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11
00710 14 Vs 1000. =========================================================================
아비규환(阿鼻叫喚)!
아침까지만 해도 평화롭던 숲은 삽시간에 생지옥으로 변했다. 그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광경이었다. 서로가 죽고 죽이는, 아니 한쪽이 일방적으로 죽이는 학살의 극장이 막이 올랐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악!”
젊은 부인을 강간하던 무법자의 입에서 소스라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군단을 소환하는 비비앙의 낭랑한 외침이 들린 순간, 땅속에서 수백의 검은 인영이 불쑥 솟구쳤기 때문이다. 무법자가 벗은 바지를 추스르기도 전에, 소환된 마수들은 폭발적으로 내리 꽂히며 달려들었다.
서둘러 몸을 추스른 사라는 숲에 소환된 마수 군단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키는 약 2미터는 될까. 사방으로 물 흐르듯이 퍼지는 마수들 사이로, 웬 검은 인영 하나가 미친 듯이 웃어 젖히며 곡예와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 이윽고 쭉 찢어진 시뻘건 눈이 히죽 호선을 그리는 동시, 새빨간 입이 귓불 아래까지 활짝 찢어져 벌어졌다.
“흐아아악! 흐아아악!”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오는 인영을 봤는지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검은 인영은 양손으로 무법자를 세게 붙잡고는, 그대로 들어 올려 입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뿌드드드드드드득!
그리고 이어지는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 이내 와그작와그작 씹는 소리까지 들리자,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던 사내의 몸이 허무하리만치 축 늘어졌다. 목이 끊긴 시체가 하릴없이 땅으로 떨어지고, 작은 마수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시체를 물어뜯기 시작한다.
그냥, 끔찍하다는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군단 소환은 전조에 불과했다. 차마 더 볼 수 없어 고개 돌린 사라는, 곧 더욱 참혹한 광경을 보며 온몸을 떨었다.
웬 거한이 두 눈에서 시뻘건 안광을 뿜어내며 악마처럼 날뛰고 있다.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창에 무법자들은 그야말로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한 번 내려 찍힐 때마다 머리통이 터지고, 푹 터져 나온 뇌수가 핏물을 흩뿌리며 저만치 멀리 뻗어 나간다. 심지어는 복부 아래가 찢어진 채 하늘로 너덜너덜 솟구치는 무법자도 있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파괴력이었다.
그뿐일까.
“까아아악!”
어느 여인이 앞으로 우아하게 뛰어오르는가 싶더니 돌연 눈을 번뜩이며 손을 휘둘렀다. 흡사 칼날처럼 예리한 빛을 뿌리는 5개의 손가락이, 소년을 찍어 누르던 무법자 여인의 목젖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대로 목줄을 잡아 비틀었는지, “꺽.” 소리를 내는 입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진다. 주르륵 흘러내린 핏물은 곧 수풀에 맺힌 이슬에 섞여 들어가 흙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이윽고 씩 웃어 보인 여인은 곧장 이동해 보이는 족족 손으로 찌르고 자르기 시작했다. 익숙한 건 차치하고서라도, 너무 태연하게 사람을 죽이는 게, 장난을 치는지 ‘처형’을 하는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비명이 흐르기 시작했다.
단 한순간에 상황이 변했다. 불과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사용자의 절규가 메아리 치던 숲이, 어느 순간 무법자의 비명으로 가득히 메워졌다. 그러자 이성을 잃고 당황하던 무법자들도 한 명 두 명 행동을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집어 든 이도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공포에 떨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물리는 이가 훨씬 많았고, 여전히 대다수가 제자리서 얼어붙은 채 허둥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화륵, 화륵!
문득 어디선가 맑은 색의 붉은 화염이 이글거리며 치솟았다. 뜨거운 열기를 느낀 걸까. 주춤주춤 물러나던 무법자들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타오르는 화염이 일직선으로 곧게 그어지며 기다란 잔상을 남겼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툭!
횡으로 그어오는 깔끔한 일격에 네 명의 무법자가 차례대로, 거의 동시에 목이 잘려 떨어졌다. 미처 말을 꺼낼 틈도 없었다. 몸은 아직 서 있기는 했지만, 잘린 목의 단면이 뻘겋게 타들어 가며 허연 연기만이 흘러나왔다.
피 분수가 점점이 솟구치는 흔들거리던 몸이 풀썩 허물어지고, 짙은 회색빛 로브를 눌러쓴 사내가 시체를 밟고 건너왔다. 특이하게도 오른손에 쥔 칼은 칼자루만 보일 뿐, 칼날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허공에 동화되기라도 한 것처럼.
