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92
00691 3차 회담. =========================================================================
“머셔너리는 클랜원 전원이 자유 용병이라는 신분을 갖고 있지요. 즉 엄밀히 말해서 북 대륙 소속이라 볼 수 없습니다. 애초 이번 공략도 용병 자격으로 참가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요?”
“예?”
“그게 어떻느냐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용병입니다. 용병 자격으로 참가해 그 어느 클랜보다 활약했다고 자부합니다. 다행히 공략은 성공으로 끝났고, 의뢰를 완료했으니 이제 보수를 받아야지요. 그러한 개념에서 대표 클랜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건데. 여기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또 한 명의 사내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아직도 일어서는 사용자는 있었다. 이번이 몇 명째이던가? 6명째였나?
“잠시만요. 머셔너리 로드는 자꾸 자 클랜의 공을 언급하시는데요. 확실히 앞장서신 건 맞으나 엄밀히 말하면 남부 원정대 전체의 공적으로 봐야 합니다. 그건 따로 볼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아 그러십니까? 그러면 저도 물어보죠. 이번 강철 산맥 공략에서 동부 원정대는 뭘 하셨습니까?”
“그, 그건…. 에…. 우선 1 지역 공략을 성공하고 요새를 건설함으로써…. 후발 원정대의 안정적인 진입로 확보에….”
“말씀하신 사항은 모든 원정대의 공통 사항 아닙니까?”
어이없는 기분에 말하자 사내는 떨떠름히 머리를 갸웃했다.
“그, 그런가? 아아. 생각해보니 그렇겠네요. 아니 그렇네요. …아! 또한 아틀란타 진입 후 전 원정대를 선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도시를 목전에 두고 누구도 예상 못한 사고를 당했지요. 정말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머셔너리 로드께서는 이 점을 감안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하. 그런데 혹시 이건 아시는지요. 정확히 말씀 드리면 도시를 발견하기 전날까지 선도 원정대는 남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서북부 원정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고, 그 일을 빌미 삼아 동부 원정대가 선두로 가게 된 겁니다. 모든 총 사령관이 모인 자리에서 고려 로드가 직접 요청했지요. 스스로, 가겠다고요.”
나는 스스로라는 말을 강조했다. 말인즉 너희가 선택한 결정인데 누구를 원망하냐는 소리였다. 실제로 방금 말은 할 말이 없어 징징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내 또한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측은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나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안 돼. 봐줄 생각 없어. 돌아가.
사내는 한동안 서 있었지만 결국 애꿎은 눈동자만 빙그르르 돌리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번이 정확히 6명째인데 더는 내세울 카드는 없는 듯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보아하니 동부는 이번 회담을 대비해 상당히 공을 들인 것 같은데, 내가 하나하나 모조리 받아쳐 버리니 말문이 막혔을 터. 할 말이 없으니 말은 못하는데 나를 바라보는 표정 하나만큼은 참으로 볼만하다.
“…이번에는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때. 소리 없이 아우성만 치던 동부 인사 속에서 한 사용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현명한 눈동자를 가진 말쑥한 사내를 바라본 순간 조금이지만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조용히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하는 청년은 바로 한(韓) 로드 성현민이었다.
‘전에 듣기로는 조성호와의 싸움에서 밀려났다고 들었는데….’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고려 로드가 사망한 이후 동부는 서로 은근한 눈치 싸움을 벌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뻔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조성호가 칼같이 나서 주변 상황을 깡그리 정리했는데, 그 중에 성현민의 한 클랜도 포함돼있었다.
허나 어쨌든 성현민은 정리 과정에서 살아남았다. 물론 그동안 꽤나 중용 받지 못한 건 사실이나, 정적은 무조건 쳐내고 보는 조성호의 성격 아래서 살아남았다는 건 성현민도 어느 정도 수완이 있다는 소리였다.
강철 산맥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기실 이번에 성현민이 살 수 있었던 것도, 원정대의 궂은일을 담당하는 후방 부대에 배치돼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1회 차든 2회 차든, 여러모로 비추어봐도 성현민은 방심할 사용자는 아니었다. 나는 회담 후 처음으로 긴장감을 느끼며 속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성현민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대표 클랜은…. 아니.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성현민도 긴장을 하는 걸까. 잠시 머리를 젓고서 입에 침을 적신다. 그런 성현민의 눈동자는 뜻 모를 비장함을 띠고 있었다.
