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39
00738 비명의 초원. =========================================================================
–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왜 자꾸 따라오는 거요?
– 어이, 폐 태자. 지금 어디를 가는 중이지?
– 내가 먼저 묻지 않았소. 살려준 거 아니었소?
– 아닌데?
– 허, 참. 명색이 야만 왕이라는 사람이 어지간히도 할 짓이 없나 보구려. …뭐, 됐소. 현재 꽃의 마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오.
– 마녀? 마녀는 왜?
– 만나서 도움을 구할 예정이오. 이대로…. 아, 마침 다 왔군.
– 어디…. 응? 이 숲은 또 어떻게 된 거야?
– 검은 안개가 흐르는 숲…. 신비로운 곳이군. 여하튼 제대로 찾아온 거 같은데.
– 신비는 개뿔…. 이봐, 설마 여기로 들어갈 생각인가? 그냥 그 마녀보고 나오라고 하면 안 되나?
– 좋은 생각임은 분명하나, 가능성은 현저히 낮을 거라 생각되오만.
– 웬…. 믿어지지가 않는군. 이런 음침한 숲에 사람이 산다고?
– 보통 사람이 아니라 마녀요. 아무튼, 그럼 나는 이만 들어가 보겠소. 굳이 말리지는 않겠으나, 여기서부터는 따라오지 않는 게 좋을 거요.
– 왜?
– 듣기로는, 마녀는 외부인을 심히 배척하고, 또 굉장히 장난이 심하다고 들었소. 숲으로 들어가는 순간, 어떤 일을 당할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소.
– …….
신 대륙 아틀란타(북 도시 비밀 도서관), ‘빅토리아 왕조 실록 – 18대 황제(147 ~ 147)’ 中 ‘폐(廢) 태자와 야만 왕, 검은 안개가 흐르는 숲을 앞두고.’
*
초원의 기습 사건 이후, 우리는 초고속 행군을 시작했다. 아니, 행군이 아닌 이동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행군하다가 수송 능력을 사용하고, 또 행군하다가 수송 능력을 사용하고. 약간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제갈 해솔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면 제갈 해솔은 연신 한숨을 흘리면서도(사실 행군 내내 구시렁거리기는 했다.), 필요할 때마다 수송 능력을 발동해주었다. 아직 0년 차라 그런지 내가 기억하는 수준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나, 그래도 이게 어딘가. 우리는 엄청난 속도로 초원을 벗어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못해도 35일은 걸릴 거리를 무려 20일로 단축하는 쾌거를 올렸다. 물론 아직 목적지에 다다른 건 아니나, 부지런히 행군하면 오늘 안에는 도착할 수 있다. 이런 엄청난 시간 단축을 선사한 제갈 해솔은 원정대 내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선율은 수송 능력을 배우고 싶어 안달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 한소영도 깊은 관심을 표했을 정도였다.
점심 즈음 한 번 더 수송 능력을 사용한 후, 부지런히 행군하자 우리는 비로소 목적지 부근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눈앞으로 거대하게 이어지는 산맥이 나타난 것이다. 이 산을 넘으면 길었던 여정이 일차적으로 끝난다. 물론 돌아가는 경우는 예외로 치면 말이지.
산은 상당한 크기를 자랑했지만, 두어 시간을 꼬박 오르니 산봉우리는 가볍게 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간을 들여 완전히 넘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산에서 내려와 평탄한 지형으로 들어가자 광대한 들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후 약 한 시간 정도 추가로 행군하고 나서, 나는 마침내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남쪽으로 끝없이 뻗어 나가는 들 이룬 벌판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숲이 자리를 잡고 있다.
오랜만이어서 그런 걸까. 애초 인연이 없는 곳이기는 하나, 이렇게 목전에서 보게 되자 까닭 없이 어색한 기분이 든다. 강철 산맥과는 비교할 수 없으나 숲은 그런대로 상당한 길이를 자랑했고, 특히 우거진 정도가 매우 심해 시야가 심히 제한 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슨 일이에요?”
“도착했나요?”
그때였다. 행군이 정지되자 동료들이 하나하나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나는 말하는 대신 검지로 숲을 가리켰다. 아직 어느 정도 거리가 남아 있었으나, 육안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 오늘은 들어갈 생각이 없기도 했고.
“연기…?”
