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29
00728 핏물 속에서 피는 꽃. =========================================================================
어둠이 한층 옅어진 동녘 하늘에는 어느새 어스름한 동이 트고 있었다. 해는 눈치를 보듯 살금살금 올라오며 희미한 햇빛을 뿌렸고, 햇살을 받은 수풀도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조심스레 찾아오는 푸른 산맥의 아침 풍경은 고요하면서 아름다웠다.
사사사삭!
사사사삭!
그렇게 빛이 차츰차츰 산맥 전역을 아우를 즈음, 문득 들려오는 이상한 소음. 소리를 들은 걸까. 산맥 내, 수풀을 깔고 앉아 꾸벅꾸벅 머리를 꺼트리던 웬 사내가 흠칫 몸을 움츠렸다.
로브를 깊숙이 눌러쓴 터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드러난 턱 선에는 듬성듬성 자란 수염과 더러운 자국이 묻어 있는 걸 보면, 며칠 동안 씻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입이 늘어져라 하품한 사내는, 졸음 가득한 눈을 좌우로 천천히 돌렸다. 무언가를 찾는다기보다는 그냥 익숙함에서 나온 반사적인 행동처럼 보였다.
사사사삭!
사사사삭!
그러나 그 순간, 느릿하게 돌아가던 사내의 머리가 갑자기 정지했다. 눈동자에서 졸음이 사라지고 묘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마치 소리라도 날까 조용히 후드를 움켜 벗어 젖힌 사내는 신중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낯빛은, 곧 딱딱하게 굳었다.
사사사삭, 먼발치의 수풀이 빠르게 흔들리고 있다.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무언가 거뭇거뭇한 것들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흡사 이대로 사내를 덮쳐 누르기라도 할 것처럼, 우거진 수풀을 일직선으로 헤치며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온다.
웅웅웅웅웅웅웅웅!
그리고 들려오는 마력이 울리는 소리. 미리 설치한 마법 진이 누군가 침입했다는 경고를 보내는 소리였다. 진동은 사방에서 울려오고 있었다.
“침입이다! 침입이다!”
“이런 쌍!”
사내의 외침과 동굴 안 부랑자들이 욕설을 뱉으면서 잠에서 깨어난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침입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경계조에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척살 조가 아니라 괴물의 습격이라고 합니다!”
누군가 황급히 외치자 두툼한 뱃살의 털북숭이 사내가 잔뜩 인상을 썼다.
“옌장, 괴물의 습격? 엿 같구먼!”
척살 조가 아니라고는 하나, 절대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푸른 산맥에 출현하는 괴물은 대부분이 무리 지어 다니는 습성이 있다. 막말로 죽음의 기사와 리치로 이루어진 군단이나 반시 무리가 습격하는 날에는, 사내의 말대로 엿 같은 상황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기습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뜻밖에도 동굴 안은 난리까지는 아니었다. 모든 인원이 신속하게 움직이면서 동굴을 뜰 준비를 하고 있다. 매우 빠른 대응이었다.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겪어본 것처럼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느 쪽에서 오고 있지?”
“북쪽에서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윽고 200명에 달하는 부랑자는 우르르 동굴을 벗어나 남하를 시작했다. 부랑자는 척살 조를 상대로 도망칠 때 각각 사방으로 도망친다는 철칙이 있다. 그러나 괴물이 습격했을 시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괴물의 습격은 우발적인 상황일 가능성이 높으니, 그냥 최대한 빠르게 장소에서 벗어나면 그만이니까.
미리 봐둔 도주로에 진입했을 때만 해도 부랑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 이상함을 느낀 건, 자신들이 가야 할 도주로에 웬 열댓 명의 사용자가 학익진의 형태로 넓게 포진한 광경을 확인했을 때였다. 그것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사적으로 도주를 멈춘 부랑자 무리 사이로 심상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서 도망치던 ‘배신자’ 이강산은 와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동안 부랑자로 오래 굴러먹은 경험이 본능적으로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아직 자세한 전후 사정까지는 모르나 무언가 당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 미친….”
“저, 저거…. 머셔너리 아니야?”