“사실. 저는 머셔너리 클랜이 도시 선발 과정에 참여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름 기대를 한 사용자입니다. 용병 업무를 맡고 있는 클랜의 특성상 대표 클랜의 역할과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확실히 그랬다. 어디를 조사해달라 누구를 구해달라 등등 이런저런 요구를 하는 사용자들을 생각해보면, 머셔너리는 그동안 수많은 의뢰를 수행하며 경험을 쌓았다. 지금은 푹 찌그러진 여인의 말처럼 경험이 없는 게 아닌 것이다.
“허나.”
여기서 성현민이 말을 반전시켰다.
“머셔너리 로드께서 사라진 이후, 머셔너리 클랜이 보인 행보는 저를 많이 실망시켰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정이기는 합니다만….”
역시나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사실 북 대륙에 있을 때부터 지속해서 머셔너리의 약점으로 대두된 문제였다. 나는 미리 대응할 말을 생각하며 성현민의 말에 집중했다.
“대표 클랜은 모름지기 굳건해야 합니다. 언제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공정하고 냉정하게 도시를 관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현민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까…. 3년 전 전쟁 때를 예로 들 수 있겠네요. 고려 로드 사후, 사용자 조성호는 발 빠르게 주변을 안정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와 비교해보면 머셔너리 클랜은 계속해서 좋지 못한 소문만이 흘러나왔습니다.”
자신을 정리하려고 했던 인물을 띄우는 성현민. 나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 재미를 느끼는 걸까? 어느새 나도 모르게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짓고 있다.
“비록 지금은 머셔너리 로드께서 돌아오셨지만….”
이윽고 말끝을 흐린 성현민은 차분한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만에 하나. 아. 가능성에 불과하니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십시오. 정말 만에 하나 이와 같은 일이 또다시 발생했을 때. 머셔너리 로드는 그때의 머셔너리가 현재와 다를 거라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이어서 들려오는 말에 나는 신중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정곡을 찔린 기분을 느꼈다. 회담에 들어서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것이다. 그 정도로 성현민의 말은 정연했고 또 논리적이었다. 그렇잖은가. 확실히 내가 없는 동안 머셔너리는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아주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고연주가 머셔너리를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 이유는 외부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카운터를 칠 수는 있다. 단, 어느 정도 각오는 해야겠지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선 머셔너리가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왕 말이 나온 거, 저도 그 부분에 관해 할 말이 있는데요.”
“…….”
“확실히 내부에서 흔들림이 있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악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머셔너리를 흔들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 아.”
반문하려던 성현민은 불현듯 입을 벌렸다.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 나는 성현민의 표정을 기억했다. 어쨌든 물은 방금 엎질렀다.
“말인즉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트려, 이번 3차 회담에서 머셔너리가 불리한 상황을 맞이하도록 조장한 세력이….”
“잠시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요!”
그 순간 중년의 사내가 벌떡 일어서며 고함쳤다.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어서…! 그래서. 우리가 그 악의적인 소문의 주동자라는 말이요?”
“저는 아직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요?”
“웃기지 마세요. 이런 상황에서, 누가 들어도 방금 말씀은 우리를 겨냥했다고 들었을 거예요.”
이제는 중년 사내 옆에 앉은 여인까지 일어나며 소리쳤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제 발이 저리겠지.
“도대체 누가 그런 망발을…!”
“그림자 여왕이 알려주더군요.”
“아. 그래서 그림자 여왕의 말이 법인가요? 그분의 말이면 무조건 맞는 거예요? 아니잖아요! 증거 있어요?”
“…….”
아주 쌍으로 돌아가면서 발악을 하는군.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씩씩거리는 두 남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미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자신 있으십니까?”
“뭐, 뭐요? 자신?”
“무얼 믿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시는지 모르겠는데. 백서연 사건을 기억하면 그렇게 당당하실 수가 없을 텐데요?”
