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94
00693 철혈의 여왕 Vs 지옥 대공. =========================================================================
갑자기 벌어진 상황을 인지한 건.
주르륵.
털썩!
양팔을 활짝 벌린 채 달려오던 한소영이 한순간 전개된 붉은 장막에 가로막혀 주저앉았을 때였다.
‘헉.’
뒤늦게 아차 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한 번 이러지 않았나?
살그머니 시선을 내리자 망연한 얼굴을 한 한소영이 보였다. 혼란스러운 눈길로 붉은 장막을 보고 있다. 아마 나도 지금 저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급작스럽게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그러나 정적은 잠시.
“머셔너리…. 로드…?”
한 글자 한 글자 끊어서 말하는 흡사 북풍한설을 연상케 하는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을 때. 나는 지금 한가로이 있을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쾅하고 터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 그에 반해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두 눈은 시퍼런 안광을 이글이글 토해내고 있다. 흡사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혹은 열을 터뜨릴 듯한 표정. 한소영은 그 정도로 부끄러움과 분노가 점철된 낯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역지사지로 생각해보자. 방금 상황은 나라도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울 것이다.
우웅!
이윽고 구슬이 청명한 진동을 울린 순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활화산같이 타오르는 한소영을 보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이스탄텔 로우 로드.”
“…….”
“이해합니다. 아마 많이 민망하시겠죠. 저라도 그럴 겁니다. 허나 저 또한 억울합니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제게 이 사태를 해명할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
필사의 외침이 먹힌 걸까. 부르르 떨고 있던 한소영이 조금은 진정된 모습을 보였다. 무언가 삼키기라도 하는 듯 목울대가 꿀꺽 움직인다. 무언의 허락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얼른 해명할 생각으로 품속에 손을 넣고 여보라는 듯 구슬을 척 들이밀었다.
“얘, 얘가 그랬습니다.”
우, 우웅?!
“얘는 얼마 전에 얻은 성과 중 하나인데요. 일종의 자아를 가진 장비입니다. 그런 만큼 아주 똑똑하죠. 그런데 저를 보호하려는 성향이 너무 강해서 시도 때도 없이 이런 붉은 장막을 펼치고는 합니다.”
“…자아 장비?”
“예, 예. 그렇죠. 실은 얼마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요. 그때도 제게 달려오던 클랜원들이 지금처럼 당했습니다. 아직 어려서 상황 판단을 못합니다. 얘가요.”
“…후.”
말을 하면서 나는 괜히 구슬을 다그쳤다. 구슬은 시무룩이 진동을 흘리고는 스스로 보호 요새를 해제했다. 그러자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서서히 옅어지는 붉은 장막을 보며 한소영의 눈이 신기한 빛을 띠었다.
초감각이라는 능력이 있는 만큼 한소영은 내 말을 진실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들썩거리던 어깨가 사그라지고 번쩍번쩍하던 안광이 정상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그 대신 이번에는 흑수정 같은 눈망울이 그렁그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지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있다.
이윽고 거친 숨소리가 잦아드는 걸 마지막으로 한소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런 사정이 있으셨어요….”
“이해해주시는 겁니까?”
“아니요.”
“…….”
한소영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머셔너리 로드도 말씀하셨지만 저는 현재 굉장히 복잡한 심경이에요. 굳이 되짚지 않아도 지금 무척 부끄럽고 충분히 창피하며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민망해요. 인정하시나요?”
“예, 예. 그렇죠. 인정합니다.”
“허나 머셔너리 로드의 말씀이 거짓말 같지는 않고. 나름 억울하신 부분도 있는 것 같기는 하네요.”
“그럼요. 절대로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제 기분은 대단히 나빠요. 지금도 아무리 노력해도 가라앉혀 지지가 않거든요?”
“…….”
그럼 어쩌라고!
…라고 속으로 외친 찰나 한소영이 살그머니 두 눈을 치떴다.
