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37
00736 비명의 초원. =========================================================================
– 왕국의 인간이 감히 이곳을 함부로 돌아다니다니, 간덩이가 부은 게로구나.
– 죽이려면 죽이시오. 어차피 더 이상 삶에 미련은 없으니.
– 응? 하하! 용감한 척을 하는 것이냐, 아니면 정말로 포기한 것이냐. 재미있는 애송이로다.
– 애송이라고 부르지 마시오! 나는…!
– 그래. 그대는?
– …됐소. 이제 곧 죽을 운명인데, 무에 그리 중요할까. 기왕이면 고통 없이 단번에 보내주면 고맙겠구려.
신 대륙 아틀란타(북 도시 비밀 도서관), ‘빅토리아 왕조 실록 – 18대 황제(147 ~ 147)’ 中 ‘폐(廢) 태자와 야만 전사 왕의 첫 만남.’
*
천천히 땅을 살펴보았으나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조금씩 갈라진 부분이 보이기는 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분명 초원인데, 흡사 거친 황무지처럼 지면이 쩍쩍 갈라진 상태라고나 할까. 그러나 균열은 극히 미약한 수준이고, 그걸 제외하면 그냥 보통의 초원이다.
“별거는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네….”
“걸리는 거라도 있어?”
“으응…. 딱 꼬집어 말할 수가…. 그러니까 꼭 누가 일부러 땅을 덮은 것 같아. 아니, 땅이 가라앉은 건가? 여하튼 처음이면 모르겠는데, 아까도 비슷한 흔적을 봤거든.”
임한나는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봤으나 이거다! 싶은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 초원에 자주 드나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땅속 괴물의 정보는 없는 것 같은데….
한 번 제대로 조사해볼까, 아니면 무시하고 행군을 지속할까. 머릿속에 무수한 생각이 스친다. 그 순간 진형 중앙에 멀뚱멀뚱 서 있는 안솔이 눈에 밟혔다. 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곧바로 안솔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허리를 붙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에?”
안솔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가, 멍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이어서 왜 그러냐는 듯이 두 눈을 깜빡깜빡. 귀엽네. 저 젖살 통통히 오른 볼을 꽉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야. 그럼 아마 어엉 울음을 터뜨리겠지? …속으로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안솔을 임한나의 옆에 고이 안착시켰다. 그리고 아까 본 땅을 가리켰다.
“자, 안솔. 저 땅을 봐라.”
“에…?”
“네 행운이 필요해. 보고 느껴지는 감을 얘기해줘.”
“에~?”
안솔은 ‘뭐 어쩌라는 거냐.’ 라고 말하는 듯한 기색을 비쳤으나, 이내 순순히 땅을 쳐다봤다. 그리고 한참 동안 가만~히 응시하더니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자 임한나의 안색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과연 무언가 느낀 게 있는 걸까?
잠시 후.
“?”
안솔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지는 동시, 정수리에 황금빛 물음표가 반짝 떠오른다. 심각해 보이는 눈은 여전히 땅을 대차게 노려보고 있었으나, 몸의 반응은 정직했다.
“무, 물음표?”
한소영이 황당해 하는 음성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흘렸다. 자식이, 그냥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
“우선은 가는 게 낫겠다.”
“오, 오라버니. 잠시만요.”
“괜찮아. 시간이 없어서 그래.”
“아, 아니! 정말로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아니, 알아낼 수 있을 거라니. 이 무슨 어이없는 솔직함인가. 억지로 출발하려고 했지만, 안솔은 두더지가 되고 싶은지 어느새 바짝 엎드려 땅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오므려 “쉬~.”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기까지. 저런다고 감이 올 것 같지는 않은데. 문득 선율이 끅끅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리자 낯이 화끈해진다. 나는 팔짱을 끼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였다.
“삐아!”