“…….”
그러자 중년의 사내와 여인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동부 인사 중 일부도 딱딱한 낯빛을 드러냈다. 아마 다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머셔너리가 그 지독하다는 부랑자를, 그것도 대 간부에 해당하는 사용자의 정신을 박살낸 사건을.
“우, 우리가 응해야 하는 의무라도 있나요?”
여인이 억지로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든 혐의를 벗어나려는 발버둥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악수였다. 회피한다는 건 무언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여태껏 조용하던 장내가 서서히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게 그 방증이었다.
“정신 오염을 걱정하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물약이나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진실의 수정이 있으니까요. 물론 부담은 우리 쪽에서 하지요. 어떻습니까?”
중년 사내는 당혹한 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불현듯 나를 돌아보며 으르렁거렸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어이, 머셔너리 로드.”
“예.”
“대답 잘 하시요. 지금 나를, 아니 우리를 협박하는 거요?”
“협박이요?”
절로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온다. 나는 피식거리며 그렇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예. 맞네요.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허?”
중년 사내는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더니 진득한 조소를 날렸다.
“그 말씀은…. 지금 우리 동부를 상대로 한 번 해보시겠다는 게요?”
그때였다.
“그 말씀은…. 지금 우리 서부를 상대로 한 번 해보시겠다는 겁니까?”
바로 옆에서 살기 띤 음성이 차갑게 흘러나왔다. 형의 목소리였다. 조금 파리하기는 했지만, 아니 그래서 더 무섭다. 한껏 치뜬 채 날카롭게 노려보는 형의 눈동자는 당장에라도 뇌전을 뿜을 듯 번들거리고 있었다. 삽시간에 중년 사내의 낯이 굳었다.
“해, 해밀 로드는 갑자기 왜….”
“그쪽이 내 동생을 겁박하는데. 그럼 가만히 있을 줄 아셨습니까?”
“아, 아니…. 협박은 머셔너리 로드가 먼저….”
“으하하하! 그래! 이제야 조금 재미있네.”
그러나 중년 사내는 이번에도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누군가 우렁차게 웃어 젖히며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계집애처럼 말로만 종알거리길래 따분했는데. 이제 좀 재미있어. 응?”
거구의 사용자가 불길한 기운을 흘리는 창을 붕붕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내 동부를 향해 창을 겨냥하는 사내는 바로 공찬호였다. 이번에 북부 인사로 참여한 모양이다.
“아아. 그렇게 이상하게 쳐다보지는 말라고. 북부는 서부와 동맹이니까. 그리고 저놈한테는 빚진 것도 있고 말이야.”
“어, 어….”
공찬호가 나를 흘끗 바라보더니 이를 씩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자 중년의 사내는 도저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는지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서부에 이어서 북부까지 나섰다. 이제 동부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아연실색한 낯빛을 보이고 있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여태껏 조용히 있던 서부와 북부가 갑자기 나를 지원하고 나섰으니까. 그러나 강철 산맥 공략 도중 두 지역이 동부의 행태에 분노한걸 생각해보면 확실히 납득이 가는 행동이다.
“이렇게 갚을 기회가 왔는데 놓칠 수가 없잖아? 안 그래?”
공찬호 또한 동부의 시선을 느꼈는지 클클 웃어 젖혔다. 장내는 삽시간에 소란에 휩싸였다.
그 순간.
탕.
누군가 가볍게 무언가를 치는 소리와 동시 무대의 모든 사용자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어서 어디선가 서릿발 같은 살기가 가지런하게 흘러나와 장내를 아우른다. 그러자 한껏 일었던 소란도 자연스레 가라앉기 시작했다.
상석에 앉은 한소영이 예의 감정 없는 눈으로 전신에서 엄청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의도적인 살기가 아니다. 절대적인 권위 ‘카리스마’ 에서 나오는, 모두 조용히 하라는 의지. 심지어 나조차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나는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언제 이 정도의…?’
잠시 후.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무대는 물론 장내까지 한소영에 의해 장악됐다. 그 누구도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듯 침 삼키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내 좌우를 가볍게 훑은 한소영이 흘끗 공찬호를 흘겨본다.
