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15
00714 심하게 모난 돌은 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갑자기 클랜원 등급제라니….”
“변화하겠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건 너무….”
웅성웅성.
성 내부. 1층 광장과 회의장을 잇는 긴 회랑은 여느 때보다 소란스러웠다.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는 이들은 모두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회의가 끝났음에도 바로 돌아가지 않고 광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클랜원 등급’이 적힌 기록을 건네 받은 고연주가 게시가 끝나기 전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내심 그렇게 한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회랑에 서 있는 대다수는 하나같이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방금 회의에서 들었던 말들이 자꾸만 떠오르고 있었다.
자유라는 이름 아래 이어져 온 안주를 깨트리고 경쟁의 완전 개방을 선언한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무척이나 컸다. 사용자 정보 즉 ‘실력’보다는, 활동으로 쌓을 수 있는 ‘실적’을 중요시하겠다는 뜻이다.
실력 높은 사용자가 유리한 건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사용자 정보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지 못한다.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사용자라도, 어느 분야에서 어떻게 활동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높은 등급으로 올라갈 수 있다.
아무튼,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 더 이상 서로 웃으며 정답게 지내는 시절은 지났다. 실적을 쌓을 수 있는 일은 한정돼 있으니까. 아니. 앞으로 새로운 클랜원이 가입할수록 할 일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끼이이익.
그때였다. 근 30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개방되기 시작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클랜원들이 득달같이 시선을 돌렸다. 이내 좌우로 서서히 벌어지는 문 사이로 고연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 겨우 다 적었네. 이제 들어들 오세요.”
그 순간 가장 앞에 서 있던 클랜원들부터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어찌나 급하게 달려가는지 일부 성질 급한 클랜원은 머뭇머뭇 걸어가는 이를 세게 밀치고 가기까지 했다.
“꺅! 어, 언니!”
발라당 나동그라진 안솔이 억울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유정은 무시한 채 계속 앞으로 달렸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광장 중앙을 지나 게시판이 있는 장소까지 도착했다.
『구분 등급』
『순번 이름(연차)』
게시판 상단에 적힌 글자를 확인하자 목울대가 작달막한 고저를 그렸다. 수능 성적표를 받을 때보다 더한 긴장감이 샘솟는다.
이유정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추스르며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EX 등급』
1. 김수현(3년 차)
2. 안솔(3년 차)
그리고 가장 높은 EX 등급을 확인한 순간, 일말의 기대감이 감돌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주변에서도 숨을 크게 들이키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아마 모두가 공통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왜 안솔이 EX 등급?’
김수현이 EX 등급이라는 건 이견을 제시할 거리가 없다. 클랜 로드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이제껏 김수현이 쌓아온 실적은 그야말로 독보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안솔이 EX 등급을 받았다는 건 머리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물론 시크릿 클래스이기도 하거니와 ‘기적’은 확실히 엄청난 능력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좀….
한창 생각을 이어가던 이유정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리고 우선 안솔의 등급은 젖혀두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등급이니까.
아래에는 S 등급으로 책정된 클랜원들의 이름이 있었다.
『S 등급』
1. 고연주(8년 차)
2. 남다은(7년 차)
3.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4. 선유운(3년 차)
5. 허준영(7년 차)
그림자 여왕, 검후, 키메라 연금술사, 신궁, 침묵의 집행자. 어디를 가도 알아주는 머셔너리 클랜의 최고 정예 사용자들이다. 오히려 고연주는 왜 EX 등급이 아닌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허준영은 잘은 모르지만 비밀리에 치러진 차소림과의 대련에서 판정으로 이겼다는 말을 언뜻 들은 것 같다.
어쨌든 그래도 양심이 있지. S 등급은 애초 꿈도 꾸지 않았다. 이유정은 납득하고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A 등급』
1. 신재룡(7년 차)
2. 정하연(5년 차)
3. 차소림(6년 차)
이윽고 A 등급 명단을 확인한 순간 이유정은 기대가 살짝 꺾이는걸 느꼈다. 그래도 스스로 A 등급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3명이 A 등급 명단에 오를만하고 생각보다 수가 적다는데 위안을 받았다.
‘에이 씨. 결국에는 B 등급이네.’
