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32
00731 핏물 속에서 피는 꽃. =========================================================================
참으려는 듯, 그러나 자꾸만 새어 나오는 서러운 흐느낌이 이어졌다. 잠시 후, 이유정은 얼굴을 가린 그대로, 엉엉 울면서 달려나가 버렸다. 장내의 기류는 삽시간에 이상해졌다. 흡사 단체로 찬물이라도 맞은 듯, 즐거이 무르익은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 폴짝폴짝 기뻐하던 하승윤은 어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누구 한 명 나서는 이 없이 서로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결국 나는 이만 자리를 뜨기로 결심했다. 이벤트도 끝난 이상 더 남아 있을 필요는 없다. 애초 시끄러운 장소에 오래 있는 걸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클랜원들은 당황해 하며 나를 돌아봤으나 나는 웃는 얼굴로 계속 축제를 즐길 것을 권했다. 그러자 내가 이유정에게 가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한결 안심한 얼굴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한순간 정말 한 번 가볼까 고민이 들었지만…. 그냥 그러지 않기로 했다. 딱히 위로를 잘하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지금 가봤자 별로 좋은 말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상투적인 말은 해봤자일 테고.
그리하여 나는 그대로 계단을 올라 4층 집무실로 들어갔다. 간이 탁자와 의자 하나를 끌고 테라스로 나섰지만, 그제야 음식이나 술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물론 호출석 한 번 누르면 해결될 일이기는 하나…. 에이, 그냥 적당히 바람 좀 쐬고 자는 게 나을 것 같다.
나는 의자에 앉아 머리를 젖혔다. 시린 밤하늘의 별은 수백, 수천의 보석이 흩뿌려진 것 같은 아름다운 빛깔을 뽐낸다.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왔으나 썩 차갑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약간 달아오른 몸을 식혀주는 기분마저 들었다.
음…. 갑자기 아쉬운 기분이 드는데. 술 한 잔 마시면서 구경한다면 꽤 운치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아쉬운 대로 연초나 한 대 물어볼까?
끼익….
“응?”
그렇게 생각하고 품속에 손을 넣은 찰나, 돌연 천천히 문을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한별아?”
누군가 싶어 돌아봤더니 어느새 방안으로 들어온 김한별이 쭈뼛쭈뼛 서 있다. 두 손에 술과 잔을 꼭 쥔 채로. 항상 보던 로브가 아닌, 단정하면서도 시원한 차림을 보니 무언가 오묘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문득 반쯤 열린 문이 눈에 밟혔다.
“그냥…. 아까 보니까 맨손으로 올라가시는 것 같아서….”
쓱쓱, 애꿎은 카펫을 발로 긁으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한다.
문 좀 닫고 오라고 말하려다가, 갑자기 어색한 기분이 엄습해 괜스레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그거 때문에 일부러 올라온 거니?”
김한별은 도리도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
“대답…. 이제 듣고 싶어서….”
“대답?”
반문한 순간, 김한별이 도끼눈을 떴다.
“아, 아. 그 대답 말이지? 하하.”
나는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면 고백에 대한 대답을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너무 바빠서…. 아. 이건 말해봤자 변명이겠군.
“우선 들어와.”
기껏 말하기는 했으나 김한별은 이미 그러고 있었다. 쿵쿵 발소리를 내면서 테라스로 오더니 주변을 둘러본다. 의자는 하나밖에 가져오지 않았다. 와서 앉으라는 의미로 허벅지를 두어 번 가볍게 치자, 쌀쌀맞은 눈동자가 화들짝 놀란다.
“뭘 그렇게 놀라? 와서 앉으라는데. 아니면 계속 서 있을 거야?”
“아, 아니…. 거기는….”
“왜. 싫어?”
“…….”
장난스레 말하자 김한별이 발끈한다. 아마 조롱한다고 여겼는지, ‘그런다고 내가 못할 것 같아요?’ 라는 듯 성큼성큼 다가와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린다. 이내 주춤주춤 내려앉는 엉덩이를 보면서, 나는 검지를 빳빳하게 펴 허벅지 중앙에 곧추세웠다. 폭.