“진정하고, 앉으세요. 여기는 이야기하라고 만든 장소지, 싸우라고 만든 장소가 아니니까.”
“…….”
“앉아요.”
“…쩝.”
공찬호는 무언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결국에는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서, 한소영은 나를 보며 무어라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다음으로 시선이 이동한 곳은 동부 인사가 있는 방향이었다.
“이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클랜전은 찬성하는 입장이에요.”
“예?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
누군가 말도 안 된다는 어조로 부르짖었으나 한소영은 완고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3차 회담의 의의는 현 상황의 정리 및 종결에 있으니까요. 이미 충분히 이야기는 나눴다고 봐요.”
“허, 허나!”
“여기까지 왔는데 어느 한쪽에서 인정하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다른 수단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겠죠. 물론 남부는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겠어요.”
“…포기하겠습니다.”
그때였다. 한소영이 이 이상의 이의는 받지 않겠다는 어조로 말한 찰나, 한 청년이 힘없는 음성으로 포기를 선언했다. 성현민이 한 손을 들어올린 채 쓰게 웃고 있었다.
“동부에서 포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급된 문제는 머셔너리 로드와 따로 해결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소란을 일으킨 점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한 번 더 말하는 성현민을 보며 나는 조금 아쉬운 한숨을 흘렸다. 이번 기회로 동부를 박살낼 기반을 마련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감을 인지한 걸까. 성현민이 재빠르게 포기를 선언했다. 과감하다면 과감한 결정이었다.
이윽고 한소영이 나를 바라봐 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
“자, 잠시만…!”
그렇게 놀란 토끼 눈을 뜨고 있는 동부에서 무어라 말이 나오기 직전.
“그럼,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났네요.”
흡사 회담의 종결을 알리듯 한소영의 음성이 무대를 고요하게 울렸다.
3차 회담이 끝난 것이다.
*
이스탄텔 로우 클랜.
임시 거주 여관.
“하여간 그 사내. 정말 대단해요.”
무에 그리 좋은지 박다연이 헤죽헤죽 웃으며 종알거렸다.
“이 지겹게 끌어온 3차 회담을 한방에 끝내다니…. 안 그래요 언니?”
“…….”
“그리고 아까 동부 그 개새끼들이 좆 지랄하는 거, 하나하나 받아 치는 거 보셨어요?”
“…….”
한 방에 둘만 있어서 그런 걸까. 박다연의 입담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의자에 앉아 책상에 있는 기록을 보는 한소영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그러자 박다연이 종종 걸음으로 달려가 한소영에게 매달렸다.
“특히 특히, 차갑게 냉소할 때. 그때가 진짜 대~박. 저 김수현이 동부 대놓고 비웃는 거 보고 진짜 아랫도리에서 부왘 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아이고. 생각만해도 속 시원하당.”
이번에는 한소영도 어쩔 수 없었는지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부왘?”
“아. 흥분해서 질질 싸는 줄 알았다고요.”
“…상스러운 말이네.”
“에헤이. 둘만 있는데 어때서.”
한소영을 팔꿈치로 살짝 건드린 박다연은 곧 콧노래를 부르며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소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다시 기록에 집중했다.
“아. 그러고 보니 기분은 어때요?”
그러다 어느 순간 박다연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장난스레 말했다. 한소영은 무시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데이트를 거절당한 기분은? 자. 한 마디 말씀해주시죠.”
박다연이 흡사 마이크라도 잡은 듯 손을 들이댔으나 한소영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호. 이렇게 나오시겠다?’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박다연의 낯빛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마치 한소영을 흉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윽고 방안을 우아하게 살랑살랑 거닐던 박다연은 양손을 꼭 맞잡으며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셔너리 로드. 우리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다음으로, 박다연은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어서요.”
이번에는 차갑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지 마시고 시간을 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디 계신지 알려주시면, 제가 약속이 끝나고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왔다가 갔다가. 두 목소리를 번갈아 흉내 내며 포즈를 잡는 박다연의 모습은 흡사 연극을 보는 듯했다.
