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27
00726 결정의 밤. =========================================================================
꿈.
꿈을 꾸고 있다.
정면 방향에는, 꼭대기에 눈이 부실 정도의 태양이 걸린 새하얀 신전이 보였다.
신전은 흡사 지옥처럼 거칠게 불타오르고 있었고, 그 부근으로는 생전 처음 보는 괴물과 인간이 한창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거대한 회오리가 사방에서 몰아치고, 하늘에서 떨어진 무수한 벼락에 천지가 진동한다.
누가 울부짖는 모를 비명이 사방을 가득히 울리고, 붉은 핏물은 허공에 분수처럼 뿜어졌다.
안솔은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장.
매캐한 연기가 공기 중에 흐르는 전장은 한 치 앞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이내 속이 타들어 갈 정도의 화끈한 바람이 내부를 메우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눈이 차츰차츰 적응하면서 눈앞으로 새로운 풍경이 그려졌다.
– 메모라이즈!
문득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음성이 들려온 곳에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있었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인은 전장을 가로지르며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바로 뒤에 또 한 명의 여인이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을 바짝 쫓고 있었다.
뒤쫓는 여인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안솔은 매우 놀라고 말았다.
어깨에 살짝 닿는 단발 머리.
그리고 낯설지 않은 새하얀 사제 로브.
누군가를 뒤쫓는 여인은 영락없는 안솔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안솔은 돌연 이상함을 느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분명 꿈을 꾸는 것도 보고 있는 것도 자신인데.
어떻게 자신이 자신을 볼 수 있는 걸까?
그러나 차오른 의문이 해결되기도 전, 돌연히 안솔 주변의 풍경이 스치듯 지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엄청난 속도로 사투가 벌어지는 전장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눈 한 번 깜짝한 사이, 또 한 번 풍경이 갑작스럽게 변하는 동시, 안솔은 몸이 붕 떠오르는 걸 느꼈다.
문득 온몸으로 애가 타는 기분이 엄습한다.
그 기분에 이끌린 걸까.
안솔은 마치 누군가에게 닿으려는 듯, 한껏 고개를 젖히면서 필사적으로 팔을 뻗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힘껏 팔을 뻗은 안솔이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건, 온몸이 포박된 채 꿇어 앉은 사내였다.
사내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 갑자기 삽시간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사용자 안솔의 특수 능력, ‘성녀의 예언’은 거기서 끝이 났다.
*
휭, 고요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테라스를 타고 불어와 방안을 가볍게 휩쓸었다. 정면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김수현의 머리카락이 작게 일어나고, 안솔의 로브가 살짝 나부꼈다가 가라앉는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에는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안솔을 데리고 온 제갈 해솔이 살그머니 걸음을 물렸다.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라는 듯,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눈초리로 구경하는 방관자적인 태도를 잡는다. 김수현은 옆을 흘끗 흘겼다가 도로 안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조용하면서도 차가운 목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문득 침을 꼴깍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현재 안솔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칼자루를 쥔 김수현의 두 눈동자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듯 우묵이 가라앉아 있다. 안솔은 어떻게든 그 결정을 되돌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자연스레 떠오른 의문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안솔도 자신이 없었다. 왜냐면 여태껏 자신의 감이 발휘된 상황과 현재 직면한 상황은 상당히 판이하니까.
“네가 여기 왔다는 건…. 이번에도 그건가.”
김수현은 ‘왜 막았느냐.’ 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여태껏 몇 번이고 함께 해온 이상, 안솔이 나타나 자신을 막은 상황을 곧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확인을 요구하는 듯한 눈초리에 안솔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아주 잠깐이기는 했지만, 김수현의 낯에 쓸쓸한 기색이 스쳤다. 마치 절대 오지 않기를 바라던 상황과 마주했을 때의 표정이랄까.
김수현이 입을 열었다.
“안솔. 지금 네가 보호하려는 사용자는 부랑자다. 그것도 최고 악질이라고 볼 수 있는 놈이야. 알고 있니?”
“…오라버니.”
안솔이 애절한 음성으로 불렀으나 김수현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이.
