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34
00733 핏물 속에서 피는 꽃. =========================================================================
안개가 끼기는 했지만, 아침 하늘은 맑고 조용했다. 그러나 머셔너리 캐슬은 아침 댓바람부터 부산하기 그지없었다. 정신 없을 정도까지는 아니나, 이유정이 부상당한 소년을 인도하고 아래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클랜원이 중앙 광장에 모여 웅성거리는 중이었다.
“그러게요. 갑자기 아침부터 무슨…. 어?”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던 남다은이 쭈뼛쭈뼛 내려오는 이유정을 보며 아는 체를 했다. 그러자 무수한 시선이 계단으로 쏠렸다. 어제 축제 때문일까. 이대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던 이유정은, 시선을 받자마자 엉거주춤 계단을 내려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줄 수 있어?”
그러나 남다은은 어제 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시원하게 물었다.
“저도 잘은 모르는데….”
이유정은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남다은과 마찬가지로, 눈물 사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이다. 그러자 오늘 새벽 내내 심각히 고민하던 일이 돌연히 허무해졌다. 갑자기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네가 첫 발견자라며. 있는 그대로만 말해주면 돼.”
이어지는 채근에, 이유정은 마지못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새벽에 겪은 일을 설명했다.
“응….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심히 듣던 임한나는, 설명이 끝나자 빙긋 웃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서 있는 이유정을 살며시 끌어당겼다. 이유정은 깜짝 놀라 몸을 뺐지만, 부드러이 안아오는 손길을 이기지 못해 풍요로운 가슴에 고개를 묻고 말았다.
“왜 그렇게 온몸에 피를 묻히고 있나 했더니. 우리 찡찡이, 아침부터 고생했네?”
“찌, 찡찡이? …아. 그러고 보니 피.”
“괜찮아 괜찮아. 그런데, 어쩐 일로 이른 새벽부터 정원에 있었던 거야?”
“그, 그건.”
이유정이 말을 더듬었다. 사실대로 고하자니 창피하고, 딱히 마땅한 변명도 생각나지 않는다. 결국 아이처럼 고개만 파묻으며 어물쩍 지나가기만 기다릴 뿐. 그러나, 두근거리는 상황에서 의외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수련을 하고 있더군.”
허준영이 갑자기 끼어들어 불쑥 말을 꺼낸 것이다. 이유정은 멍한 눈으로 흘끗 옆을 흘겼다. 한순간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천천히 떠오른다.
임한나는 놀란 눈으로 이유정을 응시했다.
“어머. 수련을? 그 이른 시간에? 정말이니?”
“으, 응?”
이유정은 어설프게 반응했다.
“흠. 그런 타입으로는 안 봤는데. 근본까지 바보는 아니었나.”
“예.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처음 보고 저도 많이 놀랐지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죽어라 움직이고 있더군요.”
그렇게나 뜻밖인 걸까. 남다은이 팔짱을 끼면서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허준영은 한층 공손해진 어조로 말했다. 무서울 게 없는 ‘침묵의 집행자’이지만, ‘그림자 여왕’이나 ‘검후’ 앞에서는 적당히 사릴 줄도 안다. 왜냐면 그 두 명과 붙어서는 이길 자신이 없고, 거슬려봐야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허준영이 확언하자 사방에서 묘한 눈초리가 쏟아졌다. 시선을 느낀 이유정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계단에서는 또 한 명의 구원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흐아아암.”
하얀 사제 로브를 입은 단발 머리의 여인이 입을 앙증맞게 두드리며 계단을 내려온다. 광장의 관심은 곧장 안솔에게로 쏠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줄래?”
“응? 저도 잘은 몰라요.”
“그래도. 치료하러 다녀왔을 거 아냐. 본 그대로만 말해주면 돼.”
“으응….”
아까와 똑같은 문답.
안솔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 살리기는 했어요. 정신도 차렸고요. 현재 오라버니와 이야기하고 있을 거예요.”
“우선, 살리기는 했다고?”
“아아. 네. 상처가 엄청나게 심했거든요. 이미 몇 번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인데, 신기하게 어떻게 살았나 봐요. …어?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는 또 어떻게 온 거지?”
