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83
00682 왕의 귀환. =========================================================================
등활 지옥 하늘에 해일처럼 흐르던 마력은,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속력이 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반으로 갈라졌던 하늘이 도로 닫히고, 중앙에 생성된 검은 공간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차원을 잇는 구멍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어마어마한 마력을 아우르던 하늘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삽시간에 본래의 빛을 되찾았다.
그제야 처음부터 끝까지 하늘을 바라보던 베히모스의 고개가 떨어졌다. 동시에 붉은빛을 번쩍이던 투구 내 안광도 한순간 꺼져버렸다.
“결국 가버렸네요.”
“음.”
베히모스의 음성은 약간 아쉽다는 어조가 깔려있었으나 대답한 목소리는 의연하기 그지없었다. 힐끔 시선을 돌린 베히모스는 아직도 오연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헨나를 보고서 투구를 긁적였다.
“…괜찮으십니까?”
“음?”
“상당히 그리워하시는 것 같아서요. 벌써부터 말이죠.”
“후후. 그리 보이느냐?”
게헨나는 확실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받아넘기고 미미한 미소를 머금을 뿐. 그러자 피리 부는 소리를 흘린 베히모스가 한 번 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대공. 혹시 부왕과 다투기라도 하셨습니까?”
“응? 다투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더냐.”
“아 그렇잖습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깨를 볶으시다가 오늘 갑자기 서로 외면하시는데…. 부부 싸움이라면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하여간 네 헛소리는 여전히 수준급이구나.”
게헨나는 베히모스의 말을 헛소리라 일축했다. 그리고 빙글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이 유난히 외로워 보여서였을까. 베히모스는 곧바로 따라 나서려 했지만 이내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성큼성큼 거리를 벌리는 게헨나에게서 따라오지 말라는 무언의 의사를 느꼈기 때문이다.
‘부부 싸움이라. 꽤나 재미있는 표현이구나.’
게헨나는 어딘가로 걸어가면서도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한 차원의 지배자로서 수천 년을 고독하게 지내온 게헨나로서는 그 말이 그렇게나 신선하고 생경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번쯤 시도해 보고픈 생각도 있었다. 물론 이제는 희망 사항에 불과할 뿐이지만.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게헨나의 정처 없던 발걸음이 우뚝 멈춘 곳은, 다름 아닌 김수현과 관계를 맺은 장소였다.
그랬다. 게헨나는 지금 발길 가는 데로 떠도는 게 아닌 명확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게헨나가 걸어온 동선은 김수현와 둘이서 거닐었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걷고 있었다.
김수현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무언가 회상이라도 하는 걸까. 지면을 내려다보는 진홍빛 눈동자가 잠시나마 아련하게 젖어 들었다.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게헨나의 눈동자는 분명 애틋한 감정을 빛내고 있었다.
이제는 휑하기만 한 땅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게헨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또다시 걸음을 멈출 때는, 처음 그랬듯이 어딘가를 하염없이 응시했다. 가끔 지그시 눈을 감고 잔잔한 미소를 짓는 것이, 어찌 보면 쓸쓸해 보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행복해 보이기도 했다.
걸음은 등활 지옥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한 구간에서 있었던 모든 추억을 회상하고 나면, 게헨나는 구간을 내려가 그곳에서 있었던 추억까지도 하나하나 모조리 되새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등활, 흑승, 중합, 규환, 대 규환, 초열을 내려간 후, 대 초열의 야장을 걸었다. 어느 구간에서는 김수현이 자장가를 불러주는 달콤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또 어느 구간에서는 침략한 악마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일곱 밤을 보내는 동안 각 구간에 쌓인 추억은 적지 않으나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었다. 걸음은 단 한 곳도 빼놓지 않고 모든 추억의 길을 되짚었다.
이윽고 최하층인 무간 지옥까지 내려갔을 때, 게헨나의 발이 마지막으로 멈춘 곳은 바로 어탑이 있는 장소였다. 이제는 더 돌아보고 싶어도 돌아볼 곳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탑을 바라보는 게헨나의 낯에 조금이지만 쓸쓸한 기색이 서렸다.