“끼약!”
어딘가를 쿡 찌르고 들어가는 동시, 김한별이 펄쩍 뛴다. 나를 배를 잡고 웃었다. 비명이 평소 생각하던 것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이…! 이 나쁜! 변태! 저질!”
김한별은 병과 잔으로 나를 번갈아 치면서 온갖 말로 나를 저주했다. 그렇게 한동안 실랑이질을 당한 끝에, 간신히 진정한 김한별은 탕 소리가 날 만큼 병을 세게 내려놓았다. 덜컹 흔들리는 탁자를 부여잡는 사이, 낑낑거리며 소파를 끌어와 힘겹게 주저앉는다.
“미안.”
“흔 븐만 드 그르 브스요.(한 번만 더 그래 보세요.) 네?”
김한별은 이 갈리는 소리를 내며 나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폭 쉬고는 신경질적으로 병마개를 돌렸다. 탄산이 뿜어지는 소리에 이어, 꼴꼴 흘러나오는 액체가 잔에 따라진다. 옅은 푸른빛에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게 척 봐도 시원해 보인다.
김한별은 잔 하나를 내밀면서 또 한 번 한숨을 흘렸다.
“어휴. 오늘도 대답 듣기는 글렀네.”
혼잣말처럼 말하기는 했지만, 분명 나 들으라고 한 소리다.
나는 가볍게 잔을 낚아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긴요? 아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오빠 기분도 싱숭생숭하시겠죠. 솔직히 저 오기 전까지 유정이 언니 생각하고 있으셨잖아요.”
…정답이다. 정확히는 생각하려는 찰나 김한별이 들어온 거지만.
나는 쓰게 웃었다.
“오늘은 좀 봐주라. 머릿속이 많이 복잡하거든.”
“이해해요. 그리고 됐어요. 이상한 짓거리로 분위기도 확 깨 놓고서는….”
김한별은 묘한 어조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새침하게 입을 연다.
“그런데, 유정이 언니는 왜 그런 거예요?”
“응? 아아. 열심히 싸웠잖아. 그런데 졌으니까 분했겠지.”
“으음….”
“갑자기 왜?”
꼴꼴거리던 소리가 멈췄다. 이어서 병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질문을 바꿀게요. 유정이 언니, 왜 이렇게 된 거예요?”
“…왜 이렇게?”
되물으며 시선을 돌리자 눈앞에 잔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잔을 들어 올렸다. 챙, 수정과 수정이 부딪치는 소리와 궁금하다는 음성이 이어졌다.
“그렇잖아요. 사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처음에 나름 잘 적응하던 거 아니었어요?”
“음.”
“뭐, 현이 오빠 말 들어보면, 극 초반에 가장 습득 속도가 빨랐다고도 하고. 은근히 경쟁 심리를 느꼈다고 하네요. 자신보다 항상 빠르게 익혔다면서.”
“맞아. 그랬지.”
문득, 옛날 오순도순 여관에 모여 활동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의 이유정은 병아리치고는 확실히 배우는 게 빨랐다. 애초 통과의례에서 김한별과 같이 가장 먼저 적응하기도 했고.
“그런데 지금은….”
김한별이 조심스레 말끝을 흐렸다.
나는 싱겁게 웃었다.
“야, 너무 안 좋게 만은 보지 마라.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유정이 걔, 나름 괜찮은 사용자야. 물론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유정이 언니가 괜찮은 사용자, 좋은 사람이라고요?”
김한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아마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춘 듯싶은데. 하기야 얘는 이렇게 말할 자격은 있지.
“내가 보기에 그렇다고. 너는 초반에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나는 가만히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차분히 머릿속을 더듬자 3, 4년 전의 기억이 천천히 회상되기 시작한다. 그때의 이유정은…. 이유정은….