누군가 넋을 잃은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랬다. 무엇보다 숲에는, 희미한 빛을 띤 몽실몽실한 흰색 연기가 자욱이 깔려 있었다. 특이한 점은 연기가 가끔 하늘 높이 올라가도 결국에는 지상으로 되돌아올 뿐, 절대로 외부로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숲을 중심으로 고고하게 흐르는 게, 신비함을 넘어서 어딘가 모르게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연기가 흐르는 숲…. 혹시 알고 있는 정보가 있나요?”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한소영이 고요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바짝 긴장하며 몸을 돌렸다. 왜냐면 이제부터는 한치의 말실수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충 나오는 대로 막 던지다 보면 한소영의 ‘초감각’에 걸릴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하다. 그러니 최대한 진실만을 말하면서, 나도 여기 처음 왔다는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품에서 기록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가지고 온 두 개의 기록 중, 실록이 아닌 후일담 격으로 쓰인 기록이었다.
“우선 이 기록을 들려드리도록 하죠.”
이윽고 나는 기록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물론 사족은 적당히 제외했다.
『…그 장소의 이름이 오르기 시작한 건, 빅토리아 왕조의 유일한 폐(廢) 태자에 관한 사료가 발견됐을 때였다. 애초 워낙 즉위 기간이 짧았던 왕이라 고증할 수 있는 자료가 전무했는데, 이는 역사에 관심을 가진 자라면 충분히 관심을 가질만한 일이었다.
…역시나 설화로만 전해지는 폐 태자, 야만 왕, 꽃의 마녀에 관한 논란은 크게 불거졌고, 모두가 사실 여부를 가리고 싶어 했다. 결국, 왕국의 주관 하 조사대가 결성돼 논란의 장소로 출발하게 됐는데, 이게 제 1차 원정대였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무수한 고난이 있었으나, 원정대는 굴하지 않고 끝끝내 연기가 흐르는 숲에 도착했다. 그러나 숲으로 들어간 원정대는 몇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고, 왕국은 늦게나마 상황을 파악하기에 이른다. 실은 왕국도 일각에서 몰래 원정대를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용히 묵인한 것은, 들어가는 원정대마다 족족 소식이 끊기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숲으로 들어간 수많은 원정대는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람을 잡아먹는 흉흉한 장소라는 소문이 만연해졌다. 현재는 접근 금지 구역으로 지정됐으나, 혹시라도 훗날 이 숲으로 들어갈 이들에게 고한다.
단 한 명 살아나온 생존자의 자격으로 말하자면, 살고 싶으면 정확히 숲까지만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바란다. 감히 추측건대, 숲은 일종의 경고에 불과할 것이다. 만일 그 이상으로 들어간다면, 숲에서 겪은 경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직 원한 어린 마녀의 비웃음만이 그대를 반길 것이니.
경고하고, 또 경고한다. 숲의 안쪽은 우리가 궁금해하는 비밀이 묻혀 있는 장소이나,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이기도 하다.』
읽기를 마친 후 나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기 부근에서 야영하도록 하죠. 정확히는 숲 바로 앞에서요.”
그러자 서너 명이 눈을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시간이 많이 흐르기는 했으나 해는 아직 중천에 걸려 있었다. 나는 기록을 톡 건드린 후, 도로 집어넣으면서 말을 이었다.
“시험해볼 게 있거든요.”
“시험이요?”
정하연이 반문했다.
“예. 살아 돌아온 소년에게 들은 결과, 저 숲을 통과하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일을 겪었더군요.”
“흥미로운 일이요?”
“물론 제 기준에서요. 우선 들은 말만 정리해보면…. 저 연기는 사용자의 마력을 완벽하게 제한하는 효과가 있으며, 사람의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네?”
나는 기억하는 내용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오롯이 소년에게 들었던 내용만 정리해 전달했다. 그리고 설명을 들은 동료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모두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할 수 있는 선까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볼 생각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확인이라면…. 설마?”
정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휘휘 주변을 둘러본다. 나는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설마 같은 동료를 실험용으로 사용하겠나요. 그냥 여러분이 조금만 준비해주면 됩니다.”
이어지는 의아한 눈초리를 뒤로한 채 나는 흘끗 한소영을 흘겼다.
한소영은 예의 표정 없는 눈으로 조용히 숲을 응시하고 있었다.
