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08
00707 천사의 의뢰. =========================================================================
삐걱삐걱….
조금은 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입구의 문이 헐거운 소음을 내며 흔들거렸다.
탁.
조심스레 문을 닫은 백한결은 몰래 심호흡하며 몸을 돌아보았다. 약 60평 정도 크기의 공간에 여러 개를 이어 붙여 20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탁자를 따라 둥글게 앉아 있는 사용자들.
총 13명에 달하는 사용자를 면밀히 바라보자 백한결은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드는 기분을 느꼈다. 괜히 목을 움츠리며 살금살금 걸어가 빈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여관에는 차가운 한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조금이나마 더운 김이 나올 법도 한데, 그러기는커녕 서슬 퍼런 기운만이 감돌고 있다. 모두 입을 꾹 닫은 채 침묵하고 있으니 더욱 춥다는 기분이 들었다. 흡사 함부로 입을 열어서는 안 될 분위기랄까.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백한결은 이윽고 3명에 시선을 고정했다. 대다수 사용자가 가슴에 머셔너리를 상징하는 검과 방패 문양을 그려놓은 것에 반해, 오직 그 3명만이 다른 문양을 보이고 있었다.
우선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팔짱을 끼고 있는 김수현의 오른쪽에 앉은 사용자. 옷깃을 살짝 올린, 전신을 가릴 정도의 커다란 칠흑색 마법사 코트를 걸친 세련된 인상의 사내였다. 어깨에는 매를 연상케 하는 황금빛 새 한 마리가 걸터앉아 있다.
백한결은 사내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동안 수십, 아니 수백 번을 넘게 보기도 했거니와 북 대륙 마법사를 통틀어 거의 첫손으로 꼽을 수 있는 사용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뇌전 계열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마법사.
‘뇌제(雷帝)’ 김유현.
그리고 김수현의 왼쪽으로는, 여관 내 그 누구보다 거대한 체구를 가진 거한이 한껏 무게를 잡고서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가죽 갑옷은, 어쩌면 근육으로 만들어졌을 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눈은 덥수룩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이따금 으르렁거리듯 움직이는 상처 난 입은 거친 야성의 성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흡사 사람이 아닌 한 마리 짐승을 보는 듯하다.
백한결은 이 거한의 정체도 알고 있다. 무엇보다 품에 꼭 안은 불길한 기운을 뿌리는 검은 창을 보면 확실하다.
‘수라마창의(修羅魔槍) 주인’ 공찬호.
마지막으로 오른쪽 건너편에는 왠 여인이 앉아 있었다. 특이하게도 이 여인은 앞선 두 사내처럼 무겁지만은 않았다. 누군가를 바라보며 새침하게 비웃거나, 죽일 듯이 노려보는 등 수시로 표정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체 누구를 보고 저러나 의아해 했는데, 건너편의 고연주가 소리 없이 맞받아치는 모습을 확인한 순간 백한결은 비로소 여인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처형의 공주(Princess Of Executions)’ 연혜림.
처음에는 당황해서 누구인지 몰랐는데, 잘 생각해보니 떠올릴 수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10강에 오른 사용자고, 사용자 아카데미에서도 한두 번 마주친 기억이 있다. 특히 고연주와 눈빛으로 싸우는걸 보면 거의 확실하다. 왜냐면 아주 가끔 고연주가 연혜림을 걸레의 공주라고 욕하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고연주는 피식 웃으면서 손에 코를 쥐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냄새 난다는 뜻으로 연혜림을 걸레에 빗대어 표현한 행동이다. 이내 발끈한 연혜림이 이를 갈며 탁자를 짚고, 백한결이 어어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찰나였다.
우웅!
문득 어디선가 일어난 미약한 마력의 흐름이 새벽의 정적을 깨트렸다.
그 순간 고연주와 연혜림은 동시에 행동을 정지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히 집중했다. 그 신속한 태도 변환에 놀라면서도 백한결은 얼른 탁자를 응시했다. 이리저리 갈라진 나무 탁자 중앙에는 연한 빛을 흘리는 푸른색 구슬 하나가 놓여 있다.
어느새 눈을 뜬 김수현이 조용히 구슬에 손을 얹었다.
번쩍!
빛이 터지며 구슬이 누군가를 비췄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조금 피곤해 보이는, 이지적인 여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백한결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저 여인이 누군지 자세히는 모르나, 중앙 관리 기구에서 가장 높은 사용자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이효을이 사방을 훑더니 휙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정말 장난이 아닌데. 어지간한 대형 클랜 한두 개는 가볍게 찜쪄먹겠어.)
