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93
00692 철혈의 여왕 Vs 지옥 대공. =========================================================================
“……?”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어딘가로 끌려온 후였다. 먹음직스럽게 익은 고기 꼬치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있을 때, 갑자기 한소영이 나타난 것까지는 기억한다. 그리고 콧김을 푹 내뿜으며 다짜고짜 팔을 붙잡힌 것까지.
그런데 당황해서 어어 하는 사이 장소가 바뀌었다. 양손에 들고 있던 고기 꼬치도 어느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질질 끌려가는 와중 누군가 은근슬쩍 채간 것 같은데…. 복도 한쪽에 몰래 서 있던 박다연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당최 어떻게 된 일인지.
“배가 많이 고프셨나 보군요.”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자 돌연 힐난하는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성숙한 내음을 물씬 흘리는 여인이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나를 이 장소까지 끌고 온 장본인. 한소영이었다.
“예…. 좀 고팠습니다.”
복잡한 머리를 뒤로하며 사실대로 대답했다. 어차피 한소영 앞에서 거짓말은 통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예의 표정 없는 얼굴이 미약하게 이지러졌다.
“실은 현재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사정상 잦은 식사와 충분한 수면을 필요로 하지요.”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요?”
황급히 덧붙이자 한소영의 목소리가 약간은 누그러졌다. 그리고 대번에 걱정스러운 눈동자로 바뀌어 나를 바라본다. 동경하는 여인의 근심 어린 눈초리는 내게 뜻 모를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럼 같이 식사라도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앞에서 막 먹는 모습을 보여드리기 싫었으니까요.”
“네?”
“아닙니다. 어쨌든 몇 주 정양하면 충분히 나을 수 있는 수준이니 걱정은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별다른 건 없고 그냥 보통의 방 풍경에 불과했다. 상당히 낡기는 했지만, 청소를 잘해놨는지 을씨년스러운 기운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보기에 어딘가 예스러운 데가 없잖아 있었다.
“우선은 앉으세요. 부디.”
얼른 의자 하나를 가져와 앉는 동시, 책상으로 걸어가는 한소영을 흘긋 살폈다. 조금 부드러워지기는 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냥 쌀쌀맞다 여길지 몰라도, 나는 한소영의 미묘한 변화마저도 잡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돌아오고 나서 첫 번째 만남인가? 묘하게 긴장된다.
잠시 후, 한소영이 자리에 앉고서 첫 말문을 열었다.
“사흘 전에 돌아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정확합니다.”
“그리고 저를 한 번쯤은 찾아오실 줄 알았고요. 적어도 한 번은요.”
“…….”
한소영은 시작부터 꽉 찬 돌직구를 날렸다. 적어도 한 번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나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입을 다물었다. 초감각은 꽤나 까다로운 능력이다. 이번에도 몸 핑계를 대기에는 거짓말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일부러 한소영을 찾아가지 않았다.
“서운하셨나요?”
내 표정을 읽은 걸까. 한소영은 망설임 없이 정답을 말했다. 아니. 어쩌면 정답일지도 모르는.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니까 우리 이스탄텔 로우에서 머셔너리 클랜을….”
“여러 가능성을 생각했습니다.”
한소영의 말을 끊으며 들어갔다.
“오늘 회담을 보면서 느꼈습니다. 이 정도로 여러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 이스탄텔 로우가 머셔너리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의무는 없었다. 이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내외적으로 도와줄 수도 있었겠죠. 동맹 클랜이니까요.”
“그 선택은 어쩌면 남부에 악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걸 참작하고서라도.”
무언가 입장이 뒤바뀐 듯한 대화. 나는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한소영이 무얼 원하는지 무얼 이야기하고 싶은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사안으로 무작정 들이대는 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애초 통제하지 못한 머셔너리와 악의적인 소문을 흘린 동부 둘만의 문제였으니까.
그래.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다.
그런데 한소영은 그 이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었다.
“아니면 제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나는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쳐다보는 한소영은 여전히 쌀쌀맞았다. 지금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잠깐 옷 좀 벗어보시겠어요?”
그때였다. 한창 상념에 잠겨 있는 와중 한소영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꺼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옷…. 아니. 소매를 걷어보셔도 좋아요.”
한소영이 말을 정정했다. 나는 순순히 양 소매를 걷어주었다. 어차피 도복이라서 크게 거리낄 것도 없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다른 부분도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요? 피부가 드러나도록.”
연이은 요청에 갸웃하기는 했으나 도복마저 살짝 끌어 내렸다. 한소영은 흡사 관찰하는 듯한 눈으로 그윽이 살펴보더니 이제 됐다는 양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짧은 한숨을 흘렸다.
