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14
00713 심하게 모난 돌은 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있다. 문을 닫고, 라이트 스톤을 끄고, 커튼을 친 방에는 한 점의 빛도 스며들지 않았다. 흘끗 테라스 밖을 쳐다보자 완연한 어둠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시끄럽던 도시가 잠잠해졌고, 거리에 설치된 마법 전등이 신비로운 빛을 밝혔다.
문득, 나도 모르게 몸을 반쯤 일으키고 있었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 도시의 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억지로 엉덩이를 앉혔다. 왠지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긴 한숨을 흘리고 시선을 내리자 책상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4장의 기록이 눈에 들어온다.
‘클랜 로드는….’
‘왜 갈등을 억누르고, 경쟁을 없애셨죠?’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제갈 해솔은 한 번 천천히 생각해보라며 바람처럼 사라졌지만, 이후 몇 시간 내내 생각만 거듭하고 있다.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한 채.
기실 이렇게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질문의 해답은 이미 알고 있다. 내가 갈등과 경쟁을 없앤 이유는, 딱히 깊은 의미나 거창한 의도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편하니까.
갈등이나 과도한 경쟁은 클랜을 병들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하나 돼 소수 정예로 움직인다.
이러한 명분 아래 강하게 억누르기는 했지만, 내심 꼭 그렇게 생각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갈등이 깊어질수록 경쟁이 심화할수록 내가 원하는 대로 클랜을 이끌어나가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좋은 말로 해서 이끌어나가는 것이고, 탁 까놓고 말하면 조종이다.
그래. 나는 머셔너리가 무조건 내 뜻 아래서 움직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갈등이나 과도한 경쟁의 낌새가 보이는 족족 직접 나서서 사라지게 했다.
확실히 성과는 있었다. 개개인의 속마음까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내가 있을 때는 모두가 웃으면서 같이 움직였다.
그러나 반대로 잃은 것도 있다. 표면적으로 갈등이 사라지자 자연스레 경쟁도 사그라졌다. 언젠가부터 안주하는 클랜원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개인이 해결하기 힘든 일이 나오면 클랜에 기대고, 클랜이 해결하기 힘든 일이 나오면 나한테 기댔다.
매한가지로, 나도 거의 모든 일을 앞장서서 해결했다. 그리하여 현재의 머셔너리가 탄생한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시크릿, 레어 클래스가 흐드러지게 많은 소수 정예 클랜. 그러나 실체는 김수현이라는 사용자가 없어지면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사상누각의 클랜. 이게 바로 머셔너리의 현주소였다.
‘이번 강철 산맥 공략을 보면서 참 느낀 게 많아요. 명성에 비해 활약이 걸맞지 않는다고나 할까….’
‘아. 물론 전투는 잘했어요. 확실히 일반 전투에서는 발군의 위력을 발휘했죠. 그건 인정해요.’
‘그런데 그런 전투 말고. 정말 위기 상황일 때는…. 클랜원들이 한 게 있나요?’
‘구덩이 괴물을 상대할 때도, 각성한 거인 제왕을 상대할 때도. 그러니까 제 말은 클랜 로드가 없었어도 그 상황을 정리할만한 사용자가 있었느냐. 이 소리에요.’
제갈 해솔이 남기고 간 말이 하나하나 반박할 수 없는 비수가 돼 돌아온다. 살이 강하게 꼬집히는 기분이다.
“흠….”
또 한 번 긴 한숨을 흘리면서 책상에 놓인 기록을 흐트러트렸다. 그러자 4번째 장 클랜원들을 등급별로 평가한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사실 한두 명만 제외하면 상당히 정확하게 구분해놓기는 했다. 허나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가시지를 않는다. 나는 한참 동안 기록을 빤히 응시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클랜 로드의 계획은 좋아요. 그런데 머셔너리는 그동안 맞지 않는 옷을 너무 오랫동안 입었어요.’
‘이대로라면 머셔너리 클랜은 영영 발전하지 못해요.’
결국, 나는 깃펜을 잡았다. 그리고 우선 안솔과 이유정의 등급에 V자 체크로 표시한 후, 한 명 한 명 신중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고연주는 S…. 신재룡은 A….’