“그래서 이 모든 상황을 참작해 기회를 한 번 드리겠어요.”
“기회요?”
“네. 지금부터 머셔너리 로드에게 1분이라는 시간을 드리겠어요.”
“1분…?”
의아히 반문하자 한소영이 숨을 크게 들이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1분의 기회. 어떤 짓을 해도 좋아요. 제가 드리는 1분이라는 시간 동안 스스로, 어떻게든 저를 달래서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예, 예?”
“못 들은 척하시는 것도 이제 지겹네요. 아. 카운트는 조금 전부터 시작했어요.”
“자, 잠시만요. 그런 게….”
“57초. 참고로 실패는 물론 남은 시간 동안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으신다면….”
“며, 면…?”
한소영은 무섭도록 나를 노려보며 말을 흐렸다. 나는 미처 항의할 생각도 못 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각오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소영은 입을 꼭 다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아예 주저앉아버렸다. 정말로 내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머릿속에 혼란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방은 고요하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불편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얼마나 지났더라? 몇 초나 남았지?
결국, 빤히 쳐다보는 눈길을 이기지 못해 나는 허둥지둥 한소영을 잡아 일으켰다. 여전히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으나 한소영은 뜻밖에도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죽이다가 어느 순간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한소영이 점차 눈을 가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제 10초도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인지한 찰나, 나도 모르게 한소영을 와락 껴안고 말았다.
“……!”
너무나 갑작스러운 포옹 때문일까. 껴안은 몸에서 미약한 경직 감이 전해졌다. 그러나 한소영은 곧 느릿하게 힘을 빼는가 싶더니 모든 걸 내게 맡기듯 그대로 몸을 기대왔다. 콧속을 물씬 찌르고 들어오는 야릇하면서도 은은한 색향. 이내 목덜미가 간질거리는 동시 느긋한 음성이 속닥속닥 흘러나온다.
“4초. 어떤 짓을 해도 좋다고 했는데…. 그런데 껴안을 거면 조금 더 확실하게 껴안지 그래요? 무슨 고슴도치를 안는 것도 아니고.”
4초라는 말을 들은 순간 괜스레 오소소 소름이 돋아 더욱, 있는 힘껏 한소영을 껴안았다. 그러자 몸에 따뜻하면서도 뭉클한 육체의 감촉이 여실히 전해졌다. 그래. 이제야 내가 한소영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지했다. 경황없는 정신을 여인 특유의 살 내음이 부드러이 감싸 안는다.
“으응.”
이윽고 한소영은 내 등을 마주 안는 것과 동시 천천히 고개를 젖혔다. 살짝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응시한다.
“여기까지 오는 게 참 힘드네요.”
“죄, 죄송….”
“그래도 이번에는 잘했어요. 100% 정답까지는 아니지만, 머셔너리 로드치고는 나쁘지는 않아요.”
“가, 감사….”
사실 뭐가 감사한 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저 황송하다는 기분에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튼, 저도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고…. 오늘 일은 이 정도로 덮어드릴게요.”
“예, 예?”
“눈치를 줘도 알아듣지를 못하시니, 이제는 직접 하나하나 가르치는 수밖에 없겠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앞으로 제가 뭘 말하면 못 알아들은 척하지 마세요. 다시는.”
“…그럴게요.”
순간적으로 가슴이 뜨끔해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한소영은 입을 살짝 끌어올리더니 도로 고개를 기대오며 살며시 눈을 감는다.
“우선은 우리 계속 이대로 있어요. 괜찮죠?”
“예.”
“아. 오른손은 움직여요. 그때 강철 산맥에서 빗질해주신 것처럼 제 머리카락을 감미롭게 쓸어주세요.”
“알겠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씩, 명령조로 이어지는 요구에 나는 착실하게 고분고분 따랐다. 왼손으로 잘록한 허리를 부여잡은 채 오른손으로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한소영은 그제야 만족한 듯한 신음을 흘렸다. 달착지근하게 감겨오는 끈적한 향기에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진다.