“그러니까…. 처음 도시를 나갈 때였나? 아. 던전에서 렌가 무리와 마주쳤을 때였다.”
돌연 킥, 웃음이 터졌다. 그때는 확실히 놀라웠다. 여러 의미로 말이지.
“재능도 좋지만, 애가 겁이 없는 애였어. 고작 병아리 주제에 말이야. 내가 시켜서 그런 것도 있지만, 꼴랑 0년 차에 불과한 애가 괴물 사이로 그냥 막 들어가. 그리고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하지.”
“…그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잖아요.”
“맞아. 그러면 분명 위험한 때가 찾아오거든. 그런데 그것도 웃겨. 내가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빠지거나, 아니면 다치는 걸 감수하고 끝장을 내버린다고. 믿어져? 아직 현대의 티를 벗지 못한, 그것도 여자애인데. 자신보다 큰 괴물을 상대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계산을 해. 아. 이건 그냥 빠져야겠다. 아. 이건 이렇게 하면 이길 수 있겠다. 확실히 막무가내이기는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전투 감각이 장난이 아니야.”
“…….”
“그러면서도 애가 웃는다. 누구처럼 시키는 것도 못해서 울지도 않고, 알량한 자비심으로 손 속에 사정을 두지도 않아. 전투가 끝나면 가장 먼저 하는 게 부상 치료나, 전리품을 살피는 거야. 그러다 괜찮은 성과라도 발견하면 오빠 오빠 하면서 항상 활기차고 밝게 웃는다고. 그러니 이유정이야말로 진성 사용자지. 하하.”
“그런데…. 지금은 왜….”
결국에는 똑같은 질문이었다.
그런 이유정이 왜 지금 이렇게 됐냐.
갑자기 목이 바싹 타는 것 같아 나는 잔을 힘껏 들이켰다. 폭포수처럼 흘러 들어온 액체가 식도를 톡톡 쏘며 하강한다. 이내 그간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뜨자,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김한별이 어슴푸레 시야에 들어온다.
나는 아까 꺼내놓은 연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숨을 토하듯 뱉어낸 연기가 밤하늘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이해가. 사실 오늘 이벤트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저만 이러는 게 아니라, 모두가 같은 기분이에요.”
김한별은 계속 내 눈치를 살피면서 무언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렇게 재능도 있고, 적응도 잘하고, 그렇다고 오빠가 안 밀어준 것도 아니고. 그리고 어쨌든 여태껏 꾸준하게 따라오기는 했잖아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랬지.”
“그런데 오늘 전투는…. 물론 그 하승윤이라는 사용자가 상상 이상으로 강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그렇게 압도적으로….”
“…….”
이어지는 침묵이 갑갑했던 걸까. 김한별은 잔을 살짝 들어 올려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액체 속에서 일어나는 회오리가 마치 내 기분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김한별이 손을 멈췄다.
“아니면…. 무언가 다른 문제라도 있는 걸까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잔을 입가로 가져가면서 묻는다.
무언가 다른 문제라.
글쎄. 문제라기보다는….
“어쩌면….”
나는 잠깐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나 때문일지도 몰라.”
이제껏 가슴에 담아둔 말을, 조용한 입 밖으로 꺼냈다.
*
그 순간이었다.
김한별이 두 눈을 치뜨며 눈살을 찌푸렸다. 막 기울이던 술잔이 도로 내려앉는다. 아직 입에서 떼지도 못한 채 약한 기침이 터져 나온다. 그만큼 김수현의 말이 의외였고, 또 놀란 것이다.
그러나 놀란 사람은 김한별만 있는 게 아니었다.
“……!”
문밖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여인이 똑같이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틀어막고 있다.
그랬다. 반쯤 열린 문밖에는 다름 아닌 이유정이 서 있었다.
딱히 목적이 있어 찾아온 건 아니었다. 그냥 광장에서 도망친 후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어지러운 마음에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찾아온 곳이 바로 4층 집무실이었다. 그런 이유정이 도착한 시기는, 김수현과 김한별이 막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을 즈음.