“듣던 대로 몸에 상처가 많으시네요.”
“예? 듣던 대로…?”
“그림자 여왕이 말해주더군요.”
“고연주가….”
그 순간 한 생각이 뇌리를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저를 사칭한 사용자 때문에 그러십니까?”
한소영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래요. 혹시 들으셨나요?”
“그냥 있었다는 정도로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스탄텔 로우 로드가 알고 계시다는 건….”
“당연하죠. 그 사칭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바로 저였으니까요.”
“예?”
예상치 못한 말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한소영의 앞에서 나로 속여 말했다고? 초감각이라는 그 사기적인 능력 앞에서? 이건 좀 말이 안 되는데.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양손을 깍지 끼며 진중히 물었다. 한소영은 안될 것 없다는 양 차분히 고개를 주억였다.
이윽고 한소영은 고요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야기를 듣고 나서 처음 느낀 기분은 기가 막힌다는 감정이었다.
정리해보면 우선 사칭범은 나와 거의 일치하는 외양을 가졌던 모양이다. 한소영의 말에 따르면 외모는 물론 버릇까지 나라고 생각할만한 모든 특징을 갖췄다고 했다. 그냥 비슷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똑같다는 소리였다.
특히 가장 압권이었던 건 그 사칭범이 기억 상실에 걸린 듯이 행동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그놈이 어떻게 한소영 앞에서 걸리지 않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무언가 기억 나냐고 물어보면 ‘아니요.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왜냐면 그 말 자체는 사실이니까.
그렇게 처음 발견한 이후, 사칭범은 기억 상실이라는 명분 아래 불안하다는 듯이 행동했고 보호해주기를 부탁했다. 한소영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를 돌보면서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성심껏 도와주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의도적인 접근이었을 거로 생각해요. 바로 머셔너리 클랜으로 들어가기는 그렇고, 해밀 로드에게 갔다면 들켰을 가능성이 높고. 그래서 저한테 접근해 머셔너리 로드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습득하려 했을 거라 생각해요.”
“확실히. 아마 형이었다면 반나절도 안 돼서 알아챘을 겁니다.”
“사실 저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이상하다는 기분은 느끼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럴 즈음, 그는 갑자기 머셔너리 클랜으로 가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죠.”
“그래서….”
“네. 저는 사용자들의 시선을 피해 밤중에 몰래 머셔너리 클랜을 찾아갔지요. 그리고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 후, 신병을 인도했어요. …그리고 이틀이 지나기도 전, 그림자 여왕의 연락을 받을 수 있었죠. 사칭이라고.”
“…….”
그러면 고연주는 그놈의 몸에 상처가 없다는 사실로 사칭을 밝혀냈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숨겨서 그렇지, 내 몸에 새겨진 상처 흔적은 상당히 많다. 그런데 그 상처가 갑자기 없어졌다면 확실히 이상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로군.’
처음에는 그냥 어느 병신 같은 놈이 그런 거지라고만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당최 어느 놈인지는 몰라도, 사칭범이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접근했는지 한 번쯤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보였다.
“굉장히 어이가 없으셨겠네요.”
결국,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어이가 없을 뿐인가요?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제가 얼마나 상심하고 또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알기나 하세요?”
그 순간 나는 머리를 번쩍 들었다.
“예? 상심…. 수치스러우셨다고요?”
“그래요. 처음 봤을 때 앞뒤 안 가리고 달려가 품에 안긴 것만 생각하면….”
아아. 안겼다고. 그 정도야 뭐. 수치심을 느꼈다기에 나는 또. 그놈이 저 도톰한 앵두 빛 입술을 빼앗고, 아름답고 풍만한 가슴을 탐하고, 건강하게 살 오른 색기가 뚝뚝 떨어지는 허벅지를 더듬고, 그러다 결국…. 아니 잠깐만.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에. 그렇군요. 안기셨다고….”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잖은가. 한소영이 달려가 안겼다고 한다. 그것도 스스로. 누군지는 몰라도 참 횡재했다. 물론 그때는 나로 알고 있었을 테니 왠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도 드는데….
“…뭘 기대하시는 거죠?”
한소영이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게슴츠레한 시선을 보냈다. 나는 하하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요. 그냥 누군지는 몰라도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하하.”
그러나 그 순간 한소영이 두 눈을 치뜨며 불같이 화냈다.
“웃어요? 지금 웃겨요? 제가 다른 사내한테 안겼다는데도?”
아니 또 왜 이러세요.
“그, 그게 아니라요.”
