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09
00708 14 Vs 1000. =========================================================================
“한 번만, 다시 한 번만 생각해봐요. 제발.”
그때였다.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리려는 찰나, 아놀드의 애절한 음성이 사라의 귓전을 울렸다.
“사라. 여태껏 같이 온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사라도, 나도 아는 사람들이라고요. 조이, 조나단, 레이첼, 테레사! 모두 친구잖아요.”
“아놀드?”
“이렇게 되기 훨씬 전부터, 서로 돕고 의지해온 동료들이잖아요. 정말로, 정말로 이대로 버리겠다는 건가요?”
“…….”
아놀드의 목소리가 흡사 애원하듯이 이어졌다.
“물론 사라의 말은 틀리지 않아요. 하지만 최고의 선택이 무조건 최선의 결과를 낳는 건 아니잖아요?”
사라는 말문이 막힌 것처럼 입을 닫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놀드를 보니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저분히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두 눈이 선하게 드러났다. 뜨거운 열정을 품은 또렷한 눈동자와 마주하자 사라의 얼굴이 덩달아 화끈해졌다.
“이틀 전에 잡힐 뻔했다고는 하지만, 그 후로 한 번도 보이지 않았잖아요. 방향을 잘못 잡았을 수도 있고 그대로 돌아갔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주변을 둘러봐요. 연이은 강행군으로 인해 모두가 지쳤어요. 그래서 낙오자가 생긴 거고요. 조금이라도 좋으니 우리는 휴식이 필요해요.”
“아놀드….”
계속해서 이어지는 아놀드의 설득. 언뜻 주변을 둘러본 사라는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초췌한 얼굴로 아기를 들고 있는 젊은 부부. 허리를 굽힌 채 숨을 헐떡거리는 여아와 걱정하는 얼굴로 등을 두드려주는 앳된 소년.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모두가 힘들어 보인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도망치는 내내 항상 괴물이나 무법자의 습격에 떨어야 했으니까.
“사라. 심정은 알겠으나 근래 너무 예민해진 것 같아요. 우리는 예전처럼 따뜻하면서 밝고 명랑한 사라가 돌아오기를 바라요. 그러니 제발…!”
아놀드가 거듭 부탁하고 있다. 이쯤 되자 단호하던 사라도 한 번은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대다수 사용자가 남 대륙으로 도망치고 무법자가 황급히 쫓는 사이, 사라는 틈새를 찌를 요량으로 남은 사용자를 이끌고 북 대륙으로 가는 길을 잡았다. 확실히 의도는 좋았지만, 문제는 가는 길을 거의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다행히 2년 동안 동고동락해온 아놀드가 직접 나서 길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말인즉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아놀드의 공이 가장 컸다. 그동안 얼마나 헌신적으로 희생했는지 알고 있어, 사라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사라. 불과 30분 전만 해도 모두 있는 걸 확인했어요. 장담해요.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휴식하는 동안만이라도 찾아보면 안될까요?”
결국에는 이 말이 결정타였다.
“…알았어요.”
사라는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휴식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아놀드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놀드의 안색이 환해졌다.
“사라!”
“그래도 오래는 못 기다려요. 20분. 딱 20분만…?”
말을 잇던 사라는 돌연 몸이 격하게 흔들림을 느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을 힘껏 껴안은 아놀드를 볼 수 있었다.
“고마워요. 정말로 고맙습니다.”
구릿한 냄새가 물씬 풍겨왔지만, 사라는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지친 심신을 달래는 포근한 감각을 느꼈다.
“…딱 20분만 기다릴 거예요.”
아놀드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사라의 얼굴을 부드러이 감싸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요. 꼭 20분 안에 돌아올 테니까, 사라도 약속해요.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만이라도 푹 쉬고 있기로.”
“아놀드?”
“서로 약속한 거예요? 알겠죠?”
“그, 그래요.”