*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아침 식사가 끝난 후, 나는 바로 모든 전투 사용자를 1층 회의장으로 호출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이상 더 이상 망설일 생각은 없다. 예고 없는 회의였으나 심할 때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회의한 적도 있었다. 클랜원들은 별 의심 없는(?) 낯으로 회의장에 속속히 모였다.
그렇게 시작된 회의는 처음에는 언제나와 같이 흘러갔다. 클랜원 충원에 관해 종종 말을 꺼낸 적이 있는 터라, 서론으로 클랜의 변화 및 재편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자 모두가 동의하는 빛을 보였다. 그리고 변화의 첫걸음으로 ‘클랜원 등급제’에 관한 말을 꺼냈을 때만 해도, 클랜원들은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모두 수능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 겁니다. 시험을 치르면 점수가 나오고, 그 점수에 따라 각 수험생의 등급이 구분되죠. 1등급부터 9등급까지.”
조용한 건, 딱 거기까지였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EX 등급부터 F 등급까지. 말인즉, 이 등급이 클랜 내 개인이 가지는 권한을 나타내주는 척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계획의 상세한 내용을 발표한 순간, 장내는 삽시간에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 어지러운 어수선함이 회의장을 휩쓸었다. 나는 두어 번 책상을 강하게 쳤다.
“조용조용!”
그러자 곧바로 조용해지기는 했으나 소란의 여파는 가시지 않았다. 황당하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초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심지어 제갈 해솔도 놀란 토끼 눈을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눈을 마주친 순간 킥 웃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리 나지 않는 박수를 보내면서.
“궁금한 게 많을 거라 생각됩니다. 한 명씩 질문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오른쪽 열에서 번쩍 손이 올라오더니 누군가가 곧장 몸을 일으켰다. 조승우였다.
“클랜 로드. 이, 이 계획은…. 저는 이 계획의 목적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목적이요? 제가 서론 때 확실하게 밝혔는데요. 더 나은 클랜으로 발돋움하기 위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러니까요. 변화는 좋습니다. 좋은데요. 그런데 왜 이런 방향으로 생각하셨는지…. 솔직히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하나도 갑작스러우실 거 없습니다. 그동안 말은 안 하고 있었는데, 제가 사라졌을 때 우리 머셔너리가 어땠는지를 듣고, 그때부터 쭉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클랜원들이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 방금 말은 거짓말이었다. 제갈 해솔이 아니었다면 이 계획은 발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나 내가 굳이 거짓말을 한 이유는 여기 있는 모두에게 그때의 일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문제는 우리 머셔너리가 몇 년 동안 쭉 지적 받아온 사안입니다. 그리고 아틀란타 공략 후 사실로 드러나기도 했고요. 그때 외부에서 흔들었다는 점을 참작하고서라도, 저는 더 이상 이 문제를 좌시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리고 미리 말씀 드리는데, 변화는 이 계획만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차후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될 때까지, 지속해서 근본적인 변화를 꾀할 생각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첫걸음에 불과합니다.”
“…….”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조승우는 눈동자를 빙그르르 돌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클랜 로드. 질문이 있어요.”
이번에는 정하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아까 등급이 클랜 내 개인이 가지는 권한을 나타내주는 척도라고 하셨잖아요.”
나는 그렇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그 권한의 정확한 범위를 알고 싶어요.”
말을 하는 정하연의 눈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스쳤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간단합니다. 권한이란, 우리 머셔너리를 기반으로 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합니다.”
사실상 등급제 계획의 모든 내용을 요약한 말이었다.
“모든…. 활동?”
그러나 너무 많이 축약했는지 정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부연 설명이 필요할 듯싶었다.
더 강하게,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예를 들어드리죠. 여태껏 성과를 발견하면 서로 정답게 논의하면서 하나씩 나눴죠? 이제는 그러지 않습니다. 설령 클래스에 맞든 아니든 간에, 등급이 높은 클랜원이 무조건 우선권을 가질 겁니다. 회의에서의 발언권. 이것도 똑같아요. 더 이상 동등하지 않을 겁니다. 등급이 높을수록 더욱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게 됩니다. 사소한 거 하나까지, 모두 등급으로 평가하고 운영합니다.”