“그리고 부럽다고요? 왜요. 그럼 제가 또 그때처럼 질질 짜면서 달려가 안기기라도 할까요?”
“…예? 질질…. 짜셨다…?”
“!”
찰나의 순간, 한소영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어서 탕 가볍게 책상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한소영이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화제를 넘기려는 것 같은데 그냥 넘어가 주기로 하자.
“말씀하시죠.”
“그때…. 왜 저를 구하신 거예요?”
“……?”
“제가 알기에는, 그때 같이 끌려 들어간 여인이 머셔너리 클랜원이라고 알고 있어요.”
아아. 게헨나의 채찍에 감겼을 때를 말하는 것 같다.
“예. 그렇죠.”
“왜요?”
“……?”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클랜원을 먼저 구하는 게 맞잖아요. 그런데 왜 저를 먼저 구해주신 거예요?”
음…. 이것 참. 답변하기 난감한 질문이다. 그렇다고 사실을 말할 수도 없고. 거기다 초감각까지 있잖아.
“그냥요.”
결국에는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게 대답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당연히 한소영이 화를 냈다.
…아니. 잠시만. 왜 당연하지? 당연하지 않아. 따지고 보면 나는 구해준 입장이잖아. 그런데 왜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데?
그렇게 생각한 나는 힐끔 앞을 응시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싫어요?”
“…네?”
얼른 말하라는 듯 강렬한 안광을 내뿜던 눈동자가 느닷없이 흔들렸다.
“그래서 싫으냐고요. 제가 구해드린 게 싫으냐 이 말입니다.”
“누, 누가 싫대요? 고마워요. 당연히 감사하죠. 그런데 왜….”
“그럼 그냥 고맙다고 말씀하시면 되잖아요. 왜 따지고 사람을 죄인 취급을 하십니까. 가뜩이나 서럽게.”
“따, 따지고? 죄, 죄인 취급? 하. 어, 어이. 어이가.”
우와. 한소영이 양손을 으쓱 올리고 있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 시선도 좌우를 계속해서 번갈아 보고 있어. 저런 반응 처음 봐.
“아무튼, 또다시 그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저는 똑같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를 구할 겁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에요.”
나는 척 팔짱을 끼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동시 문이 달칵 열렸다. 이윽고 누군가 조심스레 머리를 들이밀었다. 회담 때 한소영의 옆에 앉아 있던 잘생긴 사내였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한데….”
“나가요.”
그러나 한소영은 가차 없었다.
“예, 예?”
“나가라고요. 안 들려요?”
사내는 멍한 낯빛을 보이더니 입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울먹울먹한 얼굴로 스르르 문을 닫았다.
잠시 후.
한소영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슬쩍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으며 한껏 고개를 젖히더니 기다란 한숨을 흘렸다. 그 모습이 마치 ‘도대체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할까.’ 라고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
“도대체…. 당신이라는 사내는…. 어떻게 되먹은 게….”
아니. 진짜로 말했다.
“또다시 똑같이 구하겠다고….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게 더 열 받아….”
계속해서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다. 나는 그저 멀뚱멀뚱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한동안 무어라 중얼중얼 거리던 한소영이 두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기세에 나도 모르게 따라 일어선 찰나, 한소영은 갑자기 문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록.”
뜬금없는 주문 영창과 동시 문이 달칵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긴 것이다.
그러나 한소영의 주문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일런스 필드, 블록 필드, 프로젝트 이미지, 리플렉트 실드, 월 오브 마나, 안티 매직 쉘….”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우웅!
한 번 주문을 말할 때마다 마력이 빠르게 흐르며 배치가 변화한다. 아니. 무슨 방어 요새라도 만들려고 이러시나?
“후. 이 정도면 여태껏 항시 적재적소의 타이밍에 부단한 방해를 해온 제 3자의 불시 개입을 막을 수 있겠지.”
또다시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린 한소영은 나를 흘기듯이 쳐다봤다.
그리고 아주 잠시나마 갈등의 빛이 어리는가 싶더니.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무어라 말하기도 전, 아랫입술을 깨문 한소영이 갑자기 몸을 날렸다. 마치 그대로 내게 안기기라도 하려는 듯이. 어찌나 세게 들어오는지 가지런하던 머리카락이 크게 나부낄 정도였다.
그렇게 서로의 거리가 삽시간에 가까워진 찰나, 품에 넣어놨던 구슬이 미약한 진동을 흘렸다.
우웅!
이어서 게헨나의 보호 요새가 전개됐다.
“정말 보고 싶었…!”
텅!
‘…….’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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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많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