어느새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서일까. 사라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아놀드는 곧바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절뚝거리는 걸 보고 사라가 걱정스레 외쳤지만, 아놀드는 물약을 들어 올리며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아놀드는 숲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는 한동안 아놀드가 사라진 숲을 바라보다가 두 손을 천천히 볼에 댔다. 아직 남아 있는 따뜻한 감촉이 몸을 아늑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근심이 들었지만, 이미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은 하나하나 자리에 앉고 있었다. 젊은 부부는 이제 좀 살겠다는 얼굴로 품에 안은 아기를 보며 미소 짓고, 어린 남매는 서로 꼭 껴안은 채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을 보자 딱히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 사라는 커다란 나무 하나를 찾아 몸을 기대앉았다.
갑자기 아놀드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우리는 예전처럼 따뜻하면서 밝고 명랑한 사라가 돌아오기를 바라요.’
그 순간 여태껏 딱딱히 굳어 있던 사라의 얼굴에 봄바람 같은 미소가 살그머니 자리잡았다.
“정말, 너무 정이 많다니까….”
사라는 빙그레 웃음 지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문득, 어디선가 따뜻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라의 얼굴은 여전히 발그레한 상태였다. 따뜻한 기운은 마치 이대로 잠을 자라고 부추기듯이 사라의 전신을 잠식했다.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대로 자고 일어나면 왠지 굉장히 상쾌하게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으니까.
서서히 수마가 몰려온다. 깜빡깜빡, 눈꺼풀이 감겼다가 힘없이 뜨인다. 찰나의 순간, 이대로 자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파도처럼 밀려오는 잠의 기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머릿속에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은 순간, 사라는 그대로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졌다.
*
동이 텄다. 해는 서서히 중천으로 올라가고 어두운 숲에 밝은 햇살이 비췄다. 새초롬히 돋아난 풀잎은 햇살을 받아 힘차게 기지개를 켜고 잎을 떨었다. 차가운 공기가 흐르던 칠흑의 숲은 어느새 이슬 빛 반짝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사박사박. 사박사박.
사박사박. 사박사박.
그리고 숲의 안으로 하염없이 걸어 들어가는, 머리 끝까지 회색 로브를 눌러쓴 14명의 사용자.
“찾았다.”
이어서 나직한 음성이 울린 순간.
사박…!
14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들어온 지 겨우 4시간이 지났는데…. 빠르군요. 어디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가장 오른쪽에 서 있던 사내가 얼른 후드를 벗어 젖혔다. 깔끔하게 깎은 스포츠 머리와 무심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선유운이었다.
이윽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황금빛 흐르는 두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마치 어느 정도 남았는지 가늠하기라도 하듯이.
“북서 방향. 거리는 0.8 킬로미터 정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흔적이 많이 남았네요. 그것도 잔뜩.”
“감사합니다. 그럼…. 클랜 로드.”
“가보세요.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하시고.”
“예.”
가장 선두에 있던 김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 선유운은 가볍게 점프해 나무에 올랐다. 그리고 나무와 나무를 타고 김유현이 알려준 방향으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김수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유운이 먼저 가서 정찰하고 있을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적당한 속도로 접근하겠습니다.”
이윽고 13명의 사용자는 왼쪽으로 방향을 선회해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백한결은 가장 후방에서 걸어가면서 어색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여태껏 겪은 탐험이나 원정과 비교해보니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전처럼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서로 긴 말이 오고 가지 않아도 눈빛만 교환하고 알아서 행동하고 있다. 마치 이러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아. 수시로 뜨거운 눈빛을 교환하는(?) 고연주와 연혜림은 제외하고.
아무튼, 아직은 수동적인 행동을 보이는 백한결로서는 확실히 어색하게 느낄 법한 일이었다.
잠시 후.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구조대는 김유현이 말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는 동안 딱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새 선유운도 주변 정찰을 마치고 같은 결론을 내렸는지,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발견한 정보라도 있습니까?”
김수현이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선유운은 조금 아쉽다는 듯 지면의 흙을 크게 쓸더니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한 발 늦은 것 같습니다.”
“한 발 늦었다고요?”
“예. 우선 도망친 사용자들이 여기까지 온 건 확실한데…. 주변을 돌아보니 포위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더 들어온 흔적은 없고 되돌아간 흔적은 있습니다.”