서서히 기겁하는 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길을 가로막은 사용자들의 가슴에 그려진 붉은 문양을 확인한 것이다. 칼과 방패. 두 번 볼 것도 없다. 가장 악명 높다는 머셔너리 척살 조가 부랑자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소란이 한층 심해지자 이강산은 거대한 검을 치켜들며 악을 썼다.
“빌어먹을, 정신 차려라! 끽해야 열댓 명밖에 안 되잖아!”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머셔너리 척살 조는 14명. 그에 반해 부랑자는 약 200명. 게다가 간부급 부랑자들이 포함된, 나름 정예라고 할 수 있다. 끊임없는 이어져 온 투쟁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실력자들이다.
이강산의 외침에 조금은 해볼 만하다고 여겼는지, 어수선하던 부랑자들이 한 명 두 명 정신을 차리더니 각자 무기를 꺼내 들어 전방으로 겨눴다. 무법자보다는 부랑자의 수준이 높다는 걸 엿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기습적인 상황을 맞이하고도 우왕좌왕하지 않고, 자신들이 해야 할 행동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간신히 진정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강산은 여전히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아니. 학익진의 중앙에 서 있는 여인을 보니 오히려 더욱 증폭되는 기분을 느꼈다.
이강산은 저 여인이 누군지 알고 있다. ‘검후’ 남다은. 아까부터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부랑자들을 느긋이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이.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후방에서는 아직도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다. 작금의 상황에서 가장 좋은 경우는 사용자, 부랑자, 괴물이 섞여 혼전을 벌이는 것이다. 그 틈을 타면 몰래 도망칠 수 있는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리라.
그렇게 생각한 이강산은 칼끝으로 정면을 겨누며 괴성을 질렀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부랑자들도 앞다투어 고함을 지르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랑자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지금 후방에서 달려오는 괴물 무리는 푸른 산맥이 아닌, 비비앙이 소환한 마수 군단이라는 사실을.
현재 자신들이 앞뒤로 완벽하게 포위됐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느새 발아래 어두운 연기가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오라! 피에르! 제 4 군단을 지배하는 미친 불꽃의 어릿광대여!”
이윽고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낭랑한 목소리가 사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잠시 후.
– 후헤헤헤, 후헤헤헤!
– 히히히히, 히히히히!
기괴한 소음이 호응하는걸 시작으로, 푸른 산맥에 때아닌 사냥철이 도래했다.
*
부랑자 섬멸!
머셔너리 클랜에서 대규모 부랑자를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거기다 단 한 명의 전상자 없이, 주요 부랑자 수십 명을 포로로 잡는 데 성공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다. 근래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는 와중 갑자기 커다란 사건이 들이닥쳤는데, 어찌 들불처럼 번지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특히 부랑자와 관련한 소식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소문은 북 대륙을 넘어서 아틀란타까지 쫙 퍼졌다.
사용자들의 반응은 당연히 폭발적이었다. 어찌나 기뻐했는지, 척살 조가 아틀란타로 돌아온 날 워프 게이트 인근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정도였다. 모두가 정말로 부랑자 무리를 잡았는지 보려 아우성을 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몸이 꽁꽁 포박된 수십 명의 부랑자 무리를 확인했을 때, 도시에서는 크나큰 환성이 터졌다.
꼴 좋다고 손뼉을 치는 사람, 원수라도 봤는지 고래고래 욕설을 지르는 사람, 이제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겠다면서 안도하는 사람, 믿을 수 없다며 호들갑을 떠는 사람 등등. 실로 다양한 반응이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그동안 지긋지긋하게 이어져 온 악연의 고리가 완전히 끊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부랑자는 또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고, 혹은 사용자 틈에 섞여 있을 가능성도 있다. 말인즉 아주 완전하게 뿌리 뽑지는 못했다고나 할까.
그래도 대단하다. 수뇌부를 이렇게나 한꺼번에 잡은 사례는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배신자’ 이강산을 비롯해 주요 간부를 깡그리 잡았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엄청난 성과였다. 그동안 여러 계획으로 하나하나 사지를 잘라냈다면, 이번에는 머리통을 부쉈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이제 남은 부랑자를 솎아내는 작업은 시간 문제였다.
