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99
00698 시작이 늦었다고 앞서나가지 못하는 건 아니다. =========================================================================
리버스 클랜 ‘부랑자 도살자’ 김덕필.
마법의 탑 클랜 ‘타로 카드 마술사’ 선율.
달밤 클랜 ‘인형사’ 나승혜.
한(韓) 클랜 로드 성현민.
이상 동부.
신 코란 연합 대표 박환희.
산하 상인 조합의 서지환.
이상 남부.
이렇게, 동부와 남부가 찾아왔다.
그저 그런 사용자들이 아니다.
전투면 전투. 마법이면 마법. 명성이면 명성. 돈이면 돈.
어느 측면에서 보든 간에 한 명 한 명이 각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말 그대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어디 가서 행세깨나 할 수 있는 거물급 사용자들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물론 왜 찾아왔는지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다.
도시를 복구한다는 건 엄청난 투자와 매우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무리 머셔너리라고 하나, 홀로 감당하는 건 벅찰 수밖에 없다.
결국에는 도시 복구 작업은 여러 클랜이 힘을 합쳐야 하는데, 현재 서부, 남부의 경우는 산하 클랜의 도움을 받고 있고, 북부는 애초 코란을 능가하는 연합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러면 머셔너리는?
없다. 준비된 상황은 좋지 못하고 여태껏 산하 클랜도 두지 않은 입장이다.
어느 정도 머리가 돌아가는 사용자라면 이 정도 상황 파악은 해놨을 터.
허나 그렇다고 딱히 돌파구가 없는 건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는 건, 반대로 그만큼 기회가 널렸다는 소리니까.
산하 클랜이 복구 작업에 참여하면 차후 도시 구역 일부를 약속 받는다. 그리고 해당 구역에서 나오는 수익 중 세금으로 내는 3할을 제외하고 나머지 7할을 가진다.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다.
내 예상으로는 아마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도와달라는 말을 하는 시기를. 특히 우리와 대표 클랜을 경쟁했던 동부라면 더더욱.
그런데, 우리가 오늘 아침 광장에서 빵 터뜨렸다. 안 그래도 성과를 발견했다는 소문을 듣고 몸이 한껏 달아올랐을 텐데, 갑자기 자기들이 아닌 사용자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여하튼 입장은 역전됐다. 동부의 경우 이제 남은 선택지 두 개. 하찮은 자존심으로 끝끝내 버티다 자멸의 길을 걷거나. 아니면 넙죽 굽히고 들어오거나.
이렇게 바로 찾아온 것만 봐도 어느 선택을 했는지는 알겠지마는.
그러나.
이야기를 끝내고 6명이 모여 있다는 장소에 도착한 순간, 나도 모르게 커다란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6명은 성의 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서로 옹기종기 모여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앞으로, 오직 앞서 내려간 고연주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섹시하게 꼰 다리를 까닥까닥 흔들고 있는 게, 흡사 학생을 혼내는 선생님 같은 모습이다. 세상에. 저 6명이 이런 대우를 받을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기야 고연주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굳이 홀 플레인 내 배분(配分)을 따져보면, 현재 그림자 여왕의 서열은 가히 최고 수준이라 봐도 무방하다. 박현우나 조성호도 애처럼 취급하는데, 저 정도의 사용자들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그래서 지금 저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일 테고.
잠시 후.
“어머. 클랜 로드 오셨어요? 여기 앉으세요.”
나를 돌아본 고연주가 나른히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니. 그러면서 왜 자꾸 단검을 빙글빙글 돌립니까. 사람들이 떨떠름해하잖아.
무언가 도움을 구하는 듯한 눈초리가 사방에서 쏟아진다. 나는 고연주가 앉았던 의자에 몸을 앉힌 후 6명을 천천히 훑었다.
“조금 늦었네요. 미안합니다. 요즘 한창 청소 중인데, 의자가 마땅한 게 없어 거의 버렸거든요. 이 점 양해바랍니다.”
“허허. 아, 아닙니다. 갑자기 찾아왔는데요. 미리 연락을 드리지 못한 점, 오히려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로 살살 눈치만 살피는가 싶더니 서지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서지환. 신 코란 연합의 한 축을 담당하는 상인 조합의 클랜 로드. 저번 구 코란 연합을 무너뜨렸을 때 발 빠르게 움직여 살아남았다. 아니. 살려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려나?
“에…. 우선…. 머셔너리 로드의 생환을 진심으로….”
“아. 축하나 환영 인사는 괜찮습니다. 하도 많이 들었더니 딱지가 앉을 지경이라서요.”
