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25
00724 결정의 밤. =========================================================================
그 순간 나는 곧장 이형환위(移形換位)를 발동해 하승우의 후방을 점거했다.
삽시간에 시야가 변했다. 눈앞으로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책상과 칼자루에 손을 얹은 내가 보인다. 그 환영은 곧 허공으로 녹아내리 듯이 사라졌다. 이어서 하승우의 목덜미에 칼날을 비스듬히 겨누려다가, 방향을 바꿔 등의 중앙에 칼끝을 꽂았다. 아주 살짝 들어갈 정도로.
이렇게 완전한 후방 장악에 성공한 후,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리 경고한다.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입도 함부로 열지 말고 몸도 움직이지 마. 네가 무슨 생각이든 어떤 사정이 있든 조금도 관심 없으니까. 여기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질문에 말만 하면 되는 거야. 이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행동이 보일 시, 기대해도 좋다. 알아들었으면 머리 한 번 끄덕여.”
그리고 바로 바라보았으나 하승우는 무표정했다. 소파에 앉은 그대로 책상을 응시하고 있다. 무언가 넋이 나갔거나 조용히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문득 하승우 아래 드리운 그림자가 살그머니 일렁였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정지한, 오직 어둠만이 내려앉은 고요한 밤이었다.
이윽고 하승우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알고 있었나….”
조심스레 흘러나온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발을 크게 들어 소파에 얹은 오른손을 힘껏 찍어 내렸다.
“그래도 설마…. 큭!”
쿵!
소파가 박살 나는 동시, 하승우의 몸이 크게 기울어지며 새된 비명이 터졌다.
나는 방해되는 소파를 발로 차버린 후 시선을 내렸다. 있는 힘껏 밟은 결과 오른손은 완전히 짓뭉개진 상태였다. 핏물이 왈칵 흘러나오고 짓이겨진 살점 사이로 흰 뼈가 보인다. 하승우는 오른 어깨를 약간 늘어트리면서 낯을 잔뜩 찡그린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이제 확실히 알아들었는지 입을 꾹 닫고서 정면을 응시한다.
어쨌든 이로써 하승우는 확실히 인정했다. 내가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게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래.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속삭이듯이 말하고 나서, 나는 하승우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기 시작했다. 로브를 걷어내고 웃옷을 찢는다. 어떤 것을 숨기고 있을지 몰라서, 입고 있는 속옷까지 베어서 젖혀버렸다. 그러는 와중 작고 반짝이는 푸른 구슬 하나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건…. 진실의 수정이잖아.”
말하면서 흘끗 눈을 흘겼으나 하승우는 여전히 입을 닫고 있었다.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한 번 더 입을 열면 왼손도 작살내려고 했는데.
아무튼, 마침 잘됐다.
나는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구슬을 바라보다가 발로 살짝 밀었다. 진실의 수정은 데굴데굴 굴러가 하승우의 앞에 정확히 안착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고 있지?”
하승우는 약간 주저하는 듯했지만, 곧 왼손을 얌전히 구슬에 얹었다.
잠시 후.
구슬 안으로 찬연한 불빛이 켜졌다. 진실의 수정이 발동된 것이다.
허나 발동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니 최대한 시간을 아껴야 한다.
나는 바로 질문을 시작하기로 했다. 정체는 이미 알고 있으니 집어치우고.
“사용자 하승우가, 북 대륙의 강철 산맥 공략 이후 머셔너리 클랜에 들어온 목적은?”
진실의 수정은 만능이 아니다. 무조건 ‘진실’만을 가린다는 점에서 확실한 약점이 있다. 나도 그 점을 이용해 정하연의 질문 공세에서 벗어난 적이 있잖은가. 그러니 이 약점을 최소화하려면 최대한 질문을 자세하게 하는 게 좋다.
“도피해서 보호받으려는 목적. 그리고 이용해 먹으려는 목적.”
이윽고 하승우의 낮은 음성이 들려온다. 도피 및 보호와 이용이라. 아까 내가 한 말을 따라 한 듯하다.
“전부 다, 자세하게 말해.”
손아귀에 힘을 주면서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말 그대로야. 하나는 승윤이를 머셔너리 클랜의 보호 아래 두려고 했고. 또 하나는 머셔너리 클랜을 이용해 남은 부랑자를 청소하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전자는 차치하고서라도 후자가 믿기 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부랑자가 부랑자를 쓸어버리려고 했다?
그것도 부랑자의 총 대장이?
얼른 진실의 수정을 확인했으나 구슬 안의 불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처음 켜졌을 때처럼 밝은 빛을 비추고 있다.
“…내분이라도 있었던 건가?”