“흠…. 최근 흔적은?”
“약 4시간 정도 됩니다.”
“이런.”
김수현이 혀를 찼다. 선유운의 말을 종합해보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 하나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이윽고 고연주가 인근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시체가 보이지 않는데요? 아니. 시체는커녕 반항한 흔적도 보이지 않아요.”
“전력 차이가 두 배가 나는데, 순순히 끌려갔을 수도 있지. 너는 그런 생각도 못 하니?”
연혜림이 킥킥 비웃으며 핀잔을 놓았다. 고연주는 대번에 인상을 찡그리며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면 입 닥치고 있어. 할 줄 아는 건 전투밖에 없는 게.”
세차게 쏘아붙인 고연주는 이윽고 커다란 나무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하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흐읍. 흠….”
이어서 마치 음미하기라도 하듯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더니 천천히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서 이상하게 라타 냄새가 진하게 나네요.”
“라타? 라타라면…. 수면 약초 아닙니까?”
무언가 짚이는 바가 있는지 신재룡이 말했다. 고연주가 맞는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네. 정확히는 체내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게 하고, 몸을 나른하게 풀어주는 효능이 있죠. 특히나 몸이 피곤하거나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을 경우에는, 효과가 200% 직빵으로 들어가요.”
“그렇군요. 허나 제가 알기로는 라타는 사시사철 따뜻한 곳에서만 자랄 수 있다고…. 여기는 칠흑의 숲이잖습니까.”
“그래요. 라타는 유독 이 장소에서만 냄새가 나고 있어요. 그리고 이 나무 아래에는 누가 기대앉았던 흔적이 있고요.”
“그러면….”
신재룡이 아리송하다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고연주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다.
“아무리 이로운 효능을 가진 약초라고 해도, 쓰임새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답니다. 쫓기는 상황에서, 어느 바보가 라타를 직접 사용하겠어요?”
뼈가 있는 말이었다. 신재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튼, 우리가 한 발 늦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네요.”
김수현이 얼른 상황을 정리했다.
“괜히 하루 시간을 뒀나…. 4시간이면 조금 애매한데.”
말을 이으면서 김수현은 김유현을 흘끗 흘겼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추적할지 포기할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우선은 추적 쪽에 마음이 기울고는 있었지만, 4시간이나 차이가 난다면 속도가 생명이다. 시작부터 방향을 잘 잡고 끈질기게 쫓아야 한다.
“형. 혹시 쪼롱이랑 시야 동화 어느 정도까지 가능….”
그때였다.
“생각보다 애매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김수현이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가만히 서 있던 김유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까 차분하던 것과는 다른 진득한 음성으로.
“…형?”
김수현은 흠칫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태연하던 김유현이 돌연 미약하게나마 살기를 뿌리고 있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무언가 더러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이거…. 완전히 미친놈들이잖아?”
김유현이 이를 갈았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후드를 벗어 젖히고는 김수현을 돌아보았다.
“무법자들이랬나?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김수현의 낯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
“그럴 리가? 4시간이라면 못해도….”
“아니. 아니야.”
김유현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놈들, 아무래도 캠프를 차린 모양이다.”
============================ 작품 후기 ============================
아이고. 그래요. 저 노래 못 부릅니다. 음치고, 박치에요. 아. 박치는 아닌가?
아무튼 노래 못 부르는 건 맞아요. 고등학생 때 친구 한 명이 저보고 진지한 목소리로 성인 남성의 목소리보다 한 두 음 정도 낮다고 말한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래서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을 보면 속으로 엄청 부러워한답니다.
그리고….
여전히 제 성별이 논란이네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저한테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독자 분들이 저를 놀리려고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아무래도 제 말투나 태도에서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결정했습니다. 바꾸기로요.
이렇게 말이외다.
안녕하시료~. 본인은 로유진이라 하오.
몇몇 대협들이 소인을 여인으로 보시는 경우가 있는데, 아니외다.
본인은 절대로 여인이 아니며, 신체 건강한 매우 야성적인 사내요.
이 점, 특히 알아주시기를 바라오.
그럼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라겠소.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