이윽고 인근의 무법자들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 번개같이 휘둘러진 칼자루는 또다시 네 명의 목을 절단했다. 개중에는 목까지 덮는 상하 일체형의 두꺼운 갑옷을 입은 무법자도 있었으나, 보이지 않는 칼날은 마치 두부라도 자르는 것처럼 가볍게 베어 들어가 목을 잘라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기행. 깜짝 놀란 무법자 한 명이 후다닥 물러나더니 황급히 지팡이를 들어 주문을 외우려는 폼을 잡았다. 그러나 그 순간, 사내의 몸이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움직였다. 이어서 살짝 벌어진 무법자의 입안으로 물 흐르듯 부드러이 칼자루를 박아 넣는다.
끽 소리도 지르지 못한 무법자가 쓰러졌다. 그러나 사내의 걸음은 칼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 처음 횡으로 칼을 긋고 시체를 밟고 건너올 때부터 사내의 칼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내 칼자루를 한 번 고쳐 잡고서는 앞으로 걸어가며 좌우로 칼을 떨쳤다. 그러자 빛이 두어 번 번쩍이는 동시, 도처에 서 있던 무법자들의 목이 수수깡이라도 된 것 마냥 뚝뚝 부러지며 떨어진다.
이건 더 이상 전투가 아니었다. 그냥 일방적인 학살이다.
물론 김수현의 기습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했다. 처음 뇌신으로 벼락을 떨어트려 혼란을 일으키고, 공찬호의 난입과 선유운의 저격으로 시선을 끌었다. 이어서 비비앙의 군단이 기습적으로 들이닥쳐 혼란을 가중시킨 후, 남은 근접 계열이 사방에서 달려와 상황을 정리한다.
허나 차라리 무법자가 아닌 부랑자였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하다못해 2년 전 북 대륙으로 쳐들어왔던 시몬 휘하 정예 무법자였더라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실력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진을 구성해 나름 반항이라도 했을 터.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근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강철 산맥 공략을 바라보고 착실히 실력을 쌓아온 북 대륙과, 그저 욕망에 이끌려 살아온 서 대륙의 차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 차이가 바로 이 전투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으, 으아아아아악! 씨발! 조져어어!”
그래도 곱게 죽기는 싫었는지 한 무법자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근처에 서 있던 무법자들은 멍하니 서 있다가 아차 한 표정을 짓고는, 앞서 달려나가는 무법자를 따라 우르르 움직였다.
수는 약 서른 가까이 될까. 어떠한 전술적 의미를 둔 행동이 아니었다. 그냥 서 대륙에서 구역 다툼을 할 때 의례 했던, 패싸움에서 발로한 버릇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이대로 죽기 싫다는 의지가 깔려 있었지만.
문제는, 하필 달려들어도 김수현에게 달려들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무법자들을 보며 김수현은 가는 숨을 흘렸다. 갑자기 칼자루를 쥔 오른손을 내리더니 남은 한 손으로 귀걸이를 내렸다. 곧 왼손에서 하얀 빛이 흘러나오며 아름다운 칼이 생성됐다. 빅토리아의 영광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무법자들. 각기 무기를 꼬나 쥔 채 달려오는 모습을 보며 김수현은 느릿하게 왼손을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칼끝이 무법자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빅토리아의 영광이 눈부실 정도의 희멀건 빛을 토해냈다.
차르르르르르르릉!
눈 한 번 깜짝할 새, 칼에서 뿜어져 나온 수십 개의 빛무리가 무법자들을 해일처럼 덮치며 휩쓸었다.
그리고.
푸확!
“아아아악!”
“끄라라락!”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무법자들이 커다란 비명을 질렀다. 그냥 번쩍이는 빛무리가 한바탕 헤집었을 뿐이다. 그런데 빛에 휩싸인 무법자의 사지가 서걱서걱 잘려나가고, 목이 절반으로 크게 갈라지며 핏물을 울컥 뿜었다. 그러다 종래에는, 무려 서른의 무법자가 바람에 흩날리는 볏짚처럼 한꺼번에 우수수 쓰러진다. 빅토리아의 영광에 잠재된 능력, ‘검 빛’이 발동된 것이다.
“맙…. 소사….”
