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12
00711 14 Vs 1000. =========================================================================
사아아아.
가벼운 바람이 숲에 불었다. 역한 피비린내가 콧속으로 물씬 흘러 들어온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완연히 솟아오른 해는 칠흑의 숲을 밝게 비추었다. 대충 칼을 털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핏물과 살점으로 흠뻑 적셔진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시체가 사방에 널렸다. 무수한 핏물은 흐르고 흘러 아예 피 웅덩이가 고였을 정도였다.
둘러보다 보면 가끔 과한(?) 시체가 종종 눈에 밟혔다. 벼락에 시커멓게 그슬린 시체는 차라리 양반이다. 비비앙의 마수 군단이 휩쓸고 간 자리나 공찬호가 날뛴 자리는 나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마수 군단에 뜯어 먹힌 시체는 다진 고기를 보는 듯했고, 공찬호에게 당한 시체는 꼭 어디 한두 군데가 심하게 터져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일만한 강자가 있다면 또 모를까. 나야 애초 이 전투에 큰 감흥이 없다손 쳐도, 둘은 마치 누가 누가 더 잔인하게 죽이나 내기라도 한 것 같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일대 한복판에 털썩 주저앉은 공찬호가 보였다. 오른손에 수라마창을 부여잡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왠지 공찬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사실 아까 공찬호의 일격을 막을 때 정면으로 막으려는 게 아닌 최대한 비스듬히 흘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게헨나의 보호 요새가 전개되더니 칼에 붉은 장막이 덧씌워지며 공찬호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말인즉 게헨나의 보호 요새를 갖고 있는 이상, 내 몸뿐만이 아닌 들고 있는 물건을 통해서도 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건 나조차도 모르고 있던 새로운 발견이었지만,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게헨나의 말마따나, 그 한 방을 막은 것치고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소비됐으니까.
아무튼, 저번처럼 공격 한 번 막혔다고 난리는 치지 않으니 보기는 좋다. 저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동안 공찬호의 내면이 어느 정도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시체가 952구…. 살아남은 사용자는 431명….”
문득 들려오는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 음성의 주인공은 형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일대를 서너 번 둘러보는가 싶더니 인원을 계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윽고 내게 다가온 형은 엄지로 자신의 어깨너머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얼마나 왔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칠흑의 숲으로 들어온 무법자는 모두 처리한 것 같아. 그리고 사용자 피해는 정확히 47명. 우리가 오기 전에 무법자가 죽였나 보더군.”
“혹시 우리가 실수한 건?”
“없는 것 같아. 다행히 잘 골라 죽였다는 소리겠지.”
“흠….”
형은 여전히 어깨 너머를 가리키고 있었다. 건너편에는 우리가 구해낸 서 대륙 사용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고, 안현과 신재룡이 사이사이 돌아다니는 게 부상자를 살피는 듯싶었다. 가끔 곁눈을 보이는 눈동자는 살았다는 안도와 뜻 모를 공포를 언뜻 비췄다.
“고생했어. 이제 도시까지 무사히 데려가면 의뢰는 끝나겠네.”
어차피 의뢰 이상으로 의미를 두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전원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거의 구출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남은 일은 가까운 도시까지 같이 가주고, 차후 보상을 받으면 된다. 섭섭지 않게 주겠다고 했으니 보상이 정해지면 아마 거주민 전령으로 호출을 보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두어 번 가볍게 박수를 쳤다.
“자. 그럼…. 응?”
이제 슬슬 돌아가자고 말하려는 찰나, 문득 안현이 웬 여인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아까 내가 로브를 덮어준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로브로 하체를 둘둘 감아 질끈 묶고 있었으니까.
두 명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잠시만. 서 대륙 사용자와 이야기를 했다고? 안현이?
이윽고 안현과 같이 다가온 여인은 나를 보며 부드러이 웃고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먼지가 잔뜩 쌓이기는 했으나 빛을 잃지 않은 금발이 흘러내리고, 희고 고운 사슴 같은 목덜미가 언뜻 눈에 들어온다.