“가진바 능력도 좋고, 머리도 좋다. 무엇보다 자기 관리가 굉장히 철저한 놈이야. 나와 고연주가 밀착 감시를 했는데도 아주 작은 틈도 보이지 않는 놈이라고. 차라리 놓치면 놓쳤지, 나는 절대로 저놈을 우리 클랜에 들일 생각 없다.”
“…….”
“시간은 1분, 아니 3분을 주마. 단순히 살려야 한다는 말이 아닌, 그 이상의 말로 나를 설득해라.”
“……!”
김수현이 선언하자 안솔은 당황하고 말았다.
이미 꿈을 꾼 지는 며칠이나 지났다. 중간중간 흐릿하게 기억나는 게 있을 뿐, 전체적인 꿈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꿈의 느낌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고, 정작 내용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고나 할까. 결국 믿고 있는 것은 ‘죽이면 안 된다.’ 는 직감뿐. 그런데 김수현은 그 이상의 말로 자신을 설득해보라고 한다.
안솔은 갑갑함을 이기지 못해 아랫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왜냐면 김수현이 요구하는, 그 이상으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서는 정수리를 반으로 쪼개 열어버리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모두 드러내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약간이라도 시원함을 느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3분이라는 시간이 의미 없이 흘러가고 말았다.
“3분이 지났군.”
들려오는 음성에 안솔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카앙!
아차 한 사이, 안솔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비틀거리면서 물러났다. 천장을 향하던 김수현의 손은 어느새 아래로 내려온 상태였다. 칼자루 또한 바닥을 보고 있었다. 가볍게 휘두른 일격에 안솔이 밀려난 것이다. 김수현은 또 한 번 버텨낸 안솔을 보며 감탄했다.
“두 번이나 버텨내다니…. 역시, 그때 막아낸 건 우연이 아니었어.”
결코 오만이나 자만이 아니었다. 김수현은 사용자 중 최강이다. 시크릿 클래스 ‘검술 전문가’의 권능 ‘결’은 그 어떤 것도 자르고 베어버린다. 그걸 두 번이나 버틸 수 있었던 건, 안솔도 보조 계열 사용자에 한해서 최강이라 부를만한 사용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뿐이기는 했다. 안솔도 알고 있다. 앞선 두 번의 공격은 경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김수현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보호막쯤은 단숨에 깨트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안솔은 그저 멍하니 김수현을 바라보았다. 전신으로 소름이 쭈뼛쭈뼛 돋아나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팔이 덜덜 떨린다. 설마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렇게 무력한 상황도 처음이었고, 좋아하는 오라버니와 맞서게 될 줄도 몰랐다.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본 걸까.
“안솔.”
문득 김수현이 안솔을 불렀다.
“혹시 사용자 아카데미를 수료하면서 내가 한 말을 기억하니?”
이제까지와는 다른,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 혹시나 한 안솔이 조심스레 눈을 들어 김수현을 응시한다.
“부랑자는 절대로 믿지 마라…. 요.”
“잘 기억하고 있구나.”
“하지만…!”
“그래. 알고 있다.”
인정에라도 호소하려는 찰나, 김수현이 안솔의 말을 끊어버렸다.
“너도 하고 싶은 말은 많겠지. 아니. 애초 너를 권유한 것도 나고, 그동안 네 덕을 본 것도 사실이고. 이걸 부인할 생각은 없어. 나는 너를 언제나 신뢰한다.”
안솔의 표정이 오묘하게 이지러졌다. 복합적인 감정이 어우러져 드러났지만, ‘그럼 왜?’ 라는 기색이 가장 강하게 드러났다.
김수현이 계속 말을 잇는다.
“하지만 너를 신뢰하는 만큼, 나는 나를 신뢰하기도 해. 즉 나한테도 신념이라는 게 있다. 그간 홀 플레인을 경험하면서 세운 신념이. 그런데 너는 나보고 지금 이 신념을 깨트리라고 말하고 있어.”
“…….”
“그럼 너는 말하겠지. 나를 위해서라고. 그럼 나도 말하마. 나는 우리를 위해서다.”
“…….”
안솔은 흡사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말 그대로 지금까지는 안솔의 말을, 아니 직감을 따라도 크게 상관없는 상황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현재는 다르다. 안솔의 말대로 하승우를 살리는 선택을 한다면 머셔너리는 어마어마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김수현이 말한 우리라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고는 있었어. 네 직감과 내 신념이 부딪치는…. 언젠가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라는….”