처음 방안을 들여다봤을 때는 그대로 뛰쳐나갈 뻔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김한별이 있었고,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질투심에 불을 질러버렸으니까. 그러나 가만히 말을 들어보니 어느 순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여태껏,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몰래 이야기를 엿듣던 중이었다.
그리고 현재, 이유정은 혼란에 빠져버렸다.
하승윤 이야기가 나왔을 때만 해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무슨 말을 듣든 간에, 비수가 돼 상처 입은 가슴에 박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이유정이 약해진 게 김수현 때문이다?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말. 이유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온몸을 덜덜 떨면서도 살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어, 테라스 너머를 숨죽여 응시했다.
“오빠…. 때문이라고요?”
마침 간신히 정신을 차린 김한별이 의아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순간 김수현은 갑자기 피로한 기색을 비쳤다. 이어서 무언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얼굴은 여전히 같은 사람이었지만, 꼭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김수현 주변의 시간만 급격히 흐르기라도 한 것처럼, 흡사 최소 1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듯했다. 처음 보는, 처음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잠시 후.
“북 대륙에 있을 때, 이유정 별명이 뭐였는지 알아?”
김수현은 조금 뜬금없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마주 앉은 김한별과 밖에 서 있는 이유정은 자연스레 집중했다.
김수현의 말이 이어졌다.
“미친년이야. 피에 미친년. 광년으로 불렸다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스스로 어이없는지 선웃음을 짓는다.
“하하…. 그렇게 밝은 애가 피에 미친년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
“…그런데 웃긴 건, 그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는 거야.”
“사실…. 이요?”
김한별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김수현은 짧게 숨을 흘리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언제였던가. 절규의 동굴이었나? 웬 핏덩어리 괴물이랑 싸우는데, 이유정이 아주 신 나서 싸우더라고. 무난하게 처치도 했어. 그리고 깔깔 웃으면서 무너지는 시체를 계속 찌르는데….”
이유정은 연신 침을 삼키면서 말을 듣고 있었다. 한 마디로 놓치지 않으려는 듯, 벽에 등을 기댄 채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알아? 갑자기 왈칵 터져 나온 핏물을 보더니 지그시 눈을 감는 거야. …피할 생각도 없어 보였지. 거기서 나는 분명히 봤다. 쏟아지는 핏물 속에서, 이유정은 웃고 있었어.”
공교롭게도, 김한별의 목울대도 작달막한 고저를 그렸다.
“살의에 물든 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사용자 정보의 영향일 수도 있고.”
김수현은 완곡히 말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만 회상하면 입맛이 쓴지, 입을 쩝 다시면서 턱을 긁적거린다. 사실상 그때가 김수현이 이유정의 특수 능력을 인지했을 때였다.
“그래서 관리를 시작했지. 마검을 부서뜨리고, 윽박질러 순결의 머리띠도 억지로 채우고. 그런데도 결과가 피에 미친년이라. 하하.”
“오빠도 나름 걱정하신 거잖아요.”
김한별은 자신도 모르게 위로하는 어조로 말했다. 마지막 김수현의 웃음이 왠지 모르게 자조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김수현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이리저리 목을 돌리기 시작했다. 얼굴은 여전히 지쳐 있었다.
“그래. 바로 그게 문제였어.”
한껏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온다. 흡사 바닷속으로 끝없이 침잠해가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너도 알다시피 사용자가 강해지려면, 모름지기 여러 요소가 필요해. 클래스가 좋아야 하고, 클래스에 걸맞은 능력을 개화시켜야 하고, 특화 능력치도 신경 써야 하고. 아. 물론 경험 쌓는 것도 중요하지. 여하튼 이 모든 것들을 깊이 연구하고, 또 조화를 이뤄야만 진정한 강자로서의 반열에 들 수 있는 거야. 여기서 하나라도 빠지는 순간, 그건 반쪽 짜리에 불과해지지.”