아직 보지는 않았으나 이유정은 벌써부터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머셔너리 클랜을 창설하기 전부터 활동했고, 나름 레어 클래스 사용자인데. 아무리 못해도 B 등급은 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B 등급』
1. 김한별(3년 차)
2. 백한결(2년 차)
3. 안현(3년 차)
4. 임한나(5년 차)
5. 조승우(5년 차)
6. 진수현(2년 차)
B 등급 명단에는 기대한 이름이 없었다. 분명히 익숙한 이름은 많이 보이는데 ‘이유정’이라는 세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한순간 망연한 빛이 낯을 지나쳤다.
“…….”
눈을 깜빡였다.
또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것도 모자라 세게 비비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전히 B 등급에 이유정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랬다.
『C 등급』
1. 우정민(3년 차)
2. 사샤 펠릭스(-)
3. 이유정(3년 차)
이유정은 C 등급 명단 끄트머리에 포함돼 있었다.
『D 등급』
1. 김동석(5년 차)
2. 박다솜(4년 차)
3. 박현우(7년 차)
4. 원혜수(3년 차)
5. …….
『E 등급』
1. 강채린(4년 차)
2. 구예지(3년 차)
3. 백승훈(4년 차)
4. …….
『F 등급』
1. 표혜미(2년 차)
…….
* 등급은 0, 1년 차를 포함하지 않는다.
아래에는 D, E, F 등급 명단이 있었으나 빠르게 지나쳤다. 추신까지 다다른 시선은 신속하게 도로 올라가 B 등급과 C 등급에 고정됐다. 이내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번지는 동시, 게시판 인근에서 가벼운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클랜원이 자신의 등급 확인을 끝마친 것이다.
“우와…. 우와아아….”
안솔은 멍한 탄성만 지르고 있었다. 두 눈은 아까부터 EX 등급 명단에 푹 꽂혀 있다. 스스로 봐도 믿기 지가 않는다. 그래도 설마 설마 했는데 김수현과 동일 선상에 놓일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S 등급이라…. 흥. 나름 괜찮네.”
겉으로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코웃음 치기는 했지만, 비비앙은 대단히 만족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수능인지 시험인지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높은 등급을 받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비비앙은 살랑살랑 걸어가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안솔을 툭 건드렸다.
“그나저나 안솔 너 대단한데? 김수현과 같은 등급이라니!”
안솔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가 방실방실 웃었다.
“아, 아이. 몰라요. 저도 믿기지가 않는다는 말이에요.”
“조심해. 내가 곧 너를 떨어트리고 EX 등급으로 올라갈 거니까.”
“에헤헤헤. 이히히히.”
“우효효효효효효효.”
그리도 좋은 걸까. 서로 치근덕거리던 두 명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헤….”
“효….”
그리고 동시에 웃음을 멈췄다. 안솔도 비비앙도 느낀 것이다. 주변을 둘러싼 기운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예전과는 다르다. 축하한다는 말은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아니. 축하는커녕 이상한 눈으로 두 명을 바라본다. 확실한 건 절대로 고운 눈초리는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괜스레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안솔이 살그머니 눈을 내리깔고 비비앙의 미소가 시들해질 즈음.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왜 D 등급…!”
“이해가 안 가네요. 왜 안솔이 EX….”
결국 어디선가 불만이 터지려는 찰나, 갑자기 말이 끊어졌다.
벌컥 소리치려던 김동석과 박다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 순간 두 명의 앞으로 단검이 하나씩 날아와 박혔기 때문이다. 바닥에 꽂힌 단검은 함부로 입을 여는 걸 허용치 않겠다는 듯 파르스름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불만 있으면 올라가서 직접 얘기해요.”
정면 방향으로 고연주가 물끄러미 두 명을 응시하고 있었다. 양 손목을 절반으로 꺾은, 단검을 던진 자세 그대로 해서.
“괜히 엄한 애 건드리지 마시고. 응?”
고연주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말했다. 비단 김동석 박다솜 두 명만이 아닌, 여기 있는 모두를 대상으로 한 경고였다.
감히 누가 고연주의 명을 거역할 수 있으랴.