땅을 관찰하던 안솔이, 갑작스럽게 새된 비명을 지르며 발라당 나동그라졌다. 임한나는 깜짝 놀라는 와중에도 신속히 안솔을 끌어내고, 나는 반사적으로 무검을 뽑아 땅을 겨눴다. 안솔을 제외한 전원이 삽시간에 각자의 무기를 겨눈 채 조심스레 물러난다. 그리고 한동안 기다려보았으나, 어떤 전조도 감지되지 않았다. 초원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안솔?”
“에, 에?”
“안솔?”
“비, 비명! 따, 땅속에서 갑자기 비명이…!”
두 번에 걸쳐 이름을 부르자 안솔이 뜻 모를 소리를 했다. 나는 계속 검을 겨눈 채로,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비명 비슷한 소리 들으신 분?”
그러나 모두가 고개를 젓는다. 물론 나 또한 듣지 못했고. 그럼 안솔이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디텍트(Detect )에는 이상이 없다고 나오는데요?”
“마력 감지에도 걸리는 게 없습니다.”
선율과 신재룡이 차례대로 말했다. 안솔은 당황한 낯으로 고개만 번갈아 돌리다가,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보였다. 눈도 놀란 토끼 눈이고, 아직도 가슴을 들썩이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머셔너리 로드. 우선은 이 초원을 벗어나는 게 좋겠네요.”
그때 후드를 벗어 젖힌 한소영이 사방을 고요히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머리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무언가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무조건 내 기억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는 이제껏 뼈가 저리도록 겪었으니까.
“행군에 특히 주의해주시고, 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우선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로 하고, 나는 바로 행군을 재개했다.
*
초원 초입에서 벗어나 저녁 무렵이 될 때까지, 우리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행군했다. 누구 한 명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고, 주변을 경계하면서 묵묵히 진군했다. 그러나 이후 이렇다 할 이상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고, 결국에는 적당한 장소에서 야영하기로 했다. 사실 사방이 트인 장소라 딱히 고를 필요도 없었지마는.
그렇게 모닥불을 피우고, 침낭을 정리하는 등 부지런히 야영 준비를 하는 동안, 저녁 식사가 준비됐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번 원정 내내 식사 준비는 이유정의 몫이었다.
“응? 꽤 괜찮네요?”
제갈 해솔이 수저를 입에 물은 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음식 그릇은 쳐다보지도 않던 허준영은, 반신반의하는 기색을 비치더니 스튜를 한 숟갈 떠 조심스레 입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놀란 눈으로 이유정을 바라본다.
“믿을 수 없군. 여전히 맛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 딱 감고 먹을만한 수준은 돼. 임한나가 도와줬나?”
“아, 아하하.”
이유정은 그저 어설프게 웃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행군 첫날 이유정의 요리 솜씨는 도저히 눈뜨고는 못 볼 수준이었다. 그냥 굉장히, 엄청나게 맛이 없었다. 보다 못한 임한나가 식사는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나섰지만, 그건 내가 엄하게 단속했다. 약속을 물릴 수는 없으니까.(덕분에 그날 내내 원망 어린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다.)
그래도 나름 노력했는지, 오늘 저녁은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적어도 첫날처럼 안솔이 대성통곡을 하면서 토악질을 하는 사태까지는 발생하지 않았다.
마치 정액을 음미하듯 야릇하게 입을 우물거리던 선율은, 목울대를 꼴깍 움직이며 미소 지었다.
“확실히 많이 발전했네. 습득이 빠르네요?”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렇게 이상했어요?”
“네.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대접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음식이었어요.”
“…….”
선율의 말은 신랄했고, 이유정은 힘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한 찰나, 냠냠 소리 내어 먹던 선율이 갑자기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돌연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살그머니 내밀었다. 혀에는 진득한 스튜 국물이 묻어 있다. 이내 양손으로 각각 브이(V)를 그리면서 동공이 풀린 눈을 연기한다.
“아헤가오 더블 피스!”