“아이이잉~. 머셔너리 로드으응~. 너무 차가워용~. 오홍홍홍~!”
이윽고 박다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과장하여 웃을 즈음.
“적당히 해.”
결국 참지 못한 한소영이 한 마디 던졌다. 박다연이 깜짝 놀란 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응? 나 혼자 놀고 있는데. 왜요?”
“애초 데이트 신청한 적도 없고. 그렇게 애교 떨면서 방정맞게 말하지도 않았어.”
“에헤. 어쨌든 거절당한 건 사실이잖아요?”
“박다연!”
한소영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박다연은 아기 새처럼 어깨를 움츠리더니 종종 걸음으로 창문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먼산을 보기 시작했다. 한소영은 깊은 한숨을 흘린 후 기록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런데 언니. 아까 그 사내…. 정말로 머셔너리 로드가 맞아요?”
종아리를 건들거리며 밖을 바라보던 박다연이 돌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마도.”
한소영은 담담히 대꾸했다.
“아마도? 그럼 혹시 저번처럼….”
박다연이 퍼뜩 시선을 돌렸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서 따로 보자고 한 거고.”
“초감각은 어떤데요?”
“우선은 진실. 그런데 저번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맹신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렇기는 하네요. 설마 언니의 초감각마저 속이는 사칭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박다연은 짐짓 심각한 어투로 말하고는 다시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봤는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한동안 창밖을 응시했다.
잠시 후 박다연이 여전히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만히 있는 거예요?”
“……?”
“예전에요. 처음 머셔너리 로드가 나타났을 때. 그리고 사칭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
“나가.”
“아 왜요. 그때 언니 머셔너리 로드 보고….”
“나가, 나가, 나가, 나가!”
한소영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갈게요, 나갈게요!” 황급히 외친 박다연이 재빠르게 문으로 달렸다. 그러나 문을 나서기 직전 기어코 한 마디 입을 열었다.
“아. 참고로 머셔너리 로드 왔어요.”
한순간 한소영의 몸이 멈칫했다. 초감각이 박다연의 말이 진실이라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사실은 10분 전에 봤어요. 이상하게 바로 들어오지 않고 여관 인근에 앉아 있기만 하더라고요. 혼자서 식사하고 있던데.”
“식사?”
“네. 가서 데려올까요?”
“…아니. 그냥 있어. 알아서 들어오겠지. 그리고 나가.”
한소영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별 관심 없다는 듯 차분히 의자에 앉아 기록을 들었다. 박다연은 눈을 한 번 빙글 돌리더니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탕.
이윽고 문이 닫히는 동시 한소영이 기껏 들었던 기록을 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일어나 창문을 열어 밖을 바라보았다.
박다연의 말대로 여관 인근에는 김수현이 있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손에 커다란 고기 꼬치를 든 채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있다.
“…하.”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은 한소영은 세게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홱 몸을 돌려 책상에 앉고는 놓았던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확히 10분이 지났을 때, 한소영은 다시 슬쩍 창문을 열어 밖을 응시했다. 김수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허나 이번에는 또 어디서 구했는지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스튜를 후룩후룩 먹고 있었다.
“…….”
무언가 분한 걸까. 한소영은 콧김을 세게 내뿜더니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억지로 자리에 앉아 구겨진 기록을 읽기 시작.
20분이 흘렀다.
‘…아직도 안 들어와?’
결국에는 또 한 번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그러나 창밖을 바라본 순간, 한소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20분 전까지만 해도 보이던 김수현이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혹시 그 사이 들어온 건가 싶었지만, 초조함 속에 10분을 기다려도 노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사방을 애타게 둘러보던 한소영의 눈이 불현듯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바라보는 방향에서는 잠깐 모습이 사라졌던 김수현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양손에 아까 먹던 고기 꼬치를 든 채로,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그 순간.
“…진짜!”
한소영은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쾅!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복도를 잇따랐다.
그리고.
“40분. 그래도 꽤 버티셨네.”
복도 한쪽에 몰래 서 있던 박다연이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작품 후기 ============================
저도 몰랐는데 조회수가 3천만이 넘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_(__)_
오늘은 용량을 빵빵하게 넣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