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88
00687 왕의 귀환. =========================================================================
클랜원 더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결국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나를 물샐틈없이 파묻은 이들은 정말로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조금은 진정된 듯했다. 물론 일부는 여전했지만.
간신히 더미에서 벗어나 탁자 의자에 앉은 이후, 나는 한숨을 흘리며 시선을 내렸다.
“흑…! 으극…. 힉…! 으부….”
이유정이 여관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흐느낌과 딸꾹질을 번갈아 내뱉고 있었다. 그것도 내 다리를 꼭 부여잡은 채. 그 모습이 하도 가련해 보여 옅은 핏빛이 흐르는 머리카락을 부드러이 쓸어주었다.
“유정아.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뚝 그쳐.”
그러나 아담한 어깨는 경련을 멈추지 않았다. 또 한바탕 눈물을 쏟으려는 듯 눈을 찡그리듯이 감더니 “으부우욱.”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이어서 내 다리를 더욱 옥죄어오기까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동안 유정양은 정말로 장난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니 클랜 로드가 이해하셔야지요.”
신재룡이 누군가를 깔아 엎은 채로 흐뭇하게 말했다. 나는 쓰게 웃고서 한쪽으로 턱을 젖혔다.
“거기도 적당히 하세요. 환영해주는 마음은 고마운데, 그러다 애 죽겠습니다.”
그러자 신재룡은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하하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내 같이 깔아 엎고 있던 클랜원도 하나하나 일어서자, 비로소 누군가가 모습을 보였다. 맨 아래 바닥에는 힘없이 짜부라진 김한별이 있었다. 아침에 기껏 몸을 단정하게 정리했는데 삽시간에 산발이 돼버렸다. 아마 지금 내 꼴도 저렇겠지.
잠시 후 글썽글썽한 눈으로 일어나는 김한별을 확인하고 나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클랜원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일어나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런 클랜원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한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째, 이제 조금 진정되셨습니까?”
그러나 아직 진정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클랜원들.
나는 당황하여 얼른 말을 이었다.
“아마 궁금한 것들이 무척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검은 구멍으로 들어간 이후 어떻게 됐는지, 또 어떻게 돌아왔는지 등등이요.”
이번에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인다.
“그건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없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될 수 있으면 자세히 듣고 싶으니까요. 우선은 저와 한별이가 검은 구멍으로 사라진 이후, 며칠이나 지났는지 아시는 분 있습니까?”
“3주하고도 조금 더 지났어요.”
내 물음에 정하연이 곧바로 말해주었다.
‘3주라…. 애매한 시간이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두어 번 박수를 쳐 시선을 집중시켰다.
“좋습니다. 그럼 저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죠. 아무데라도 좋으니 우선 모두 자리에 앉아주세요.”
이번에는 조금 멍해 보이는 빛으로 서로를 번갈아 쳐다본 클랜원은, 곧 한 명 한 명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유정은 어느새 조용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내 다리를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딱히 억지로 끌어 앉힐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사실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클랜원이 모두 자리에 착석했다. 나는 옆에 앉은 김한별을 한 번 쳐다봤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우선….”
*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설명은 상당히 길었다. 이야기가 거의 끝맺어 갈 즈음에는 어느새 해가 중천으로 떠올라 있었으니까. 아마 그만큼 서로 쌓인 말이 많다는 방증이리라.
이야기가 길어지는 동안 클랜원은 꽤나 각양각색의 모습을 보였다. 대다수가 당혹스럽다는 반응이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한 게 클랜원은 아직도 게헨나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냥 적이 아니라 불구대천의 원수로 이를 가는 클랜원까지 있을 지경이었다.
그런 클랜원들 앞에서. 특히나 고연주와 여인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 나는 도저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잖은가. ‘말을 들어보니 제가 설레발 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화해하고, 섹스 했어요. 그뿐인 줄 아나요? 무려 임신까지 시켰다고요.’ 라고 곧이곧대로 말하면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까?
결국에는 상당한 부분을 삭제하거나 각색한 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차원을 이동하고 나서도 내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기절해있었다는 점과, 게헨나가 거의 죽음 직전까지 이른 나를 구했다는 점을 어필했다. 그리고 그 차원에서는 도저히 게헨나를 상대할 수 없었으며 서로 모종의 거래를 통해 돌아올 수 있었다는 말로 이야기를 이끌었다.
물론 그 거래라는 말에 여러 의문을 제기한 클랜원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게헨나가 화정의 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말인즉 고작 인간 주제에 자신을 맞상대할 수 있었던 근원에 호기심을 품어, 이에 관한 모종의 연구 및 활용을 허락했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러면 거래는 물론, 게헨나가 나를 구한 목적이나 지옥에 오래 있었던 이유도 같이 설명할 수 있으니까.(사실 중간중간 김한별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항….’ 이라는 말을 중얼거려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지옥에 의도치 않은 도움을 주게 되었고, 그에 관한 보답으로 돌아오는 건 물론, 소정의 보답까지 받았다고 이야기를 끝마쳤다. 이후 김한별을 시켜 보따리를 풀어주기까지 하니 클랜원은 어느 정도 수긍한 빛을 보였다.
그 다음으로는, 내가 이야기를 들을 차례였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달라고 하자 애들이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아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또 자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소연을 하고 싶은 듯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서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보면 내가 없는 동안 홀 플레인, 즉 아틀란타를 둘러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듣고 싶었다.
환영해주는 건 고마우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언제까지고 이런 기분에 젖어 살 수는 없으니까. 다행히 고연주와 정하연이 내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정리해보면 현재 아틀란타를 둘러싼 각 원정대의 상황은 꽤나 애매한 듯했다.