…미친년. 병신 같은 년. 알아듣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려고?
괜스레 민망한 기분에 시선을 돌리자, 마침 식사를 마친 한소영이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응시하자 눈이 정화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릇을 내려놓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조신하면서 기품이 넘친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는지요.”
스리슬쩍 말을 걸었다.
“…네. 확실히 첫날보다는 괜찮네요.”
한소영은 나를 흘끗 쳐다보고는 입을 혀로 살짝 핥으며 말했다. 괜찮다고만 했지 입에 맞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유정은 음식을 남기지 않고 먹어준 게 기뻤는지, “스튜 더 드릴까요? 아직 많이 있는데.” 라고 말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차. 그러고 보니.”
한소영은 양손으로 침착히 그릇을 가리면서 새로운 말을 꺼냈다. 아주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이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기억나시나요?”
“아침이요?”
“사용자 안솔의 일이요.”
“아, 예.”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걸 들었는지, 임한나 옆에서 한창 음식 투정을 부리던 안솔이 귀를 쫑긋 세웠다. 아니, 모두가 한소영에게 주목하고 있다. 애초 행군 내내 거의 입을 열지 않아서, 과연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다.
“가볍게 넘기기에는, 그 일이 계속 마음에 걸리네요.”
“계속이요? 혹시.”
“아니요. 저도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어요. 그런데 도시에 있을 때, 오늘 겪은 상황과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서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어차피 그러려고 했다는 듯, 한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전이었나…. 산하 클랜에서 실종된 동료를 찾아달라고 부탁해왔어요. 실종 장소는 이 초원.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갑자기 동료 한 명이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사라졌다고요?”
이상하다는 생각에 반문하자 한소영의 아담한 어깨가 들먹여진다.
“네. 그 누구도, 심지어 불침번도 인지하지 못했어요. 그냥 혼자서 홀연히 사라진 거죠. 다만….”
“…다만?”
“그날 잠들기 전까지, 간간이 이상한 비명을 들었다는 말을 했다고 하네요.”
“이상한 비명이라면….”
“땅속 비명이요. 아까와 똑같은 상황이죠.”
“…실종된 사용자는 찾았습니까?”
“아니요. 찾지 못했어요.”
“…….”
한소영은 약간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로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이 끝난 순간, 야영지 주변에 갑자기 침묵이 내려앉았다.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한소영 목소리 자체가 차갑고 고요하다 보니,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치는 기분이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봤으나 떠오르는 기억은 없다.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흘깃 시선을 돌리자 덜덜 떨면서 임한나를 꼭 부여잡은 안솔이 보인다.
“여러분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경계 인원을 두 배로 늘리겠습니다. 그리고 안솔?”
“……?”
“오늘 밤은 무조건 내 옆에 붙어 있어. 알겠지?”
“으, 응!”
안솔은 아주 약간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싱숭생숭한 식사 시간이 끝난 이후, 초원에 완연한 밤이 찾아왔다.
*
삼엄한 경계가 이어지던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침낭에서 꼬물꼬물 기어 나온 안솔은, 맑은 하늘에 뜬 찬란한 해를 보고 안도의 숨을 흘렸다. 혹시 누가 잡아갈까 벌벌 떨면서 새벽을 보냈는데, 이렇게 무사히 따뜻한 아침 햇살을 받으니 그렇게나 기분이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식사가 여전히 형편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정말로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이윽고 김수현의 출발 신호를 기점으로 원정대의 행군이 시작됐다. 그리고 어제와 같이 주변을 경계하며 착실하게 나아갈 즈음, 갑자기 임한나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전방에서 여아를 발견했다는 말이 이어졌다.
‘웬 여아?’
그 순간 돌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도시 주변도 아니고, 초원에 여아 혼자 있다는 건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될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안솔은 당황하지 않았다. 김수현과 임한나가 잠깐 자리를 비우더니 정말로 한 명의 여아를 데려온 것이다. 얼굴이나 옷이 조금 더러웠지만, 그래도 선한 눈에 귀여운 인상의 거주민 여아였다.