“흥. 하도 도와달라고 사정을 해서 말이야. 사실 이런 거 잘 나서는 성격은 않는데, 소영이도 도와주라고 하니까. 내키지는 않지만, 이 몸이 친히 나섰지.”
이효을의 감탄하자 연혜림이 새침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거드름을 피웠다.
김수현은 남몰래 싱겁게 웃었다. 이스탄텔 로우에 연락을 한 건 맞지만, 사실 연혜림이 아닌 한소영을 데려오려고 했다. 나름 용기를 내, 근래 여러 일로 머리가 아프지 않으냐며, 같이 무법자나 처리하면서 기분 전환이나 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그러나 한소영은 대단히 미안해하며 요즘 너무 바쁘다는 말로 완곡히 거절한 후, 연혜림을 데려가 주지 않겠느냐며 되레 부탁했다. ‘걔는 있어봤자 도시 발전에 손톱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애라, 이렇게라도 돌리고 싶네요. 그러니까, 부디.’라고 덧붙이면서. 물론 연혜림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겠지만.
(좋아. 아주 좋아. 이 정도 전력이면 오히려 그 무법자 놈들을 애도해야겠어.)
“준비에 만전을 기했을 뿐이야. 그나저나 정보는?”
김수현이 가볍게 말을 정리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거리던 이효을의 얼굴에 미안해하는 빛이 서렸다.
(음…. 일단 무작정 신전으로 쳐들어가서 물어보기는 했는데…. 우선은 현재 ‘칠흑의 숲’에서 확인된 서 대륙 사용자는 총 1500명 정도. 쫓기는 사용자는 약 400명, 500명 정도고, 쫓아오는 무법자 수는 그 두 배 가량 되나 봐.)
“두당 100명이라…. 실컷 날뛰어볼 생각 없느냐고 꾀더니, 이건 조금 실망인데. 흐흐….”
그 순간 여태껏 조용히 듣고만 있던 공찬호가 희뿌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김수현이 길게 숨을 흘렸다.
“어쩔 수 없지. 대다수가 남 대륙으로 몰려갔다고 하니까. 아무튼, 칠흑의 숲에 있다고?”
(응. 이건 내 예상인데 아마 저번 전쟁 때 부랑자들이 들어온 길을 이용하는 것 같아.)
“그럼 미개척 지역을 거쳐서 왔다는 소린데.”
(그렇겠지. 여하튼 알아낸 정보는 이게 다야. 미안.)
이효을은 미안하다고 말하며 쓰게 웃었다. 의뢰를 받은 입장인데 구걸하다시피 해 정보를 받아온 게 씁쓸했다.
그러나 김수현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서 대륙 사용자를 꼭 구해야 한다기보다는, 의무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세라프도 그러지 않았는가. 이 의뢰는 모종의 안건을 통과시키기 위한 하나의 조건에 불과하다고. 애초 천사가 사용자를 생각해 나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 정도면 충분해. 거리나 위치 파악은 이 녀석이 할 수 있으니까.”
김유현이 빙긋 웃으며 어깨에 앉은 황금새를 톡 건드렸다. 새는 날카로이 눈을 빛내며 나지막이 울어 젖혔다.
(응. 이렇게 도와줘서 고맙고 또 미안해. 다들 건투를 빌겠어.)
이윽고 이효을이 깍듯이 인사하며 응원하는걸 마지막으로 구슬의 빛이 꺼졌다.
“음….”
김수현은 담담히 구슬을 품에 넣은 후, 주변을 쭉 훑었다.
“뭐…. 다들 알아서 잘해주겠죠.”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각자의 수준을 따져보니 따로 지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홀 플레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잘 키운 사용자 하나 열 사용자 부럽지 않다.
그런데 여기 모인 사용자 대다수는 잘 큰 정도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극에 다다른 사용자다. 당장 김수현만 봐도 보통 사용자 100명 정도는 음주 후 해장으로 가볍게 처리 가능하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고, 김수현의 시선은 잠시 안현과 백한결 두 명에게 머물렀다. 허나 한 번 믿어보자고 생각했는지, 곧 탁자 아래서 커다란 회색 로브를 들어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다른 사용자들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똑같은 색의 로브를 몸에 둘렀다. 백한결은 혼자만 챙겨오지 않은 건가 싶어 당황하다가 허준영이 무심히 로브 하나를 건네자 반색하며 받아 입었다.