“…….”
한참 동안 망연한 눈으로 응시하던 게헨나가 어탑으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아 앉으려는 찰나, 갑자기 멈칫 행동을 정지했다. 그리고 자신의 배를 지그시 내려다본 순간, 돌연 절반쯤 올라갔던 다리가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얌전히 어탑에 걸터앉은 게헨나는 허공에 노출된 복부를 살며시 감싸 안았다. 흡사 무척 소중한걸 다루기라도 하듯 정성스레 어루만진다.
게헨나의 얼굴은 여전했다. 알 듯 말 듯한, 차마 말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여러 감정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었다. 허나 배를 쓰다듬는 게헨나를 보고 있다면 최소한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바로 더 이상 외로워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
‘비록 마지막 말은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게헨나는 괜찮았다. 떠나기 직전까지 김수현이 짓고 있던 표정은, 김수현이 하고자 하던 말이, 게헨나가 듣고자 하던 말이 모두 드러나 있었으니까. 굳이 직접 듣지 않아도 게헨나는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게헨나는 상념에 잠기려는지 어탑에 고개를 기대고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여전히 배를 부드러이 매만지며 살짝 입을 열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일전에 중합 지옥에서 김수현이 들려준 자장가였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아름다우면서 아늑한 미성.
“잘도 잔다…. 우리 아가….”
살며시 허공으로 녹아 들어간 목소리는 따뜻한 바람을 따라 여운처럼 퍼져나갔다.
그 자장가에 반응한 걸까.
무간의 하늘을 수놓은 붉은 빛무리가 춤추듯 너울너울 움직였다.
*
차원 이동.
직접적으로 차원을 이동하는 경험은 이번이 네 번째였다. 1회 차에 오며 가며 두 번, 2회 차에도 똑같이 두 번. 그러나 2회 차, 즉 현재 느끼는 차원 이동의 감각은 1회 차와 비교해보면 판이하게 다르다. 지옥으로 갈 때는 기절한 상태였으니 몰랐다손 쳐도, 지금은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훨씬 안정된 기분이랄까. 1회 차에서 돌아갈 때는 정신 없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만 느꼈는데,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물론 고막이 터뜨릴 듯 울리는 웅웅거리는 소음과 울렁거리는 속은 여전했지만, 흡사 플룸 라이드(Flume Ride)를 탄 것처럼 내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김한별은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 시선을 돌리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몸이 이동하는 속도는 점차 가속이 붙고 있어 이제는 시야가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조금 걱정은 됐지만 게헨나가 실수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어서 이동이 끝나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공간에 삼켜지기 직전, 끝까지 나를 바라보던 게헨나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눈을 감고 있음에도 무언가 환해진다는 기분을 받은 동시에 갑자기 몸이 세게 튕기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쿵!
“악!”
어딘가로 세게 부딪치는 감촉에 이어 여인의 새된 비명이 귓전을 때렸다.
그래도 비명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눈을 뜨자 처음 시야에 들어온 건 짙은 어둠이 스며든 거친 흙 대지였다. 찰나의 순간 시야가 좌우로 나뉘기는 했으나 곧 정상으로 겹쳐졌다. 이마가 상당히 어지럽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참을만한 정도였다. 그냥 부딪쳤을 뿐이라 예상외의 타격도 없다. 몸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 나는 손으로 지면을 짚고 조심스레 일어섰다.
인근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저 망망대해와 같은 황무지만 눈에 들어올 뿐,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견 보기로는 어디로 왔는지 당최 가늠할 수 없을 정도. 이내 이마를 짚어 아직도 맴도는 남은 현기증을 가라앉히자 그나마 상황이 하나 둘 정확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야…. 아파라….”
우선은 김한별. 가까이서 지면에 납작 엎드려 있는 걸 보니 역시나 무사히 돌아온 듯싶다. 낙하 때 상당히 세게 부딪쳤는지 얼굴을 한껏 찡그린 채 코를 문지르고 있다. 바로 옆으로는 큼지막한 자루 하나가 널브러져 있었다. 지옥에서 가져온 여러 물건들로, 차원 이동을 거치면서도 용케 가져온 모양이다.