조금이지만, 방금 웃음을 보고 놀랐다. 여인은 다른 서 대륙 사용자처럼 마냥 불안해하지 않고 차분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여인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자 중천에 떠오른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얼굴이 드러났다. 밝은 금빛으로 빛나는 풍성한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S자 웨이브를 그리며 어깨 아래까지 자연스레 흘러내렸다. 거기다 백인 특유의 육감적인 몸매와 흰 살결을 배경으로 두자 왠지 모르게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자아냈다.
이윽고 지혜롭고 영리해 보이는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안녕하세요. 나는 사라 제인입니다. 우선 우리 구해서 감사합니다.”
이어서 들려오는 약간은 어색한 우리말.
괜스레 흥미가 돋아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1. 이름(Name) : 사라 제인Sarah Jane(4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마법사(Normal, Mage,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서 대륙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털빛이 흰 말 • 미국
6. 성별(Sex) : 여성(22)
7. 신장 • 체중 : 174.2cm • 57.8kg
8. 성향 : 선 • 총명(Good • Brightness)
1. 강화된 메모라이즈(Rank : EX)
1. 정통 마법(Rank : A Plus Plus Plus)
2. 마력 회로 응용(Rank : B Plus)
3. 질속 영창(Rank : A Zero)
4. –
1. 정하연 : Total 328 포인트.(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 포인트입니다.)
[근력 36] [내구 40] [민첩 42] [체력 35] [마력 94(+1)] [행운 81]
2. 사라 제인Sarah Jane : Total 369 포인트.(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 포인트입니다.)
[근력 45] [내구 46] [민첩 48] [체력 52] [마력 92] [행운 86]
사용자 정보를 읽은 순간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라 제인은 사용자 정보는 그야말로 마법사의 정석이었다. 능력치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아직 잠재 능력 슬롯 하나를 개화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 정도의 사용자가 개화하지 못했을 리는 없을 테고, 아마 모종의 목적을 갖고 일부러 개화하지 않은 듯싶다. 그냥 떨거지들만 있을 거라는 인식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반갑습니다. 김수현입니다. 한국어를 할 줄 압니까?”
“네. 저. 한국 알고 좋아합니다. 대학 다닐 때 혼자 열심히 했습니다.”
가볍게 손을 내밀면서 말하자, 사라 제인은 조심스레 내 손을 맞잡았다.
“우와~. 신기하다.”
그 순간이었다. 또 어디서 보고 있었는지, 안솔이 탄성을 지르며 냉큼 달려와 끼어들었다. 그리고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더니 호들갑스레 입을 열었다.
“헤이 헤이! 두 유 노우 김치?”
야 인마.
상당히 뜬금없는, 어찌 보면 실례일 수도 있는 질문. 그러나 사라 제인은 곧 표정을 추스르며 포근히 웃었다.
“아. 알고 있습니다. 나 김치 좋아합니다.”
“우와아아~. 그럼 두 유 노우 불고기?”
“네. 그거 정말 맛있습니다. 아주 잘 먹습니다.”
“오오오오! 그럼 두 유 노우 백ㅁ…. 악!”
나는 얼른 주먹을 휘둘러 옆에서 불쑥 끼어든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게 무슨 소리를 하려고.
“혀, 형…. 아, 아프잖아요….”
안현은 정수리를 부여잡고는 억울하다는 눈초리를 보냈지만, 한 번 험하게 바라보자 머리를 수그리며 걸음을 물렸다. 하여간 이것들은 오래간만에 전투 한 번 잘해놓고, 또 시작이다.
“…킥.”
사라 제인은 잠깐 멍한 눈으로 둘러보다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화끈한 감각이 올라오는 걸 느끼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구조대입니다. 천사의 의뢰를 받아 당신들을 구출하러 왔습니다.”