*
준비라고 해봤자 별거는 없었다. 그냥 주변을 돌아다니는 작은 짐승이나 적당한 크기의 괴물을 데리고 오라고 했을 뿐.
동료들은 궁금한 빛을 지우지 못했지만, 그래도 착실히 내 말을 따라주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카오스 미믹에서 밧줄 서너 개를 꺼내 들었다.
“머셔너리 로드! 구해왔어요!”
그럴 즈음, 선율의 명랑한 음성이 들렸다.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온 선율은 조심스레 바닥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삽시간에 모여든 동료들은 아래를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왜냐면 작달막한 들짐승 세 마리가 서로 꼭 붙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는 제각각 달랐으나 대강 여인의 팔뚝만 한 정도였다. 자그마한 눈과 앙증맞은 분홍빛 발바닥, 그리고 부드러운 하얀 털로 덮인 들짐승은 일견 상당히 귀여웠다. 꼭 토끼를 보는 듯하다고나 할까. 길쭉한 귀가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지.
“끼잉….”
한 걸음 다가가자 흠칫 떨며 몸을 움츠린다. 가장 큰 짐승이 다른 두 짐승을 꼭 껴안고 있는 게, 아마 단란한 짐승 가족이 아닐까 싶다.
“꽤 빨리 구해왔네요.”
“운이 좋았죠. 열심히 찾고 있는데, 마침 오순도순 열매를 까먹는 짐승 가족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냉큼 잡아왔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아아. 어찌나 가엾던지. 원래는 새끼만 잡아오려고 했는데, 남은 두 마리가 구슬프게 울면서 쫓아오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젠장. 괜히 기분 이상하게 만들고 있어.
이윽고 나는 우선 새끼로 보이는 짐승을 잡아 준비한 밧줄로 꽁꽁 묶었다. 물론 끌어당길 부분은 남겨뒀다. 그러자 부모 토끼가 난리를 쳤지만, 마찬가지로 한 놈씩 차분히 밧줄로 꽉 묶어버렸다. 그렇게 몸을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짐승 가족은 낑낑 울면서 한없이 불안해했다.
“오, 오라버니….”
안솔은 무언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손을 저었으나, 나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우르르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숲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짐승은 빽빽 울부짖으며 온몸을 비트는 등 심히 저항했지만, 이미 묶인 상태에서 무얼 하겠는가. 한 놈씩 손으로 잡아 휙휙 던지자, 세 짐승은 곧 물처럼 흐르는 연기 안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숲 내부로 이어진 밧줄을 조심조심 내려놓은 후, 나는 살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우우….”
“흠.”
그리고 조금은 흥미로운 기분을 느꼈다.
일부는 걱정 가득한 낯빛으로 숲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특히 안솔 같은 경우는 대놓고 원망 어린 눈초리를 보낼 정도. 그에 반해, 다른 일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제갈 해솔이나 한소영은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숲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지금 고작 짐승을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속으로 쓰게 웃으며 나는 야영지를 설치할 것을 지시했다.
여하튼 여기까지 큰 사고 없이 도착했다고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 켠에 남은 걱정이 가시지를 않는다. 왜냐면 아직 본격적인 공략은 시작하지도 않았으니까.
1회 차에 괜히 접근 금지 구역으로 지정된 게 아니다. 끝끝내 공략했다고는 하나, 그 누구도 성공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일 우리가 돌파해야 할 숲은 바로 그런 장소였다.
지금까지는 가진 사용자 정보를 바탕으로 어떻게든 성공할 자신은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나도 자세히 아는바 없는, 또한 자신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그래서 조화를 중시했고 조합을 우선했다. 혼자서 어떻게 해보려는 것 보다는, 모두가 협동해 헤쳐나가는 것이 해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여기서부터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최대한 간접적으로나마 알려주고 확인시켜주어야 한다.
…실은, 약간은 기대하는 것도 있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 보면, 혹시 내가 생각지 못한 해결책을 누군가가 제시해주지 않을까.
‘너무 나약한 생각인가?’
그렇게 생각을 끝낸 나는, 야영지 설치를 거들고 식사까지 마친 후 바로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 작품 후기 ============================
아, 깜짝 놀랐네요. 업데이트 후 딜레이가 있었나 봐요. 바로 보이지 않아서 꽤 당황했습니다. 하하.
그럼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