이윽고, 조금은 허탈한 음성으로 말한 김수현은.
“그러나, 여기서 꼭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느닷없이, 강렬한 눈빛으로 안솔을 응시했다.
“나는, 조금 더 확실해질 수 있는 길을 선택하고 싶구나.”
또 한 번 천천히 칼자루를 들어 올린다.
화르르륵!
그러자 갑자기 기세가 일변하는 동시, 허공에서 맑은 불꽃이 타오르며 보이지 않는 칼날을 감싸 안는다.
“누가 옳고 그르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않겠다. …이건 진심이야.”
그렇게 말한 김수현은 한 걸음씩 걸어오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거리를 줄여오는 김수현을 보며 안솔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번에는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무엇보다 저 맑은 불꽃을 두른 일격을 막아낼 자신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더 이상 김수현의 결심을 돌려낼 자신이 없었다.
“괜찮으니까, 이만 옆으로 비켜라. 고생했다.”
그 순간, 안솔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옮길 뻔했다.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단지 고생했다는 말 한 마디에 불과했으나 근 며칠 동안 마음 고생했던 일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안솔은 간신히 고개를 가로저을 수 있었다. 납득의 끝에서, 안솔은 아직도 자신을 붙잡고 있는 오묘한 직감을 선택했다.
“안솔…?”
“메모라이즈…!”
이윽고 김수현이 낯을 찌푸리는 동시, 안솔은 눈을 꼭 감은 채 있는 대로 소리 질렀다. 사실상 아무 의미 없는 외침에 불과했다. 그저 아직 드문드문 남아 있는 꿈의 기억을,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에 나오는 대로 외친 것이다. 김수현은 머리를 갸웃하기는 했지만, 딱히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포박된 사내…!”
저벅저벅.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
저벅저벅.
“비명! 검은 괴물…!”
저벅저벅.
“또 한 명의 나…!”
저벅저벅.
여러 말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온다. 안솔은 그만큼 필사적이었으나 김수현은 여전히 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갈 해솔은 조용히 팔짱을 낀 채로 이제 종국을 향해 치달리는 ‘결정의 밤’을 흥미로이 응시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김수현이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안솔은 눈을 감은 상태였으나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곧….
“아.”
이라고 느끼기도 전, 무검은 무서우리만치 담담하게 내려왔다.
콰지지직!
안솔의 보호막은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너무나 간단하게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보호막을 깨트리고 들어온 무검이, 그대로 안솔을 넘어 아래로 내리쳐진다.
이윽고 칼끝이 하승우의 정수리를 쪼개기 직전.
“꼬, 꼭대기에 태양이 걸린! 새하얀 신전…!”
“……!”
그 찰나의 순간, 무검은 마치 거미줄에 걸리기라도 한 듯 우뚝 정지했다.
숨을 크게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김수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두 눈에는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진한 당혹감이 드러나 있었다. 기실 김수현이 갑자기 행동을 멈춘 이유는 하나였다.
‘꼭대기에 태양이 걸린, 새하얀 신전…?’
그냥 지른 거라고는 하나, 최후로 내뱉은 말은 행동에 제동을 거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김수현의 머릿속에는 1회 차 시절, 테라로 진입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그건…. 약속의 신전이잖아.’
약속의 신전. 제로 코드가 잠들어 있는 장소. 해가 중천, 즉 신전 꼭대기에 걸렸을 때 문이 열리는 특이한 기운이 흐르는 신전이다.
물론 안솔이 그냥 한 말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표현이 너무 정확했다. 묘하게 신경이 쓰인다고나 할까. 현재 그 장소에 관한 지식은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니까.
“흐아아앙…. 흐아아앙….”
이윽고 누군가 털썩 꿇어앉는 동시, 서럽게 우는 소리가 이어졌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는지, 안솔이 무너지듯이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서러운 소리가 고요한 방안을 나직이 울렸다.
김수현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면서 칼자루를 쥔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때였다.
“잠시만요.”
방으로 이동해온 이후, 여태껏 가만히 방관만 하고 있던 제갈 해솔이 갑자기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봐요. 클랜 로드.”