나는, 마침내 저지르고 말았다.
더 열심히 활동한 클랜원이 더욱 대우받는다.
여태껏 자유 용병이라는 미명 하 이어져온 안주를 철폐하고, 경쟁의 완전 개방을 선언한 것이다.
정하연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더니 숨을 길게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 미묘한 표정이었다.
“…대신이라고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여러분에게 약속하겠습니다.”
차분히 덧붙이면서 좌중을 둘러보자, 멍한 빛을 띠고 있는 클랜원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어느새 회의장은 처음처럼 조용해졌다. 가끔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올 뿐, 그 누구도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입을 열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과연 이 계획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일지 걱정이 앞섰지만, 여기서 그만둘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미 물은 엎질렀으니까.
“클랜 로드와 친하다고 해서, 초창기 멤버라는 점을 들먹이면서 거드름 피운다? 앞으로 그런 거 없습니다. 무조건, 오롯하게 등급으로 개인의 영향력이 결정됩니다.”
그 순간 김한별을 비롯한 서너 명의 클랜원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와는 반대로 안현, 안솔, 이유정은 몸을 흠칫 움츠렸다. 그래.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안현이나 안솔은 몰라도 이유정은 살짝 찔리는 게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나는 왼쪽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클랜에서 오랫동안 교류한 클랜원끼리 모임을 결성하고, 은근하게 강력한 입김을 행사한다? 그런 거도 없습니다. B 등급 10명이 모여봤자 1명의 A 등급보다 아래입니다.”
그러자 정하연, 고연주, 임한나, 남다은 순으로 차례대로 찔끔하는 기색이 스친다. 강철 산맥에서 3 지역 지원 건으로 클랜원들을 설득할 때 눈여겨보았는데, 확실히 모임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런데 저기는 S 등급만 2명에 A 등급도 1명인데.’
…뭐, 나 말고 EX 등급이 한 명 더 있으니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만일 저 4명이 이 계획을 악용한다면 그때는 내가 직접 나설 것이다. 설령 4명 모두가 내 여인이라도.
아무튼, 추가 질문이 나오지 않는다. 슬슬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품속에 고이 접어둔 기록을 꺼냈다. 클랜원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내 품에서 기록을 따라 이동한다.
“이 기록에는 제가 고심해서 평가한 여러분의 등급이 적혀 있습니다.”
나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기록을 조금 높이 들어 올렸다.
“우선은 사용자 정보를 기준으로 잡기는 했지만, 등급 결정이 클래스, 능력, 능력치에만 국한되지는 않아요. 여러분이 처리하는 업무 기록 한 장부터 한 소절의 주문까지. 모조리 실적으로 반영돼 한 달 기준으로 갱신됩니다.”
당연하지만 한 번 결정된 등급은 영원하지 않다. 한 달을 기준으로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올라갈 수 있고, 또 나태하게 지낸다면 하락할 것이다.
나는 한 번 더 회의장을 둘러본 후, 고연주를 향해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고연주는 조심스레 일어나 내가 앉은 권좌로 다가왔다. 나는 바로 기록을 넘겨주었다.
“회의가 끝나면 여기 적힌 내용대로 1층 홀에 게시하세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아니. 지금 바로.”
어차피 곧 회의를 끝낼 생각이라 말을 정정했다. 고연주는 공손하게 기록을 받아 들고는 곧장 몸을 돌려 입구로 걸어갔다. 그러자 클랜원들의 시선이 점차 멀어져 가는 고연주의 등을 애타게 쫓는다.
가끔 눈에 보이는, 꼴깍꼴깍 움직이는 목울대가 현재 클랜원들의 심정을 알려준다. 아마 시험이 끝나고 성적표를 받기 직전 학생의 심정이지 않을까.
이윽고 고연주가 입구를 나가 완전히 사라졌을 즈음.
“그럼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권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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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랜원 등급제는 0년 차, 1년 차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즉 제갈 해솔이나 차희영은 제외된다는 뜻이에요. 2년 차가 되는 순간부터 등급제가 적용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