“내분이라고? 하하하.”
문득 하승우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면서 말을 잇는다.
“이거 이거, 부랑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부랑자는 애초 내분이 일어날 건더기가 없는 단체야. 왜냐고? 우리는, 아니 부랑자는 필요에 의해서만 모이니까. 그래. 명령 체계도 필요에 의해서 만들기는 했지만, 너희처럼 완벽한 상하 관계는 아니거든.”
이제 조금 안정을 찾았는지 하승우는 길게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목소리였다.
“…그럼, 왜?”
“말했잖아. 필요에 의해서.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승윤이가 내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들켰다는 게 가장 큰 이유겠지.”
“사용자 하승윤도 부랑자인가?”
“아니, 아니야. 승윤이는 그냥 사용자다. 부랑자를 증오하는 그런 보통 사용자.”
하승우는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하고 싶었는지 되레 아래를 흘끗했다. 구슬 내 불빛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였다.
그때였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려는 순간, 하승우는 갑자기 머리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한껏 긴장하고 있던 터라, 나는 반사적으로 무검을 밀어 넣는 동시 미리 끌어올린 마력을 주입했다.
푹.
칼끝은 무리 없이 등을 파고들어 복부를 꿰뚫었다. 이대로 마력을 터뜨리면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승우는 잠깐 움찔한 것을 제외하고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스멀스멀 배어 나온 핏물이 등을 따라 흘러내려 바닥을 적신다.
하승우는 미약한 침음을 흘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강철 산맥이 공략된 이상,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미래가 없다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
그건 아니었다. 확실히 1회 차와는 다르게 부랑자는 전쟁 이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왜냐면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사용자가 도시를 점거하고 있는 이상, 부랑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야. 거기다 이제는 강철 산맥까지 공략했으니 차이는 더 벌어지겠지.”
“하지만 너희는….”
“아. 물론 부랑자도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어. 그래서 수많은 인원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 첩자로 활동하며 사용자 간 갈등을 조장하려는 계획을 세웠지.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과도 얻었고. 그런데….”
“흠.”
잠시 말끝을 흐린 하승우가 지그시 나를 응시한다. 나는 계속 말하라는 의미로 가볍게 턱짓했다.
“부랑자 말살 계획, 첩자 색출, 전쟁의 패배….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사지가 잘렸는데, 이후 지속적인 부랑자 척살 조 활동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세력은 기하급수로 줄어드는데, 여기서 뭘 어떡하라는 거지?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그래서 사용자로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했다는 건가?”
“갑자기 생각한 건 아니야. 전쟁 후 오랫동안 생각하면서 몰래 준비했고, 강철 산맥 공략 이후 생각을 굳혔지.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호기가 찾아오더군.”
“호기?”
“그래. 네가 공략 직전 사라짐으로써 나한테 기회가 찾아왔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가.”
“……?”
뜻 모를 말에 의아히 낯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갑자기 하승우의 얼굴이 흐물흐물해지더니 서서히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변화를 완료한 얼굴을 확인한 찰나, 돌연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또 한 명의 내가 보인다. 어느새 하승우의 얼굴은 나로 변신한 상태였다.
그러나 가슴이 채 가라앉기도 전, 또 한 번 살이 흐늘거리듯 뭉그러지더니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언뜻 보면 첫 번째 얼굴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확연히 다른 인상이다. 세 번째로 나타난 얼굴은 중후한 빛이 흐르는, 그러나 날렵한 눈매의 은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였다.
차갑고 깨끗한 눈동자와 마주하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하승우는 그 정도로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게 하승우 본연의 얼굴이라고.
그와 동시에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를 사칭한 놈이 너였군.”
“맞아. 가장 빠르면서 최고의 방법이 머셔너리 클랜을 차지하는 거였으니까. 보기 좋게 실패하기는 했지만.”
하승우는 순순히 수긍했다. 나는 이제야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하승우는 나를 사칭해 머셔너리 클랜을 차지하려고 했다. 그럼으로써 하승윤을 보호하고 부랑자를 확실하게 청소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머셔너리 로드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출발한다. 그게 틀어짐으로써 차선책으로 머셔너리 클랜에 들어온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자 하나의 의문이 추가로 생겼다.
“그런데 나를 사칭하면 너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하승윤이 이상하게 생각할 가능성도 있지 않나?”
“아아….”
하승우는 싱긋 웃었다.
“1인 2역에는 자신이 있어서. 내 능력을 사용하면 아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흠….”
어느 정도 의문은 풀렸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구슬의 불빛은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진실의 수정 발동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이제 슬슬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아. 네 말이 진심이라면 부랑자가 있는 장소를 말해봐.”