제갈 해솔은 엉엉 우는 안솔의 정수리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리고 실눈을 뜬 김수현을 돌아보며 당돌히 입을 열었다.
“아니. 살다 보면 한 번쯤 막을 수도 있지. 왜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래요?”
“…장난하나?”
김수현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어흠, 헛기침한 제갈 해솔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아아. 너무 심각한 것 같아서. 어쨌든 농담이고요.”
“농담? 방관하고 싶으면 조용히 구경이나 해. 아까처럼.”
“그러려고 했는데…. 보니까 왜 서로 싸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뭐라고?”
이건 또 무슨 말일까.
김수현이 날카로이 반문했다.
“결국에는 이 문제잖아요. 안솔은 이 사내를 살려야 한다. 클랜 로드는 이 사내를 믿지 못한다.”
“그래서.”
“그럼 이 두 의견을 적절히 조합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사내를 살리면서 믿을 수 있게 만드는 거죠.”
“그 방법이 없으니까 지금 이러는 거 아냐.”
김수현이 갑갑하다는 듯 말하자, 제갈 해솔은 “음~.” 신음을 흘리며 장난 반 고민 반 섞인 표정을 짓는다. 한쪽 눈을 살짝 뜬 채 턱을 만지작거리는 게,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러더니 곧 총총히 걸어가면서 가까이 오라는 듯 손을 까딱까딱. 그러나 김수현이 눈을 크게 부라리자 얼른 깨금발을 들어 속닥속닥 귓속말을 건넨다.
잠시 후.
“너…?”
김수현이 두 눈을 치뜨며 옆을 돌아본다.
“왠지…. 클랜 로드는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제갈 해솔은 싱긋 웃으면서 스리슬쩍 걸음을 물렸다. 그리고 안솔의 팔을 붙잡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이만 돌아갈게요?”
기껏 물었으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허나 김수현의 얼굴에는 어느새 당혹과 고민이 섞인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과연 무슨 말을 들었길래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안솔은 울음을 그치면서 의아히 두 명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제갈 해솔은 그저 싱긋 웃고서는 안솔의 팔을 잡은 채로 망설임 없이 공간 이동을 사용했다. 어쨌든 안솔이 결심을 돌리게 하는데 실패한 이상, 이제 남은 건 김수현의 선택뿐이었다.
결국 안솔과 제갈 해솔은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마력이 터지는 소리가 여운처럼 맴도는 방안에는 도로 두 명만이 남게 됐다.
하승우는 넋 나간 듯한 눈동자로 질렸다는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언뜻 시선을 올린 김수현이 지그시 하승우를 바라본다.
김수현은 한참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하승우.”
“……?”
“너한테 몇 가지 추가로 질문하고 싶은 게 있는데.”
“…질문?”
하승우는 잠시 갸웃하기는 했지만, 곧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들먹였다. 반응을 확인한 김수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질문이 조금 의외인 걸까. 말을 들은 순간, 하승우의 담담한 낯에 의아한 빛이 서렸다. 그러나 여전히 기우뚱하면서도 김수현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했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하승윤의 안전을 확보한 이상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그리하여 모든 질문을 끝마친 후, 김수현이 숨을 길게 흘리면서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인다. 정작 하승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런가.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지?”
“거짓말은 무슨….”
“방금 그 말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후회? 아니. 갑자기 그 질문은 왜….”
“좋아. 살려주도록 하지.”
“……!”
그 순간, 김수현은 강렬한 어조로 뱉어버리듯이 말했다. 뜬금없는 선언에 하승우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물밀 듯이 차오른다.
“나를…. 살려주겠다고? 정말로?”
“그래. 단, 조건이 하나 있다.”
김수현은 확언 후 조건이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두어 발짝 걸음을 옮겨 하승우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너는 살 수 있어. 지금 이 순간부터 과거에서 벗어나고, 하승윤과 같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야.”
“……?”
“말해. 조건을 받아들이겠나?”
“그게….”
무슨 조건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하승우는 반사적으로 입을 닫았다.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증오와 혐오가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차마 그 눈빛과 마주할 수 없어, 하승우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어쨌든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데, 여동생과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는데. 하승우도 사람인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조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받아들이겠다.”