잠시 후, 김수현을 선두로 한 사용자들이 한 명 한 명 여관 밖으로 나섰다.
“그럼, 갑시다.”
그렇게 회색 로브를 눌러쓴 14명의 사용자는, 바람처럼 성문을 벗어나 칠흑의 숲 안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
부스스, 부스스!
어스름한 새벽.
뿌연 안개가 깔린 어두운 숲은 새벽의 고요함과는 맞지 않은 때아닌 부산함을 보이고 있었다.
“후욱…. 후욱….”
이윽고 흔들거리는 수풀을 헤치고 한 여인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여인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인은 선두에 불과했고, 곧 수풀이 또 한 번 크게 흔들리며 무수한 사용자가 속속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수는 실로 상당해 4, 500명은 될 법했다.
여인을 포함한 사용자들의 모습은 척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은 애교로 보일 수준이다. 꼭 몇 달은 씻지 못한 사람처럼 몸 군데군데 먼지가 쌓여 있고, 입고 있는 갑옷이나 로브도 꺼멓게 변색돼 너덜거리고 있었다. 심한 경우는 아예 로브가 아닌 걸레로 보일 정도였다.
“거의…. 이제 거의 다 왔어….”
그러나 여인은 무언가에 홀린 듯 맥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끊임없이 걸었다. 허나 끝없이 정면을 응시하는 두 눈동자만큼은 뜻 모를 비장함을 품고 있었다.
그때였다.
“사라! 사라아아!”
돌연 후방에서 날아온 절박한 외침이 여인의 등을 때렸다. 사라라고 불린 여인은 여전히 걷는걸 멈추지 않으면서 흘끗 고개를 돌렸다. 한 사내가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죽어라 달려오고 있었다. 사라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서렸다.
“아놀드?”
“사라, 사라! 큰일이에요! 큰일이…. 악!”
그 순간 아놀드라 불린 갈색 머리칼의 사내가 세차게 땅으로 고꾸라졌다. 아마 급하게 달려오다가 발이 꼬인 듯했다. 사라는 갑갑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걸음을 돌려 아놀드에게로 다가갔다.
“아놀드?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그, 그게…. 큭!”
아놀드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고통이 심한지 이를 악물었다. 발목 부근이 새빨갛게 변해 퉁퉁 부어 있었다. 깜짝 놀란 사라가 무어라 외치려 했지만, 아놀드가 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사, 사라! 큰일났어요! 낙오자, 낙오자가 생겼다고요!”
“네?”
사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어서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흡사 누가 쫓아오지는 않는지 심히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아놀드가 고통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습격은 아니에요. 아무래도 연이은 강행군에 지쳐, 어디선가 낙오한 모양이에요. 길을 잃은 게 분명해요.”
“아놀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요. 지금 우리 상황이 그렇게 좋지가 못해요.”
“사라.”
“안 돼요. 설마 여기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지만, 우리는 이틀 전 거의 따라 잡힐 뻔 했잖아요.”
“하, 하지만….”
“운이 좋아서 간신히 도망칠 수는 있었지만, 또 그런 행운을 기대할 수는 없어요.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이후의 상황을 장담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일어나요. 어서.”
사라는 아주 빠르게 말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형히 빛나는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자 아놀드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면서도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사라….”
============================ 작품 후기 ============================
오늘 조금 슬픈 일이 있었네요.
사실 집필하면서 아주 가끔, 정말로 가끔 노래를 부르고는 합니다. 오늘처럼요.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꾸움~. 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그래서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유진아….”
“언제나~. 너를~. 향한 몸짓에~. 수많은 어려움~~~~. 네?”
“미안하다….”
“네? 뭐가요?”
“엄마가 미안해….”
“????”
“엄마가 미안해…….”
“…….”
그리고 형이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그래. 야. 나도 미안하다.”
“아니. 갑자기 왜 그래. 노래 부르지 말라고? 작게 불렀는데.”
“아니. 미안. 정말 미안. 미안하다고.”
“…….”
…살면서 형한테 미안하다는 말 들어본 게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어안이 벙벙하더라고요.
아무튼 오늘 좋은 걸 배웠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형이 출근하기 전에 문 앞에서 뽀뽀뽀를 부를 예정입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