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10
00709 14 Vs 1000. =========================================================================
“……!”
어디선가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아주 살짝 정신이 든 사라는 돌연 몸에서 뜻 모를 갑갑함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보았지만, 무언가에 꽁꽁 옭아매기라도 한 듯 사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사라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시야가 흐릿하게 열리는 동시, 덩달아 깨어난 청각에 가까운 곳에서 나누는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아 그러니까요. 그걸 왜 저한테 그러시냐고요. 애초에 저 아니었으면 이 연놈들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셨을 거잖아요. 아 좆 같네 진짜.”
조금 어수룩하면서도 밝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사라의 낯에는 불신의 기색이 스쳤다. 분명히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조와 비교하면 말의 내용은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허.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보소. 야 이놈아. 네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시간이 너무 걸렸다 이 말이잖아. 오죽하면 네가 우리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라는 소리까지 나왔다고.”
걸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좀 전과 확연히 다르기는 했으나 이 또한 익숙한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사라의 입장에서는 철천지원수의 육성인데.
허나 사라의 머릿속에서는 원수에 대한 맹렬한 증오심보다는, 근본적인 의문이 앞섰다. 왜 갑자기 그놈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아니. 여기는 어디고 나는 어떻게 된 거지? 등등.
“거기서 조금만 더 갔으면 북 대륙 나오는 거 몰라서 그래? 너도 2년 전에 참가했으니까 알 거 아니냐. 거기는 괴물 같은 놈들이 흐드러지게 널린 곳이라고.”
“아이고.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이렇게 캠프를 차리셨어요.”
“야 인마!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쌓였는지 알아? 그래도 그동안 쌓인 거 풀 시간은.”
“아 알았어요! 알겠는데. 난들 여기까지 오고 싶어서 왔습니까? 다 이년 때문이라고요. 어찌나 의심이 많고 눈치가 빠른지…. 에이!”
그 순간 사라는 정수리에 가해지는 거센 충격을 느꼈다. 격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자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놀드가 보였다. 사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고, 아놀드도 놀란 기색으로 눈을 치떴다.
“아, 아놀드?”
“어? 깨어 있었어?”
두 목소리가 겹치는 동시, 사라와 아놀드가 서로를 빤히 응시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이윽고 아놀드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자리잡는다. 사라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걸 느꼈다. 그러나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가 떠봐도 아놀드의 비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라는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지혜롭고 영리한 여인이다. 좀 전의 말을 들은 결과, 확신에 가까운 하나의 가능성을 추측했다. 그냥 인정하기가 싫을 뿐.
“아, 아놀드. 어째서…?”
“에이. 들었나 보네. 나중에 깨어났을 때 연기 좀 하려고 했는데. 아깝다~.”
“저한테 그랬잖아요. 친구들을 찾으러 간다고 했잖아요!”
“아! 그 친구들?”
아놀드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와 사라의 머리카락을 잡아 끌었다. 그 우악스러운 손길에 신음을 흘리면서도 사라는 뜻 모를 불안을 느꼈다.
아놀드가 사라를 끌고 나간 곳은 천막 밖이었다.
“걱정 마. 친구들은 확실하게 찾았으니까.”
능글맞게 말한 아놀드는 사라의 턱을 강제로 받쳐 올렸고, 귓가에 속삭였다.
잠시 후.
사라가 느낀 불안은.
“그런데…. 살아 있다고 한 적은 없다?”
“……!”
현실로 눈앞에 나타났다.
중천에 떠오른 해. 따사로운 햇살.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 이슬을 머금은 숲.
눈에 보이는 풍경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숲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전혀 평화롭지 못했다. 가히 수백에 달하는 사람의 비명과 울음이 끊이지 않는, 한 폭의 지옥도를 그려내고 있었다.
“아아아악! 아, 안 돼! 싫어어어! 살려주세요오오오!”
“으하하하하하하하!”