일련의 전투, 아니 학살을 지켜본 사라가 두 눈을 치뜨며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까부터 사라의 눈은 김수현에게 고정돼 있었다. 그런데 직접 보고서도 믿어지지 가 않는 것이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눈 한 번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서른의 무법자가 동시에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간신히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칼의 발광(發光)에 이어 쏘아진 빛이 무법자들 사이로 스며들어 갔다는 것뿐이었다.
“흠….”
허나 정작 당사자인 김수현은, 무심한 눈으로 주변을 가볍게 훑고는 천천히 왼팔을 내렸다. 그리고 또 어딘가로 차분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전투 한복판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걸음걸이는 침착하고 느긋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보면 따분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문득 망연히 바라보던 사라의 머릿속으로 한 생각이 스쳤다.
“이게…. 북 대륙 사용자…?”
사라도 들어본 적은 있다. 그러니까 2년 전, 서 대륙의 절반을 통일한 시몬이 전력을 이끌고 자신만만하게 북 대륙으로 쳐들어갔다가, 그야말로 개 박살이 난 사건을 말이다.
전쟁 이후 서 대륙은 북 대륙에 모종의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도 서 대륙은 무법 지대였고, 그 누구도 군림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런 서 대륙을 처음으로 통치할뻔한 무법자가 바로 시몬이었는데, 북 대륙이 보란 듯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시몬의 군대를 살해한 것이다.
한 번쯤 궁금하기는 했다.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랐길래 불패의 신화를 이룩하던 시몬을 깨트릴 수 있었는지.
그런데 직접 보니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서 대륙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전투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북풍한설과도 같은 차가운 기운을 흘리는 여인이, 온몸에 빛나는 기운을 두른 채 무법자들을 매섭게 유린한다. 흡사 섬광과도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여인이 신묘하게 창을 놀리자, 구멍 뚫린 시체가 차근차근 쌓이기 시작한다. 도망치는 무법자들의 그림자가 꿈틀꿈틀 움직이더니 솟구치듯이 올라와 목을 꺾어버린다.
그렇게 학살은 계속됐다. 이제는 누가 무법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크흐흐흣….”
그렇게 생각한 찰나, 바로 옆에서 음침한 웃음이 흘러들었다. 사라는 언뜻 고개를 돌렸다가 급히 숨을 삼켰다. 언제 다가왔는지, 불길한 기운을 뭉클뭉클 흘리는 거한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것도 창을 하늘 높이 치켜든 채로.
“아….”
흡사 짐승과도 같은 시뻘건 눈동자와 마주하자 사라는 입은 물론, 온몸이 딱딱히 굳는 감각을 느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 싶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죽는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준비 시간도 없었다. 얼른 처리하고 다른 데로 가고 싶은지 창은 급하게도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법사로서는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일격. 정수리가 아릿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사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우웅!
터엉!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주변을 왕왕 울렸다.
이윽고 살그머니 눈을 뜬 사라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된 걸까.
눈앞에 붉은 막이 덮인 칼이 수평으로 세워져 있다. 쪼갤 듯이 내려오던 창은, 칼에 흐르는 붉은색 장막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단 사라뿐만이 아니라, 창을 내리친 공찬호도 막아낸 김수현도 놀란 기색을 보였다.
공찬호가 창을 거두며 한 발짝 물러났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자 김수현도 칼을 거뒀다. 그리고 차분히 표정을 가다듬은 후, 눌러쓴 후드를 젖혀 얼굴을 드러냈다.
“얘는 아니야.”
“…아니라고?”
“그래. 무법자만 죽여. 무법자만. 괜히 엄한 사용자 죽이지 말고.”
“이년이 무법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지?”
공찬호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김수현은 피식 웃더니 아예 로브를 벗어 땅으로 떨어트렸다.
사라는 흠칫 다리를 오므렸다. 흘러내린 로브가 자신의 하반신을 가려주자,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까 조프리에게 찢긴 이후, 여태껏 사라의 하체는 계속해서 알몸인 채로 노출돼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입안에 강제로 넣어진 속옷도 그대로였다.
사라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속옷을 뱉은 후 웩웩거리며 속을 게워냈다. 하도 놀라운 광경을 보다 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침에 젖은 속옷과 연거푸 헛구역질을 하는 사라를 봤는지 공찬호가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자신의 일격을 막아낸 붉은 장막이 흐르는 검을 흘끗 응시했다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어느덧 숲의 비명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무어라 후기를 쓸까 고민하다가….
_(__)_
그냥 넙죽 하기로 했습니다.
항상 사랑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