서지환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으나 나는 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새롭지 못한 말은 넘어가고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뜻이었다.
한편으로는 경고이기도 했다. 괜히 아는 사이를 들먹여 어줍잖게 인정에 호소하지 말라는. 물론 남부보다는 동부를 향한 경고지만.
문득 서지환 옆에 앉은 박환희가 눈에 밟혔다. 머쓱해 하는 서지환을 보며 서너 번 눈을 깜빡이더니 갑자기 활짝 웃는다. 그러고 보니 얘도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그 순간 박환희가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오랜만이에요. 형님.”
…이놈이?
“누가….”
“요즘 많이 바쁘시죠?”
그렇게 말한 박환희는 돌연 스리슬쩍 옆을 흘겼다. 따라 시선을 돌리자 살짝 놀란 빛을 띠고 있는 동부 인사들이 보였다. 오직 성현민만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누구 멋대로 네 형님이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쑥 내려갔다. 그러니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부를 압박하고 싶다는 건가? 나를 통해서?
‘하기야 지역이 다르니 경쟁 관계라고 볼 수 있겠지.’
그렇다면 이 상황에 한해서는 나한테도 나쁠 건 없다.
나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 꽤 바쁘지. 그런데?”
“에이. 모른 체하시기는. 어차피 도시 복구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시잖아요. 그래서 우리 남부! 신 코란 연합에서 나름 준비를 해놨다는 말이죠.”
박환희는 특히 남부라는 말을 강조했다. 나는 싱겁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읊어봐.”
“예. 우선 우리 수에서는 800만 금화를 준비했습니다.”
흠. 800만 금화라. 적은 양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 구역만 할당 받아도 차후 들어올 이득이 얼마인데, 고작 이 정도로 입을 씻겠다는 건 진정 도둑놈 심보였다.
허나 이놈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또한 신 코란 연합은 총 세 개의 클랜으로 구성돼있고, 남은 두 곳은 거대한 상인 클랜이니 아직 잣대를 내리기에는 이르지 않을까.
“그, 그리고! 우리 상인 조합과 백화에서는 자재를 조달해드리겠습니다! 그것도 무한정으로 말이죠!”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서지환이 곧바로 외쳤다.
자재 조달이라.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자재 조달을 무한정으로 해주시겠다고요?”
“예, 예! 그럼요! 우리 코란의 상인들이 이 도시 복구에 필요한 자재는 몽땅 책임지고 지원하겠습니다!”
자신 있다는 듯 가슴을 탕탕 치는 서지환. 어찌 보면 오버한다고 볼 수는 있지만, 그만큼 이번 기회를 놓치기 싫다는 소리였다. 서지환의 실상은 굉장히 수완이 좋은 사용자다. 비 전투 사용자에 해당하는 상인이 이 자리까지 올랐다는 사실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미 속에서 모든 계산이 끝났으리라.
아무튼 이 정도 조건이면 상당히 괜찮은 수준이다. 허세도 아니었다. 명색이 상인 클랜이니만큼 손쉽게 자재를 구할 수 있는 네트워크도 구축돼있을 것이고, 그동안 창고에 쌓아둔 양도 적잖이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가진 페널티 중 하나를 껴안아 준다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으랴.
“좋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자세한 얘기는 우리 쪽 클랜원과 하시죠. 고연주가 안내해줄 겁니다.”
서지환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벌써?’ 라고 말하는 듯한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어차피 신 코란 연합과는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이들 정도면 산하 클랜으로 들일만하지.’
왜냐면 사실상 변하는 건 거의 없으니까. 저번에 내 압박으로 박환희를 대표로 세운 이후, 공식적으로 산하 클랜이 되겠다는 절차를 밟는 것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눈치 빠른 박환희는 내 의도를 알아차렸고, 그래서 이야기를 빠르게 진행시킨 것이다.
박환희는 한 번 싱긋 웃더니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서지환을 이끌고 고연주를 따라 사라졌다.
그렇게 홀에는 나와 네 명만이 남았다. 남부와 이야기하는 동안은 의도적으로 무시했지만, 나는 비로소 시선을 돌려 한 명 한 명 시선을 맞췄다. 눈에 들어오는 표정이 하나같이 좌불안석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감도나 싶었으나 김덕필이 턱을 긁으며 슬쩍 시선을 올렸다.
“저…. 머셔너리 로드. 우선은 말이야. 우리가….”
“잠시만요.”
그러한 찰나, 여태껏 조용히 있던 성현민이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자연스레 나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성현민은 내가 아닌 다른 세 명을 보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다른 세 분은 잠시 자리를 비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뭐라고?”