김동석은 얌전히 입을 닫았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붉으락푸르락해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일부는 여전히 게시판을 확인하고 있었지만, 조용히 눈치를 살피던 네댓 명의 클랜원은 이내 김동석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허. 사용자 김동석은 저렇게 화낼 입장은 아니지 않나. 그리고 가봤자 좋은 소리는 전혀 듣지 못할 텐데….”
“응?”
차분히 게시판을 확인하고 있던 안현이 몸을 돌렸다. 조승우가 계단을 오르는 클랜원을 보며 가볍게 혀를 차고 있었다.
“좋은 소리를 못 들어요?”
“응? 아아. 아마도. 그렇게 철저한 논리로 무장하고 나온 동부도 혼자서 깡그리 박살을 내셨잖아. 그리고 저 상태로 가면 100% 와장창 깨질걸? 내가 장담한다.”
“…….”
“그렇지 않아? 클랜 로드도 무언가 생각이 있으시니까 이렇게 하셨겠지. 그런데 저렇게 급해서야…. 쯧쯧.”
그런가. 형도 생각이 있었던가.
안현은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이다가 돌연 조승우를 흘끗 흘겼다. 두 눈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빛내고 있으나 입꼬리는 실룩샐룩 움직이고 있다. 안현은 싱겁게 웃었다.
“그런데 승우 형은 반대하는 입장 아니었어요?”
“내가? 그랬나?”
“그러셨잖아요. 너무 갑작스럽다면서.”
“기, 기억력이 좋네. 그게…. 나도 내가 B 등급을 받을 줄은 몰랐거든…. 하하하.”
조승우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사용자 정보로만 보면 조승우는 B 등급이라 보기에 한참이나 부족하다. 그러나 김수현은 등급을 결정짓는 게 사용자 정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했다.
‘확실히 승우 형도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지….’
조승우의 행정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안현의 가슴 한 켠에서는 걱정이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게시판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망연히 고개만 올리고 있는 이유정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충격이 큰 걸까. 가장 먼저 올라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이유정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렇다고 받아들인 모습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어깨는 축 늘어지고 몸은 딱딱하게 굳은 게 흡사 망부석을 보는 듯했다.
사실 안현은 이유정과 같은 등급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좋게 받으면 C 등급, 아니면 D 등급 정도로 예상했다. 그런데 자신은 생각지도 못한 B 등급을 받고, 이유정은 C 등급을 받았다. 그리고 안솔은 무려 EX 등급이다. 김수현과 첫 시작을 같이한 3명 중에서 이유정이 가장 떨어지는 등급을 받은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절대로 좋은 기분은 아닐 터.
그냥 가만히 있을까. 다가가서 어깨라도 두드려줄까.
두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려는 순간, 안현은 반사적으로 옆을 쳐다봤다. 언제 다가왔는지 김한별이 예의 쌀쌀맞은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다.
“현이 오빠.”
안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김한별이 먼저 말을 붙이는 경우도 굉장히 드문데, 거기서 한술 더 떠 현이 오빠라니.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오빠도 B, 등급이죠? 저도 B, 등급이에요.”
“으응.”
그러자 빙긋 웃은 김한별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우리 열심히 해서 같이 높은 등급으로 올라가요.”
“어? 그, 그래. 하하하.”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럴까. 안현은 어색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김한별의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아.’
안현은 그제야 김한별의 입가에 자리 잡은 미소를 발견했다. 차갑고 차가운 웃음은 누군가를 비웃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보통 때보다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 것 같기도 했다. 마치 누구보고 일부러 들으라는 것처럼.
아니나다를까.
자신도 모르게 스리슬쩍 곁눈질한 안현은 아차 한 기분을 느꼈다.
허리까지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이 올올이 곤두서 떨고 있다. 축 늘어진 양팔의 끝으로 두 손이 바스러지도록 오므려지고 있다. 살짝 닿아도 베일 듯한 날카로운 기운이 전신에서 물 흐르듯이 흘러나온다. 들은 게 확실하다.
뒷모습이 저런데 앞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상상도 하기 싫다는 생각에 안현은 얼른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김한별은 그냥 선웃음을 한 번 짓고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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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분들의 코멘트는 모두 읽었습니다. 이런 코멘트 분위기 정말 사랑합니다. 하하하. 궁금하신 부분은 차후 내용에서 드러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