“천사?”
“도우미라고도 하지요.”
“아. 그 말을 압니다. 짚인 게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짚이는 게 있습니다 정도로 해석하면 되려나?
그 순간 문득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혹시 우리와 만나기 전, 다른 북 대륙 사용자와 만난 적이 있습니까?”
“응? 아니. 없습니다.”
갑자기 맹아라 생각이 나서 물어본 건데, 사라 제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서 대륙 이주 사건과 북 대륙 수호자 실종 사건은 서로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였다.
“그렇군요.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럼 이대로 도시까지 데려다 드리도록 하죠.”
“아.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의뢰니까요.”
“형. 그러면 도시로 데려다 준 다음에는 어떡하실 거예요?”
여기서도 빠지기 싫었는지 또다시 안현이라는 감초가 끼어들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글쎄. 일단 신전, 아니 소환의 방으로 가야겠지. 천사가 의뢰했으니까.”
“오….”
에둘러 말하자 안현이 알겠다는 듯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였다.
알기는 뭘 알아. 그 후까지 책임져줄 수는 없다는 말을 돌려서 말한 건데.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 일에 의뢰 이상으로 의미를 둘 생각은 없다. 거기다 왜 이 사용자들이 북 대륙으로 왔는지도 모르겠고.
애초 2년 전 대륙 전쟁이 있고 나서, 북 대륙은 서 대륙에 관한 인식이 굉장히 좋지 않다. 물론 서 대륙도 사용자와 무법자가 있겠지만, 딱히 그걸 구별해서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백마 열풍…. 그러니까 포로의 마력 회로를 파괴하고 노예로 판매한 이후, 북 대륙 내 서 대륙 사용자의 현실은 거주민보다 못한 위치에 있다. 우리가 그것까지 책임져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이 사라라는 사용자는….’
나는 흘끗 정면을 응시했다. 안 그래도 조만간 클랜원을 대거 충원할 계획인데 눈앞에 괜찮은 인재가 하나 떨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돌아가면서 은근슬쩍 권유해보고 싶지만…. 아무래도 이 사용자가 도망자 무리의 책임자 같아서 말이지. 잘못하면 수백 명의 애물단지를 껴안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사양하고 싶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리 말씀 드리지만, 도시에 도착해서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2년 전 사건 이후, 북 대륙은 서 대륙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음…. 네.”
“괜한 시비는 물론, 그 이상의 일까지 당할 수도 있습니다.”
“견딜 생각으로, 각오합니다. 경고 감사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왔는지 사라 제인은 결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왠지 점점 더 이 사용자가 마음에 드는걸 느꼈다. 도와달라고 무작정 달라붙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의지가 강한 여인인 듯싶다.
“좋군요. 그래도 정 견디기 힘드시면, 아틀란타라는 도시에 머셔너리 클랜을 찾아주세요.”
“아틀란타? 머셔너리?”
“아틀란타는 북 대륙 내 도시 이름이고, 머셔너리는 제가 클랜 로드로 있는 클랜입니다.”
“아.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단체는 몰라도, 몇 명 정도는 보호할 힘은 갖고 있습니다.”
“……!”
그 순간 사라 제인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나는 이렇게 여지를 두기로 했다.
꽤 똑똑해 보이기도 하고, 바보가 아닌 이상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을 것이다. 아마 십중팔구 북 대륙에서의 활동은 힘들 것이다. 그래도 너 하나쯤은 얼마든지 보호해줄 수 있으니, 생각 있으면 오라는 소리였다. 굳이 ‘몇 명’이라 말한 것은 너와 비슷한 수준의 동료가 있으면 데리고 오라는 뜻이고.
잠시 후.
사라 제인이 살그머니 고개를 끄덕이는걸 확인한 후,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4시간 정도면 도시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럼 이만 출발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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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출 파트 끝입니다.
코멘트를 보니 감이 좋으신 분들이 몇 분 보이시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