예상대로 원정대는 도시를 발견하고 나서 곧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도시 내에서 어느 정도 거주할 수 있도록 기본적으로 치우는 작업을 실시했다고 하는데, 그 청소가 여태껏 계속해서 이어지는 중이라고 한다. 3주가 넘는 시간 동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절대로 말이 안 되는 경우였다. 힘든 공략도 끝났겠다. 어느 사용자든 최대한 빠르게 주변 상황을 정리하고 활동하고 싶다는 보상 심리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기본적인 청소 작업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다? 결국에는 어딘가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였다.
그 문제가 무얼까.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예전 북 대륙은 동부와 남부가 2강을, 북부는 1중을, 서부는 1약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강철 산맥 공략이 끝난 후 힘의 판도가 변했다. 아틀란타를 목전에 두고서 게헨나의 소환 의식으로 인해 동부가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이다. 동부 총 사령관이던 조성호는 물론, 주요 클랜을 비롯해 거의 20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나왔다고 한다.(이 부분에서 나는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1회 차 게헨나가 소환될 때, 제물로 사망한 사용자가 약 1800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동부가 10강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2강으로 불릴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두터운 사용자층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총 사령관을 비롯해 주력의 절반을 잃은 결과, 하루 아침에 1중 이하로 추락해버렸다. 마지막에 욕심을 부리다가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꼴이다. 그뿐일까. 이번 공략의 첫 시작부터 해온 짓이 있어 이미 서부, 남부, 북부에 한참이나 밉보인 상황.
결국, 동부가 현재 처한 상황을 헤쳐나가려면 딱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 방법이란, 이번에 새로 발견한 아틀란타에서 어떻게든 자리 하나를 차지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모종의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보면 아틀란타의 구조와 관련 있는 문제가.
“…대충 그렇게 된 거군요.”
거기까지 듣고 나서 나는 길고 긴 한숨을 흘렸다. 조금 더 듣고 싶은 이야기는 있었으나 여기까지만 해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서히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사흘 후에 3차 이스탄텔 로우 로드의 주관으로 회담이 개최해요. 참석 요청이 들어와서, 우선 그러겠다고 말은 해놨어요.”
그러한 찰나 고연주가 잊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3차? 회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반문하자 고연주가 씁쓸하게 웃었다.
“네. 1차, 2차와 비교하면 훨씬 대대적으로 개최되는 회담이에요. 아마 이번 회담으로 현재 아틀란타 내 어지러운 상황을 완벽하게 정리할 듯싶어요. 그래서 사용자들도 많은 기대를 하고 있고요.”
“완벽한 정리라…. 한소영의 주관으로…. 이스탄텔 로우 로드의 위치가 굉장히 높아졌나 봅니다?”
“최고죠. 결과적으로 이번 공략에서 피해를 가장 적게 받았지만, 가장 성공적으로 공략했다는 명분도 챙겼으니까요. 거기다 동부까지 그 지경이 됐으니, 완전한 상승 가도를 달릴 수밖에 없지요.”
“…흠.”
고연주의 어조에는 어딘가 모르게 자조 어린 기색이 깔려 있었다. 듣고 있는 클랜원도 조금은 가라앉은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말을 듣는 내내 왠지 모르게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딱히 콕 집어 말하지 않아도 현재 머셔너리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물론 내부적인 요인이 가장 크겠으나 외부적인 요인이 없으리라고는 장담할 수도 없다. 말인즉, 악의적인 목적을 가진 누군가가 일종의 ‘흔들기.’ 를 조장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그제야 허준영의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는 말과 ‘꼴도 보기 싫은 애새끼들이 있어서.’ 라는 말이 조금이나마 와 닿았다. 외부적으로 돌아가는 상황도 좋지 않은데, 내부는 단합은커녕 분열만 일어나니 정말로 갑갑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클랜원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략 때 가장 지대한 공헌을 세워놓고도 오히려 침체기를 보내야 했으니까. 고작 3주라고는 해도, 공략 직후이니만큼 우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예측이 맞는다면, 누가 그랬을지는 대충 짐작은 가는데…. 아무튼 적당한 시기에 돌아왔군. 다행이야.’
그렇게 생각하고서 있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 양손을 깍지 껴 하늘 높이 쭉 들어올리자 시원한 감각이 전신을 엄습한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금 더 들어야 할 이야기는 있을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얘기 잘 들었어요.”
“수현. 그럼….”
“예. 그럼 우선 식사부터 하죠.”
“…네?”
밥 먹자는 말에 정하연이 떠름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살살 배를 쓰다듬었다.
“어느새 아침이 훨씬 지났는데요. 다들 밥 생각이 없나요?”
“그렇기는 한데…. 앞으로 어떻게….”
“앞으로? 아. 회담이요? 사흘 후라면서요?”
“네, 네.”
“그럼 무슨 문제라도? 저는 사흘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
나는 일부러 ‘저는’ 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
그러자 망연해 보이던 정하연의 낯에 묘한 빛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단 정하연뿐만이 아닌, 모든 클랜원이 무언가 야릇한 눈길로 나를 응시한다. 조금 이상한 눈초리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분명한 건, 별로 기분 나쁜 시선은 아니라는 것.
“그동안 다들 수고했습니다.”
아무튼 지금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
사실 클랜원이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는 알 것 같았으나, 나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굳이 말로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차후 행동으로 클랜원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줄 것이다.
그래. 내가 돌아온 이상 머셔너리의 침체기는 끝났다. 이 아틀란타에서 우리는 모니카에서 보였던 비상을 다시 한 번….
‘아니.’
그 이상의 날갯짓을 펼쳐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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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귀환은 아직입니다.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