“…그리고?”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걸까. 남다은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사실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비추어보면 사건이 터졌을 경우 무조건 전체 회의가 소집된다. 특히 시급을 다투는 상황일 경우 회의는 물론, 임무 자체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기보다는, 이렇게 조금이라도 상황을 알아둠으로써 진행의 원활함을 도모하는 것이다.
원래는 고연주가 도맡아 하던 일이나, 오늘은 어쩐 일인지 모습이 보이지가 않아 남다은이 대신하고 있었다.
“응~. 그리고~. 맞다. 오라버니가 그 소년을 정화하시는 걸 봤어요.”
“정화?”
“네. 그거 있잖아요. 맑은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거.”
“혹시, 저번처럼 이상한 거에 씌어서 온 거 아니에요? 예를 들어 얼음의 숲에 들어갔을 때처럼….”
“아. 그건 아니에요. 저도 이상해서 여쭤봤는데, 오라버니가 아니라고 하셨어요.”
“그래? 그럼 어떻게 된 거지?”
안솔이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자 누군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나 누구도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모르는 건 모두가 매한가지인 상황이었으니까.
그때였다.
“클랜 로드께서 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모두 1층 회의장으로 모여주세요.”
가녀리면서도 편안한 음성이 침묵이 내려앉은 광장을 조용히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하녀 복장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우습게 볼 여인은 아니었다. 왼쪽 가슴에 그려진 붉은 문양은, 여인이 하녀의 장임을 뜻하는 동시, 고연주의 직속 휘하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남다은이 앞으로 나서면서 물었다.
“클랜 로드는 어떠신가요?”
“안타깝지만, 많이 안 좋으신 것 같네요.”
갑작스러운 질문임에도 하녀 장은 익숙하게 말했다. 사실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마다 항상 고연주와 하던 문답이었다.
“많이…. 안 좋으시다고요?”
“네. 겉으로는 표출을 안 하려고 하시는데, 은연중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계세요. 무언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드시는 것처럼…. 저번 용이 잠든 산맥 사건 때보다 더 심하신 것 같습니다.”
하녀 장은 매우 정확하게 김수현의 심리를 전달했다. 고연주가 괜히 하녀 장으로 배치해둔 게 아니었다.
허나 그건 차치하고서라도, 남다은은 쯧 혀를 차고 말았다. 용이 잠든 산맥보다 심하다는 말은, 거의 손꼽힐 정도의 사건이 터졌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우선은 회의장으로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서.”
“모두 들으셨겠지만, 이번 회의는 특히 입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럼 이만 들어가도록 하죠.”
고요한 음성으로 경고를 날린 후, 남다은은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상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상석에 앉은 김수현이 연초를 줄줄이 피우고 있었다. 무덤덤한 기색이기는 하나, 하녀 장의 말대로 알게 모르게 기분 나쁜 심기를 흘리고 있다. 무언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동자. 그리고 정적이 흐르는 회의장.
무어라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김수현은 어떤 말도 하지 않으며 연초만 태운다. 그저 가끔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모습만을 보여줄 뿐. 각 등급에 맞는 자리에 앉은 클랜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조용히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늘어가던 꽁초가 네 개째에 이르렀을 즈음.
탁탁, 탁탁!
문득 바깥에서 정적을 깨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웬 여인이 황급히 입구로 달려들어 온다. 아까 모습이 보이지 않던 고연주였다.
“수현! 없어요!”
고연주는 들어오자마자 뜬금없는 소리를 질렀다. 클랜원들이 시선이 자연스레 쏠렸다. 과연 어떤 게 없다는 말일까?
“잘 찾아봤습니까?”
“동, 서, 남, 북. 모든 외 도시를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어느 곳에서도 말씀하신 거주민 경비병은 찾지 못했어요. 소년을 데려온 후, 새벽을 기점으로 사라진 것 같아요.”
“이런 젠장.”
“우선 그 소년을….”
고연주가 말을 흐리자, 김수현은 연초를 비벼 끄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 사용자는 현재 요양 중입니다. 들을 말은 전부 들었고, 굳이 회의에 참가할 필요도 없어요.”
“하지만, 혹시 예전처럼….”
“한패는 아닙니다. 그냥 이용당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선 앉으세요. 이제 회의를 진행해야 합니다.”
