따나 임한나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으니까.
안현은 천천히 눈을 들어 임한나의 상냥한 눈빛과 마주하고는 꾸벅 머리를 숙였다.
“누나…. 감사합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먹어. 오히려 이렇게나마 먹어주니까 내가 다 감사하다 얘.”
그 말이 무슨 뜻이 알 것 같아, 안현은 속으로나마 쓰게 웃었다. 쟁반에는 안현의 쇠약해진 몸을 배려한 부드러운 수프 같은 것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힘겹게 수저를 들었으나 안현이 먹는 속도는 느릿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는다는 듯이. 하기야 입맛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서도.
그렇게 당장에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며 억지로 꾸역꾸역 넘기고 있을 즈음.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냐고오오!”
갑자기 천막 바깥에서 들려오는 고성이 안현과 임한나의 귓전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두 남녀의 낯빛이 교차했다. 안현은 의아한 기색을 비췄고, 임한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드디어 올게 왔구나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다녀왔다며! 계약서만 있으면 알 수 있을 거라며! 그런데…!”
이윽고 한 번 더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안현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임한나의 손길에 제지 당하고 말았다.
“안 돼. 가려면 다 먹고 나가.”
나직이 뇌까린 임한나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안현을 직시했다.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죽어 있던 안현의 두 눈이 갑작스레 빛을 발했다. 그리고 깨작거리던 수프를 그릇째 들어 입안에 붓고는, 후닥닥 장막을 젖히고 천막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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