김덕필이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성현민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냥 저 혼자 이야기하겠습니다.”
“왜, 왜? 왜 갑자기!”
“그게 더 나을 것 같으니까요.”
“어이, 성현민!”
“어차피 여차하면 저 혼자 총대 매는 걸로 합의하고 온 거 아닙니까! 그냥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야, 야!”
드물게도 성현민이 목소리를 높이는 동시 김덕필이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선율은 지그시 눈을 감았고, 나승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나와 성현민을 번갈아 쳐다본다.
…총대라. 그렇다는 말이지?
“그냥 그렇게 하시죠. 저도 중구난방으로 듣는 것 보다는, 총대 맨 한 명한테 듣는 게 더 편하니까요.”
나는 킬킬 웃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내분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고작 싸움 구경이나 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니까.
그러자 어쩔 수 없다고 여긴 걸까.
잠시 후 선율은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씩씩 숨을 몰아 쉬는 김덕필을 억지로 잡아 끌었다. 나승혜는 여전히 고개만 번갈아 돌리다가, 후다닥 일어나 선율을 따라 나섰다.
이윽고 홀에는 이제 나와 성현민 둘만이 남게 되었다.
“…….”
기껏 세 명이 나갔음에도 성현민은 애꿎은 바닥만 노려보고 있었다. 예전의 차분하고 현명한 빛은 온데간데없고, 굉장히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다. 좋은 표정이다.
은혜는 바다같이. 복수는 칼날같이.
우정민이 즐겨 사용하는 말로, 나 또한 좋아하는 격언이다.
지금이야 너무 바빠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그렇지, 나는 동부가 우리에게 한 행동을 절대로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에둘러 경고를 날린 것이고. 아마 박환희처럼 친근하게 웃으며 은근슬쩍 덮으려 했다면, 그대로 뒤엎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나저나 성현민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일대일 상황을 만든 걸까?
서서히 엄습해오는 흥미로운 기분에 나는 연초를 하나 꺼내 물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 모금 한 모금 빨아들인 연초가 거의 끝까지 타들어 갈 즈음.
“그럼 동부의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돌연 가라앉은 음성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성현민은 더 이상 머리를 숙이고 있지 않았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비장한 기운이 감도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예. 어디 한 번 해보세요.”
“머셔너리 로드도 아시다시피 동부는 대표 클랜의 자리를 노렸고, 그에 따른 준비를 어느 정도….”
“사족 싫어합니다.”
“2500명의 거주민을 모아놨습니다. 전원 도시 복구 작업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이들이며, 통신 한 번이면 바로 투입이 가능합니다.”
한 번 흔들어보려는 의도로 말을 끊었는데, 성현민은 낯빛도 변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나는 팔짱을 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현대에 건축과 관련한 일을 한 사용자들도 선별해놨습니다. 전문 인력입니다.”
“그리고요?”
“거주민은 물론, 복구에 투입되는 동부 측 사용자의 임금을 모두 부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요?”
“동부의 각 클랜에서 자금을 차출했습니다. 약 6000만 금화 가량 됩니다.”
“그리고요?”
“이건 많지는 않지만, 미리 모아둔 자재들도 모조리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리고요?”
빠르게 말이 오고 간다.
계속 이어지는 되물음에 성현민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동부의 주요 인사들이 공식 석상에 서겠습니다. 머셔너리를 비방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머셔너리 클랜원 한 명 한 명을 찾아가 고개를 숙이겠습니다.”
“흠. 그리고요.”
“피해 보상 또한 성심껏 준비하겠습니다.”
“…….”
거기까지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입장이 입장이니만큼 나름 발버둥을 치리라 생각했는데, 이건 또 의외였다. 심지어 나조차도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더 이상 굽히려야 굽힐 허리도 없다. 한때 2강이라 불리며 남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동부가 모든 걸 내려놓았다.
나는 연초를 떨군 후,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와. 이건 좀 놀랍네요. 아니. 정말 놀랐습니다.”
“…….”
“한 번 들어나 봅시다. 이 정도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건.”
그 순간.
“그건…. 말입니다.”
아주 잠깐이기는 했지만 성현민의 눈동자에 갈등의 빛이 서렸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듯한 표정.
그러나 이왕 내친 김이라고 생각한 걸까.
“…….”
문득, 덜덜 떨리는 목울대가 꿀꺽 움직이는가 싶더니.
“저는.”
마침내 성현민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우리 동부가….”
그리고.
“…구 코란 연합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토해내기라도 하듯,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