한쪽에서는 네댓 명의 사내가 한 여인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까 아기를 안고 있던 젊은 부인이었다. 사내에 올라탄 여인은 눈물 범벅인 얼굴을 하면서도 스스로 허리를 놀리고 있었다. 그러다 속도가 조금 느려질 때쯤이면, 웬 사내가 아기를 높이 들어 올려 이리저리 흔들었다. 여인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구슬픈 비명을 지르면서 도로 엉덩이를 열심히 놀렸다. 사내들의 낄낄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남편은 이미 차가운 시체가 된 지 오래였다. 아내와 아이에게 접근하는 무법자들에게 용감히 저항했지만, 결국에는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 옆으로는, 이제 갓 10살을 됐을 법한 앳된 소년이 온몸이 발가벗겨진 상태로 무법자 여인에게 깔려 있었다. 여인은 흡사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궁둥이를 내려찍는 중이었다. 소년은 반항도 하지 않고 찍히는 대로 몸을 움찔거렸다. 그냥 초점을 잃은 멍한 눈동자가 입이 찢겨 죽은 여동생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쪽의 상황도 매한가지였다. 무법자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살인이나 욕정을 푸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아…. 아….”
사라는 고함을 지르려 했으나 소리는 목구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비로소 상황을 인지해서일까 희망이 사라져서일까. 아니면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걸까. 파르르 떨리는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숨소리만 거칠어져 갈 뿐이었다.
“후. 표정 한 번 좋네.”
그때 옆에서 누군가 비웃듯이 이죽거렸다.
고개를 돌린 사라는 단박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랜만이야? 사라 제인.”
덥수룩한 턱수염의 살찐 사내가 킥킥 웃고 있었다.
“조프리…!”
사라가 이를 갈았다. 그러나 조프리라 불린 사내는 건들거리며 다가오더니 끙 하고 허리를 굽혀 미소 띤 얼굴을 가까이했다.
“내가 말했지? 너희가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내 손바닥 안이라고.”
“…….”
“그래서, 기분이 어때? 결국에는 이렇게 된 기분이 말이야.”
“퉤!”
사라는 힘차게 침을 뱉었다. 침은 곧 인중에 맺혔으나 조프리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황홀해하며 혀를 내밀어 침을 핥고 빨아들였다.
“하여간 너나 네 언니 비비안이나.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냐.”
마치 소중한 것을 다루듯 사라를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죽일 거야…. 죽여버릴 거야…!”
“죽이기는. 아 그러게 진작 내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좋잖아. 그냥 내가 원할 때마다 몸 좀 대주고. 그 대신에 내 첩으로 대접받으면서 편안하게 살고. 응?”
말을 하면서 조프리는 훌렁훌렁 하의를 벗어 젖히고 있었다. 그동안 욕정이 상당히 쌓였는지 행동은 대단히 급해 보였다.
“개소리…! 읍?!”
무어라 외치려던 사라는 입안을 한 가득 틀어막는 감촉에 말을 삼켰다. 조프리가 벗은 속옷을 강제로 구겨 넣은 것이다. 가득히 흘러오는 구릿하고 역겨운 냄새에 토악질을 할 것 같으면서도, 사라는 서서히 다가오는 그림자에 몸을 떨었다.
“나 참. 대장도 하려고요?”
“어차피 이거 내일쯤 돼야 가라앉는다. 그리고 나도 좀 즐겨야지. 내가 그동안 얘를 얼마나 안고 싶었는데.”
“어휴. 어련하시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데 조심하십쇼. 저번에 비비안이 갑자기 깨물어서 고자 된 놈이 하나 있답디다.”
“그래서 이렇게 틀어막았잖아. 흐흐흐흐흐흐흐흐!”
조프리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음침하게 웃으며 사라를 넘어트렸다. 구경거리가 생기자 주변에서도 여러 무법자가 시시덕거리며 몰려들었다. 거기에는 아놀드도 있었다. 사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최대한 옆을 바라보았다. 크게 소리치고 싶었고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뭘 봐. 이 등신 같은 년아.”
그러나 아놀드는 차갑게 비웃으며 구경할 뿐이었다. 그 순간 사라가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혹시나 하는 희망의 끈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찌직!
그와 동시에 거침없이 움직이던 조프리의 손이 사라의 하의를 찢었다. 한순간 하체가 시원해지고 소중한 곳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걸 느낀 순간, 사라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차오르는 수치심에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실망, 분노, 자책, 후회 등 여러 마이너스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곧 도착이었는데.
이제 거의 다 갔었는데.
계속 갔어야 했는데.
그런데, 그런데….
“햐…. 죽이는구먼.”
허나 조프리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사라의 몸에 급히 올라탔다. 사라의 눈동자가 텅 비워지며 허무하게 하늘을 바라본다.