“알겠어요.”
고연주는 얼른 자리에 앉았다.
김수현은 길게 숨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여러분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조용한 음성으로 운을 띄웠다.
“상황이 아주, 매우 급합니다. 시급에 시급을 다투는 일이니만큼, 먼저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상황 설명은 가면서. 현재 이 자리에서는, 바로 인선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순간, 회의장에 어수선한 소란이 일었다.
“참고로 출발 예정 시간은 내일 새벽입니다.”
한 마디 더 덧붙이자 웅성거림은 더욱 심해졌다. 미리 연락하기는 했지만, 용이 잠든 산맥 때도 7일이라는 준비 시간을 가졌다. 아니. 애초 탐험이든 원정이든, 김수현은 못해도 준비 하나만큼은 무조건 철저하게 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바로 내일 새벽에 출발한다고?
무려 하루도 안 되는 시간.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 놀라기에는 일렀다. 왜냐면 이어지는 인선 발표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근접 클래스는 김수현, 남다은, 허준영.
궁수 클래스는 임한나.
마법사 클래스는 김한별, 정하연, 제갈 해솔, 사라 제인, 하승우.
사제 클래스는 안솔, 신재룡.
특수 클래스는 백한결.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인선 발표.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세 가지였다. 우선은 언제나 이름을 올리던 고연주, 비비앙이 제외됐다는 것. 궁수는 선유운이 아닌, 임한나가 선발됐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마법사 클래스의 인선이 굉장히 파격적이라는 것. 모두가 궁금해했다. 왜 김수현은 이렇게 인선을 짠 걸까?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호명한 마법사 다섯 명은, 회의가 끝나고 한 명씩 집무실로 오세요. 이번 원정과 관련해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면담을 하겠다는 말로 궁금증을 일축한 김수현은, 고연주로 눈을 돌렸다.
“사용자 고연주. 지금 바로 마법의 탑, 이스탄텔 로우, 해밀 클랜에 연락을 넣어 자리 좀 마련해보세요.”
“네? 자리요?”
“각 클랜 최고의 마법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에….”
고연주는 볼을 긁적였다. 김수현의 말인즉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안 그래도 마법사가 가장 많은데, 또 마법사가 필요하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거기다 각 클랜 최고의 마법사라면….
“…알겠어요.”
허나 고연주는 이내 고민을 멈추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번에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의도가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래.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김수현은 단 한 번도 잘못된 결정을 내린 적이 없다.
그렇게 생각한 고연주가 곧장 자리를 떠나고, 회의장에는 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김수현이 입을 열었다.
“자세한 사정은 가면서, 또 돌아와서 말할 수 있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말씀드리겠습니다.”
낮고 차가운 음성이었으나 마력을 품은 목소리는 모두의 귓전에 똑똑히 박혔다. 클랜원들은 숨을 뱉을 생각도 못 한 채, 자신도 모르게 들려오는 말에 집중했다.
“물론 설레발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전후 사정을 들어본 결과, 어쩌면 우리 아틀란타에 위험한 위기가 닥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현재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수현은 말을 이으면서 권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는 두 눈은 일견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곧, 무검을 자루 채 잡아들었다가 힘차게 내렸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원정은 제가 직접 진두지휘하겠으며, 절대로 실패는 없습니다. 무조건 성공하고, 또 성공해야 할 임무입니다.”
탕!
칼자루와 탁자가 부딪치는 철성이 고요한 회의장을 왕왕 울렸다.
이윽고 들려온 “이상입니다.” 라는 말이 비로소 회의의 끝을 알렸다.
실로 오랜만에 나가는 왕의 친정(親政)이었다.
============================ 작품 후기 ============================
아. 입이 근질근질하네요. 독자 분들의 질문이 예상되고 저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후기에서 힌트를 드리면 재미가 없겠죠? 그리고 어제 내용상 스포일러가 있다고 혼나기도 했고요. 하하.
아. 예고 시스템은 현재 고민 중에 있습니다. 제가 그제와 같은 일이 재발될까 봐 두려워서 못하고 있어요. 독자 분들은 어떠신가요? 예고 시스템이 있는 게 편하신가요?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