그리하여 도시가 갑자기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 즈음. 중앙 관리 기구에 부랑자 인도를 마친 척살 조는 머셔너리를 연호하는 사용자들을 헤치고 캐슬로 돌아왔다. 이미 지속해서 연락을 받고 있던 터라, 나는 1층 회의장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
14명의 클랜원은 하나같이 당당한 걸음으로 정연히 걸어 들어왔다. 좌우로 늘어선, 나와 같이 기다리고 있던 클랜원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심지어 고연주까지도 활짝 웃는 얼굴로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이번 성과가 대단하다는 소리였다.
이윽고 회의장 중앙에서 걸음을 멈춘 우정민이 살짝 머리를 숙였다.
“사용자 우정민 외 13명,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귀환했습니다.”
“연락은 이미 받았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바로 화답하며 척살 조원을 쓱 훑었다. 남다은, 우정민, 선유운, 진수현. 네 명은 예전보다 얼굴이 훨씬 밝아져 있었다. 누가 복수는 후회만을 남긴다고 했던가. 저리도 달콤한 기색에 취해 서 있는데.
나로서도 여러모로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번 사건으로 우정민을 비롯한 척살 조의 명성이 크게 올랐다.
당연하지만 거기에 내 이름은 없다. 즉 내가 없어도 머셔너리가 이 정도의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해준 것이다. 개인에 한해서이기는 하지만, 내가 아는 사용자가 조금씩이나마 1회 차의 모습을 찾아간다는 사실은 분명한 희소식이었다.
“그냥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연이은 축하에 우정민은 겸양하면서 흘끗 나를 쳐다봤다. 물론 이번에는 하승우라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끼어들기는 했다. 엄밀히 말해서 어느 정도 받아먹었다는 느낌도 있고. 하지만 그걸 고려하고서라도 드러난 결과는 변함이 없다. 밥상을 차려주기는 했지만 잘 받아먹는 것도 능력 아니겠는가.
이러나저러나, 척살 조가 시작을 아주 잘 끊어줬다. 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거센 변화를 일으켰고, 폭풍과도 같던 변화의 바람이 이번 성공을 기점으로 서서히 잦아드리라 확신했다.
그렇게 치하가 끝난 후, 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임무 성공의 보상을 발표했다. C 등급 이하의 클랜원에게는 무조건 1등급 특진을, B 등급 이상의 클랜원에게는 만족할만한 실적을 쌓아주었다.
약간 파격적인 감은 없잖아 있었으나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번 임무 성공이 지니는 값어치가 그 정도로 엄청났기 때문이다. 보통 임무 3, 40개를 달성하는 것보다 훨씬 값진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부랑자 사건이 처리된 다음날, 걱정했던 안현도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후.
내게도 하나의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나와 함께 통과의례를 시작한 애들의 사용자 정보에 미약한 변화가 생겼다.
연차가 상승했다. 어느새 3년 차에서 벗어나 4년 차 사용자가 된 것이다.
나로서는 실질적으로 맞이하는 햇수로는 14년째였다.
============================ 작품 후기 ============================
이제 서서히 안정기에 접어들어야죠. 물론 그 전에 큰 산을 하나 넘어야 합니다. 예상외로 많은 사랑을 받는 우리 이유정의 고난이 있겠죠. 하하하.
그리고 가끔 몇몇 분이 오해하시는데, 저는 이유정을 미워하지 않아요. 오히려 좋아합니다. 정말이에요. 🙂
이유정 : 그럼 나 좀 적당히 굴리지?
로유진 : 미안.
이유정 : 뭐가 미안한데?
로유진 : 너 앞으로 3번은 더 굴러야 해.
정확히 3번입니다. 예. 아주 나락까지…. 그래도 이번 고난을 잘 견뎌내면 이유정도 한층 성숙한 사용자가 되겠지요. 사실 성숙한 이유정을 얼른 그리고 싶네요. 아 좋잖아요. 빨간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예쁘장한 얼굴, 섹시한 몸매. 으흐흐(?)
그리고 이유정이 지금 이렇게 당하고는 있지만, 차후 김수현에게 모두 복수하게 만들 예정입니다. 아. 어떻게 복수하냐고요? 가령 예를 들어 집무실 책상 아래서나, 테라스에서…. 응? 아, 아닙니다. 흠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