“어떻게 된 거죠?”
“캐러밴에서 짐꾼으로 데려온 것 같은데, 아마 버림받은 것 같습니다. 기억나는 대로 길을 되짚어서 오는 중이었다고 하더군요.”
들려오는 말소리에 안솔은 그렇구나 이해하는 동시에 안쓰러운 감정을 느꼈다. 확실히 실제로 벌어질 법한 일이기도 했거니와, 딱히 해를 끼칠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아니. 애초 김수현이 친히 데려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안솔은 일말의 의심을 거뒀다. 이후 이런저런 말이 오고 갔지만, 결국에는 데려가는 것으로 결론이 모였다. 여아가 요리에 자신 있다고 말한 탓에, 안솔은 망설임 없이 찬성표를 던졌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행군.
진형을 맞추며 걸어가면서 안솔은 신기한 기분을 느꼈다. 권한을 부여 받은 입장을 제외하면, 거주민은 태반이 사용자를 어려워한다. 한데 여아는 조금도 그런 기색 없이, 붙임성 있는 미소를 띤 채 한 명씩 붙들고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수현과 도란도란 말을 나눌 때는 질투심이 일었지만, 허준영이 곤란해 할 때는 웃기기도 했다.
그렇게 한 명씩 돌아가면서 어느새 후방까지 들어온 여아는, 다양한 보석을 보여주는 김한별에 질렸는지 안솔로 시선을 돌렸다. 안솔이 최대한 자상하게 웃어 보이자, 방실방실 웃으며 곧장 달려온다. 그리고 안아달라는 듯 두 팔을 내밀어, 안솔은 얼른 여아를 안아 들었다. 해맑은 미소와 마주하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언니 언니!”
“으응? 왜?”
“언니는 누구야?”
“나? 글쎄~.”
마침 슬슬 행군이 지루하게 느껴지던 터라, 안솔은 장난스레 말했다.
그러자 여아가 안솔을 빤히 응시한다.
“언니는 누구야?”
“누굴까? 한 번 알아맞혀 볼래?”
“언니는 누구야?”
“누구게~.”
“언니는 누구야?”
“누….”
별생각 없이 말을 잇던 안솔은 돌연히 말끝을 흐렸다.
“언니는 누구야?”
“…….”
뜻 모를 서늘한 기운이 갑자기 등골을 훑는다. 침을 꼴깍 삼킨 안솔은 살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언니….”
여아가 한층 가라앉은 음성으로 안솔을 불렀다.
“혹시, 죽고 싶어?”
안솔은 반사적으로 지르려던 비명을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글생글 웃고 있던 여아가, 어느 순간 표정이라고는 한치도 찾아볼 수 없는, 한껏 정색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아래로 축 늘어진 눈매가 까닭 없이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안솔은 본능적으로 여아를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했는지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 자신이 걷고 있는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 세상에 오직 자신과 여아만 남은 듯한 요상한 감각.
안솔의 표정이 마음에 든 걸까.
여아가 히죽 웃었다. 얼굴을 온통 일그러뜨리며 웃는다. 작달막한 입은 좌우로 길게 찢어져 괴물의 주둥이처럼 변하고, 눈은 핏줄이 터졌는지 시뻘겋게 변색한다. 이윽고 쫙 찢어진 입이 흐물흐물 움직인다. 안솔은 온 머리카락이 하늘로 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면…. 살고 싶어?”
살고 싶으냐는 한 마디. 안솔은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언니는 살고 싶구나.”
흐흐, 흐흐.
아이의 웃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음침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있잖아, 있잖아. 언니야. 그럼….”
소곤소곤.
무언가 엄청난 비밀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여아는 천천히 몸을 들어 안솔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그리고.
“눈, 떠.”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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