“아.”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근처에 홀로 우뚝 서 있는 거대한 탑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틀란타를 목전에 두고 동부가 발견한 이정표였다. 그러나 이제서 느끼건대 지옥에서 종종 보았던 어탑과 매우 흡사한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잠깐 까먹고 있었을 뿐이지 이미 경험한 일이었다. 우선은 이곳이 어디인지 감을 잡았다는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이건…. 이정표잖아요….”
마침 김한별도 탑을 발견했는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핫.” 토끼 눈을 뜨며 숨을 들이키더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오, 오빠!”
“응?”
“여, 여기 거기잖아요.”
“응.”
“돌아왔어요? 우리 정말로 돌아온 거예요?”
“맞아. 돌아왔어.”
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여 긍정했다. 이정표, 아니 탑…. 젠장.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이걸 발견했을 때부터 나는 우리가 서 있는 장소가 아틀란타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 어색한 걸까. 김한별은 여전히 고개만 든 채 나를 보고 있었는데, 매우 복잡하고도 미묘한 빛을 품고 있었다. 보아하니 지금 느끼는 놀라움과 기쁨을 어떻게든 표출하고 싶은데, 나를 보고 있으니 그런 기분이 가라앉는 모양이다.
…조금 놀라는 척이라도 보였어야 했나?
“…정말로 돌아온 거 맞아요?”
이어진 물음에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응! 맞아! 드디어 우리가 돌아온 거야 한별아! 예에에에!’ 라고 오버하는 것 보다는, 그냥 담담하게 구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금 늦은 감도 없잖아 있거니와 김한별이라면 오히려 더욱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붙잡아 일으켜주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뗀 찰나였다.
“아직도…. 그 여자를 생각하시는 거예요?”
걸음을 내디디는 동시 들려온 음성에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 여자.
게헨나.
그러고 보니 게헨나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시선을 돌리자 탑이 반사하는 달빛의 반사광이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홀로 오연히 솟은 탑을 보고 있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게헨나도 지금 나처럼 자리를 떠나지 않고 탑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그러면서 나와 함께한 추억을 되새기는 중이겠지. 추측에 불과하지만 내가 아는 게헨나라면 왠지 그럴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고작 일곱 밤밖에 같이 지내지 않았으면서….”
그렇게 한참 탑을 응시하자 돌연 조심스런, 그러나 투덜거림이 분명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나는 짧게 숨을 흘리고서 김한별을 보며 손짓했다.
“아무튼 그만 일어나. 설마 밤 내내 그러고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네에. 안 그래도 일어날 생각이었거든요.”
김한별은 볼멘 목소리로 말하고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풀썩!
“아?”
“흠?”
나와 김한별의 탄성이 겹쳤다. 기껏 상반신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갑작스레 몸이 허물어졌다. 실수라고 보기에는 팔이 너무 자연스럽게 내려앉았다.
“왜, 왜 이러지?”
김한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지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로 재차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다. 두 번 세 번 일어나려 할 때마다, 김한별은 고작 상반신만 일으켰다가 도로 엎어지기 일쑤였다.
“너 갑자기 왜 그래?”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멈췄던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그때였다.
꼬르륵.
돌연히 어디선가 배 끓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니! 이건…!”
소리의 주범은 굉장히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꼬르륵!
그러나 소리는 보기 좋게 주인을 배반했다. 그렇게 배신당한 김한별의 얼굴은 참으로 볼만했다.
“많이 배고팠나 보구나. 하기야 그럴 만도…?”
어쨌든 앞으로 놀리는데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마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아.’
갑작스럽게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빛살처럼 뇌리를 스쳤다. 배고프냐고 말하려는 찰나, 느닷없이 1회 차에서 겪었던 경험이 떠오른 것이다.
그 기억은 내게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절대로 안전한 상황이 아니라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위험하다.
문득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저는 이제 자…. 지는 못하고. 곧 나가봐야 할 것 같네요. 약속이 있어서요.
어제 저도 모르게 홀라당 자버리는 바람에…. ^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