그때였다.
문득, 사라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스쳤다. 아까까지만 해도 화창하던 하늘이 어느 순간 어둑하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새 한 마리. 사라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새는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우르릉, 우르릉!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몰려든 먹구름은 파직 거리는 황금빛 전류를 폭발적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자~! 그럼 사라 제인의 처녀 개통식을…. 뭐, 뭐야?”
신 나게 외치던 조프리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의아해 하며 머리를 젖혔다. 그리고 이상 현상이 발생한 하늘을 확인했는지 흠칫 몸을 움찔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꽈르르릉, 꽈르르릉!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 소리가 재차 하늘을 울리고.
콰지지지지지지직!
숲 일대를 뒤덮을 정도의 무수한 벼락이, 노란빛을 분사하며 폭발적으로 내리 꽂혔다.
흡사 천벌을 내리듯, 지상으로 수직 하강하는 벼락의 폭우.
이어지는 벽력(霹靂)과 대지가 마찰하는 소름 끼치는 굉음.
낙뢰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리쳤다. 동시에 엄청난 정확도를 보여, 무법자 한 명 한 명에게 정확하게 내리 꽂혔다.
“끄라라라라라라락!”
“끼야아아아아아악!”
미처 대응할 틈도 없었다. 공간을 찢을 듯한 뇌성에 이어서 무법자들의 합창이 도처를 울렸다.
“아…?”
온몸에 흐르는 짜릿한 감각에 사라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크게 놀라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위에 올라탔던 조프리가 눈 깜짝할 사이 시꺼멓게 그을려 재가 흩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벼락을 맞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 사라는 그냥 짜릿짜릿한 감각만 느낄 뿐이지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윽고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 사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불타오른다. 신기하게도, 곳곳에 엎어진 무법자의 시체에서만 벼락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아직 서 있는 무법자가 있기는 했다. 허나 너무 갑작스러운 일을 당해서일까. 무법자는 하나같이 동작 정지에 걸린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 틈을 놓칠 김수현이 아니었다.
그래. 마침내 천사의 의뢰를 받은 구조대가 도착한 것이다.
“크하하하하하하하!”
어디선가 들려온 거친 웃음이 숲 일대를 떨어 울렸다. 수풀 너머로 여러 그림자가 비호처럼 달려온다. 그 속도는 처음 내리친 벼락과 비슷해, 재빠르게 수풀을 헤치고 넘어와 삽시간에 무법자들에게 들이닥쳤다.
첫 타로, 무법자 한복판으로 뛰어든 거한이 광소를 터뜨리며 있는 힘껏 창을 내리찍었다.
쿵!
대지마저 찢어버리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이, 거센 흙먼지를 일으키며 망연히 서 있던 무법자 무리를 그대로 덮쳐 들었다.
푸확!
무언가 사정없이 터지는 소리. 무형의 기운에 받친 한 무리 무법자가 한꺼번에 터졌다. 점점이 쪼개진 살점과 핏물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냥 짓뭉개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몸 자체가 폭발해버린 것이다. 마치 폭탄에 직격당한 것처럼.
“스, 습격!”
그나마 정신을 차린 어느 무법자가 얼른 경고하려고 했으나.
퍽!
그마저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어디선가 깊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온 화살이 그대로 입안을 꿰뚫어버렸으니까. 결국에는 머리 반대쪽까지 화살이 뚫린 채 힘없이 몸을 허물어트렸다.
“다음은 누구냐~. 크흐흐흣!”
이윽고 처음 달려온 거한의 사내가 창을 붕붕 돌렸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가 먹잇감을 찾는 듯 주변을 둘러본다. 이제야 좀 상황이 파악됐는지, 무법자들은 당황하며 걸음을 물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법자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무법자들이 물러나는 방향으로 회색 로브를 눌러쓴 사용자가 소리 죽여 걸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아니. 비단 후방뿐만 아니라, 동서남북 사방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이건….”
혼란한 와중, 인근을 둘러본 사라는 멍하니 말끝을 흐렸다.
지면에서는, 어느새 불길한 기운을 흘리는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오라! 피에르!”
여인의 힘찬 목소리가.
“제 4 군단을 지배하는 미친 불꽃의 어릿광대여!”
숲의 일대를 낭랑하게 울렸다.
마침내 일방적인 학살의 신호탄이 쏘아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