그러니까, 이유정은 확실히 더 성장할, 강해질 방법이 있었다.
영리한 김한별은 곧바로 김수현의 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말인즉, 김수현은 이유정이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억지로 제한했다는 소리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분명 이유정의 정신을 보호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가장 중요한 특수 능력과 크게 어긋나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럼…. 만약에 오빠가 막지 않고 언니가 그대로 성장했다면….”
김수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최소한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겠지. 아니. 확실하게 강해졌을 거다. 비록 살인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오빠가 옆에 있으면 괜찮지 않았을까요? 설령 정말로 그런 성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빠 말은 잘 듣잖아요. 예를 들어 오빠가 언니랑 딱 붙어 다니면서 조절만 할 수 있다면….”
그러자 김수현은 잠시 말을 멈추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더니 머리를 갸웃한다. 김한별이 까닭 없이 긴장된 기분으로 김수현을 응시했다. 그것은 이유정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동안 ‘왜 자신이 아닌 안현을 데리고 다녔느냐.’ 는 차원에서 궁금한 부분이기도 했고.
김수현은 곧 싱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안 돼. 걔는 나랑 너무 잘 맞아.”
“잘 맞아서…? 그래서 안 된다고요?”
“아니. 데리고 다녀봤자 걔가 나한테 뭘 배우겠냐. 끽해야 어떻게 하면 더 잔인하게 행동할까, 얼마나 더 효율적으로 살인할 수 있을까. 이 정도겠지.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절대로 나아지지는 않았을 거다.”
“…….”
그렇게 말한 김수현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나 같은 놈이 이유정을 작정하고 키워봤자…. 오히려 걔 망치는 길이야.”
한 번 더 확정하듯 말하고는,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의자에 몸을 묻는다.
“하기야, 몇 번 쓰다 버릴 도구라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실제로 그냥 그대로 키워볼까 고민한 적도 많고. …그런데 근래 생각이 좀 확실하게 변해서 말이다.”
“…….”
“사실 나는 별로 상관이 없기는 해. 왜냐면 이미 한참이나 늦었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이유정은 아직 아니잖아. 이상하게 변하는 걸 보고만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애야. 사람이든, 사용자로든.”
“…….”
어느새 김한별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할 말이 없어서 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약간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조금 전도 그랬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왜냐면 이미 한참이나 늦었다고 생각하거든.’ 이라는 말이 그렇게나 위화감이 느껴질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상하고 있다는 것처럼….
잠시 후.
김수현이 천천히 머리를 젖혔다. 반쯤 감긴 두 눈이 칠흑색 밤하늘을 하염없이 응시한다. 김한별은 따라 시선을 올리려다가, 김수현의 눈을 유심히 살폈다. 무언가 공허해 보이는 눈동자였다.
이윽고 살짝 벌어진 입이 힘없이 움직인다.
“…뭐, 모르겠다. 요새 들어서는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지도, 아니 잘해왔는지도 모르겠고.”
그때였다. 돌연 김수현이 흠칫 몸을 떨더니 갑자기 방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눈이 정확히 문밖을 바라본다.
“거기, 누구야?”
“……!”
그 순간, 이유정은 소리 없이 숨을 삼켰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빼기는 했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올라간 양손이 봉긋한 가슴을 감싸듯이 눌렀다. 들키고 난 이후에야 자신의 심장이 쿵쾅쿵쾅 고동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김수현의 진심을 듣고 나자, 흡사 질식할 듯한 중압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 작품 후기 ============================
룰, 루 랄, 라 어디선가 들려오는
꿈, 만 같, 은 멜로디가 맘에 들어.
멈, 춰 버, 린 시곗바늘 사이로는
살, 금 살, 금 누군가 다가와.
어째서 이렇게도 가슴 뛰는 걸까?
다정한 말이라도 들, 은, 듯, 이.
달, 님까지 잠을 깨면 어떻게
Moon, Night, Moon Light Swee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