잠시 후.
“머셔너리 로드는…. 앞으로 부단히 노력하셔야 할 거예요…. 저를 기쁘게 해주시려면….”
한소영은 앓던 이가 빠진 듯, 무언가 후련해 보이는 표정으로 꿈결처럼 중얼거렸다.
*
3차 회담이 끝나고 나서 아틀란타를 둘러싼 상황은 급박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동부 원정대가 공식적으로 포기 선언을 하고 머셔너리가 새로운 대표 클랜으로 선정됐다는 사실이 커다랗게 작용했다. 그 부분을 제외하면 이미 모든 것들이 정해져 있었던 만큼, 이후 배분을 마무리 짓는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우선 남부 원정대의 이스탄텔 로우 클랜은 동쪽에 있는 도시를 선택했다. 그 지역은 가장 황폐화가 덜 진행된 곳으로 여러 고대 시설이 빼곡하게 모인 도시였다. 네 개의 외 도시 중 그나마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도시였고, 사용자들은 이스탄텔 로우가 그 지역을 차지한 걸 당연하다 여겼다.
서쪽 외 도시는 북부가 맡기로 했다. 북부는 특이하게도 한 클랜이 대표 클랜을 담당하지 않았다. 예전 코란 연합이 한 도시를 관리했던 것처럼, 여러 클랜이 모여 연합을 창설한 형태로 운영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다만 그 연합의 초대 장(將)으로 공찬호가 선정됐다는 사실은 조금 놀라운 일이었다. 비록 얼굴 마담 신세는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북쪽 외 도시는 역시나 서부의 해밀 클랜이 맡았다. 북쪽 도시는 강철 산맥과 가장 밀접한 곳으로 내부적으로 모든 게 어중간한 도시였다. 그러나 해밀 로드 김유현의 ‘차후 강철 산맥을 대상으로 하고 싶은 게 있다.’ 는 강력한 희망으로 서부가 품에 안게 되었다.
결국 남쪽 외 도시는 머셔너리 클랜으로 돌아갔다. 사실상 남쪽 도시는 가장 낙후됐다는 말을 듣는 도시였다. 그나마 있는 거라고는 대규모 콜로세움 하나뿐, 나머지는 대부분이 군사 시설로 이루어져 있었다.
머셔너리가 이 도시를 맡게 되자 사용자들 사이로 이런저런 말이 많이 나왔는데 대다수가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왜냐면 다른 도시가 지역 단위로 맡은 것에 반해 머셔너리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로 생각하면 기회의 땅이 될 수도 있지만, 현실은 언제나 냉정한 법이다.
그러나 정작 남쪽 도시를 맡은 김수현은 별로 개의치 않는 반응을 보였다. 모두의 걱정 어린 시선 속에도 그저 미미한 미소를 지은 채 만족해하는 얼굴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 와중 거리 으슥한 곳에서 김수현의 볼에 입을 맞추는 한소영을 목격했다는 사용자가 나와, 예전 사장됐던 염문설이 떠오르는 동시 이스탄텔 로우의 지원설이 강력하게 대두하는 일도 있었다.
아무튼 김수현이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식으로 도시를 만들어갈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껏 김수현이 걸어온, 이뤄낸 성과를 아는 사용자는 깊은 관심을 갖고 남쪽 도시를 주시했다.
이로써 아틀란타의 상황은 일단락됐다.
새로운 대륙에.
새로운 도시에.
새로운 건물에.
새로운 클랜이 자리 잡았다.
그에 따라, 산하 클랜을 제외한 클랜이나 무소속으로 돌아간 사용자들은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기존의 북 대륙은 더 이상 활동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는 이 아틀란타라는 새로운 무대를 중점으로, 차후 어떤 방향으로든 판이 새롭게 짜이리라는 사실을.
============================ 작품 후기 ============================
0ㅁ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