“좋아. 그럼….”
그 순간이었다.
서걱.
김수현의 무검이 꿈틀 움직이더니 하승우의 목을 단칼에 잘라냈다. 목은 허무하리만치 몸과 분리됐고, 하승우는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대로 절명했다. ‘억.’ 소리도 나오지 않을 정도의 깔끔한 일격이었다. 김수현은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를 확인한 후, 잘린 목의 단면에서 꼴꼴 흘러나오는 핏줄기를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잠시 후.
하승우의 몸이 풀썩 허물어지는 걸 마지막으로, ‘결정의 밤’ 무대의 막이 내렸다.
*
새벽, 해가 하늘에 떠오르고 햇살을 비추기 시작하자 도시 곳곳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바쁜 장소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신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탐험 보고다, 소환의 방 호출이다 등등 아침 댓바람부터 볼 일이 있는 사용자가 부지기수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전에 거주하는 ‘권한’을 부여 받은 거주민이나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사용자는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준비해야만 했다.
그렇게 정신 없이 바쁜 와중, 아침 무렵 두 명의 사내가 뚜벅뚜벅 신전 내부로 걸어 들어왔다. 아직 거리가 멀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 명은 칠흑색 머리카락에 도복을 입은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은회색 머리카락에 로브를 걸친 사내였다.
막 한 무리 사용자를 안내한 여인은 한숨을 흘리면서도 미소 띤 얼굴로 두 사내를 맞이했다. ‘권한’을 부여 받은 처지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거주민일 뿐이다. 사용자와 척을 져서는 조금도 좋을 게 없었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계약서를 작성하러 왔습니다.”
칠흑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말했다.
“계약서요?”
“예. 계약서는 여기.”
미리 작성해왔는지 바로 계약서를 내민다. 빠른 일 처리는 환영하는 바이나, ‘권한’의 영향이 들어가는 신전을 통한 계약 공증은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일이다. 애초 흔한 일도 아니었고. 여인은 한층 진지해진 얼굴로 조심스레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
“권한을 부여 받은 거주민이신가요?”
“네. 그렇기는 한데….”
여인은 건성으로 말하면서 계약서를 살폈다.
『계약서.』
1. 하승우는 무조건 김수현의 말에 복종한다.(이하 김수현을 A, 하승우를 B라 칭한다.)
2. B는 A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고, 무조건 진실만을 말한다.
3. B는 어떤 행동 및 방식으로든 A의 클랜의 누구에게든 해를 가할 수 없다.
4. B는 어떤 행동 및 방식으로든 A가 활동하는 대륙에 해를 가할 수 없다.
5. 그러나 A의 허락이 있을 경우, 3번과 4번의 조항은 예외로 한다.
간단히 적혀 있는 5개의 조항.
그러나 내용은 전혀 간단하지 않다.
“이건….”
살그머니 시선을 올린 여인은 말을 건넨 사내의 옆을 응시했다.
“…노예 계약이잖아요. 동의하신 거예요?”
“…예.”
은회색 머리카락의 사내는 마지못해 말하는 티를 풀풀 풍기면서 쓰게 웃었다. 그러자 여인의 표정이 오묘하게 이지러지면서 어깨를 들먹인다.
“에…. 뭐. 동의하신다니까 할 말은 없는데. 이거 제가 권한으로 공증해봤자 별로 효력은 없어요?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용자와 거주민 혹은 기타 등등이라면 몰라도, 사용자와 사용자 사이에는 제 권한보다 설정의 보호가 우선되기 때문에….”
“아아. 알고 있습니다. 무얼 우려하시는 잘 알고 있어요.”
설명이 길어질 낌새를 느꼈는지 도복을 입은 사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걸 알고 있으시면서 계약을 하시겠다고요?”
말이 끊긴 게 자못 불쾌했는지 여인의 조금은 뾰족해진 음성으로 반문했다.
“예.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말하는 동시에 사내의 눈이 흘끗 옆을 흘겼다. 그리고 한쪽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사내는…. 오늘 새벽 부로 거주민이 됐으니까요.”
============================ 작품 후기 ============================
여러분 모두 오랜만이에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