하승우는 웃으면서 부랑자가 있는 장소를 실토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지 모조리 일망타진할 수 있는지도 알려주었다.
사실 고작 여동생 하나 때문에 이렇게 순순히 말해준다는 게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역지사지로 생각해서 내가 하승윤의 입장이고 형이 하승우의 입장이었다면, 형도 똑같이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정도로 여동생을 아낀다는 소리겠지. 한편으로는 부랑자의 특성이나 미래가 없다는 말이 공감이 가기도 하고.
“그 외는?”
“그건 나도 몰라. 있을 수도 있는데, 떨거지 수준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을 거야. 아니면 우선 내가 가르쳐준 장소에서 부랑자들을 잡고, 간부급에 해당하는 놈을 심문하면 실토하겠지.”
그 말을 끝으로 불빛이 꺼지며 진실의 수정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의문도 풀었고 알아낼 사실도 알아냈다. 물론 개인적으로 궁금한 건 남았으나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길게 숨을 흘린 후, 등에 박힌 무검을 조심스레 빼냈다.
하승우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살려주는 건가?”
“미쳤군. 살고 싶나?”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무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원래는 최대한 고통스럽게, 마력 폭발로 내부를 터뜨려 죽이려 했는데….”
“그런데?”
“사실, 조금 놀랐어. 귀찮게 반항도 안 하고, 말도 꽤 성실하게 잘해줬다. 그 보답으로 깔끔하게, 고통 없이 보내주마.”
“잠깐만. 고통스럽게 죽여도 되니까, 하나만 말해주면 안 될까?”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걸까. 잔잔히 가라앉은 은회색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거?”
하승우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승윤이는 어떻게 할 거지? 죽일 건가? 보통 사용자인데?”
“응?”
“내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승윤이 걔, 천재다. 살려두면 분명….”
“아니. 알아. 부랑자라면 모를까. 걔를 왜 죽여? 용병 클래스에 그 정도면 얼마나 써먹을 데가 많은데.”
“써먹을 데라…. 아무튼, 살려준다는 말이겠지?”
“그래. 네 계획은 착오 없이 진행될 거야. 하승윤은 앞으로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활동할 거고, 부랑자도 모조리 척살할 거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말이지.
뒷말은 속으로만 말했다.
“다행이군.”
하승우는 쓰게 웃었다.
어쩌면 하승우도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로써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무튼, 혼란은 감수하기로 하고 진행한 일이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무검을 내리칠 지점을 조준했다. 하승우도 이제 끝났다고 여겼는지 지그시 눈을 감는다.
이미 죽이기로 결심한 이상 망설일 것은 없었다.
‘성스러운 여왕’을 보냈던 것처럼 똑같이 하면 된다.
“그럼, 잘 가라.”
잘 가라는 말을 하면서 나는 그대로 무검을 내리쳤다.
그 순간이었다.
“…이에요!”
퉁!
돌연 누군가 외치는 소리와 동시, 마력이 터지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리고.
텅!
부드럽게 떨어지던 무검이 무언가에 세차게 가로막혔다.
눈 깜짝할 사이, 시야로 하얀 장막이 보였다.
이윽고 앞을 바라본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희는….”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한 걸까.
눈앞으로 안솔과 제갈 해솔이 서 있었다.
============================ 작품 후기 ============================
아. 오늘 하루 정말 우울하네요.
1. 예비군 훈련의 여파인지 감기에 걸렸습니다.
2. 끙끙 앓고 있는데 병원에 입원한 친구한테 병문안을 오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은 힘들어서 안되겠다고 하니까 갑자기 서운하다고 말하네요. 처음에는 참고 넘기려다가 자꾸 얄밉게 말하길래 결국 말다툼했어요.
3. 싱숭생숭한 기분에 자려고 누웠는데 이번에는 모기 출현. 1시간 사투를 벌였으나 겨우 한 마리 잡았어요.
4. 화를 삭이면서 글이나 써야지 하고 의자에 앉는데 책상이 조금 더러운 겁니다. 그래서 청소하는 와중, 왼쪽 소책자에 올려둔 컵을 툭 쳐버렸네요. 그리하여 안에 들은 식은 커피가 왈칵 쏟아졌습니다. 모니터, 키보드, 책자에 꽂혀 있던 책, 바닥, 그리고 형이 살면서 손에 꼽을 정도로 선물해준, 그래서 아까워서 쓰지도 않고 모셔둔 작은 노트가 갈색으로 흥건해졌습니다.
응아아아앙앙아아!
오늘은 정말 뭘 해도 안 되는 날인가 봐요.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