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41
00740 안개의 숲. =========================================================================
– 그래서, 이대로 왕위를 빼앗기기 싫으니 도와달라?
– 맞소. 꽃의 마녀는 여러 마법에 능통하거니와, 마물을 부릴 줄 아는 일인 군단의 능력을….
– 마물이 아니라, 어지간한 생물의 통제권을 강제로 빼앗고 부리는 거예요. 인간 같은 고 지능의 생물은 어렵지만.
– 그렇소? 흠. 옆 대륙의 대 마법사는 인간의 정신까지 잠식해 조종한다던데.
– 아, 그 늙은 영감이요? 마지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도 한 번 가보기는 했어요. 근데 그건 마법 도시와의 합일로 억지로 이루어낸 경지잖아요. 그러니까 딱 그 도시에서만 가능한.
–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모르겠소.
– 괜찮아요. 이해하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으니까. 그리고 그 요정 여왕에 미친 변태 영감 얘기는 더는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때 기억만 떠올리면 구토가 치솟아서.
– …알겠소.
–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가 당신을 도와주면 저는 어떤 이득을 받을 수 있나요? 폐 태자?
– 여태껏 이어져 온 마녀 사냥을 철폐하고, 마녀의 존재를 인정하겠소. 그리고….
– 아하~. 음지에서 양지에서 끌어올려 주시겠다. 좋아요. 도와드리죠.
– …응? 아니 아니, 정말이오?
– 네. 무슨 문제라도?
– 그게, 너무 쉽게 허락을 받은 것 같아서.
– 마녀는 개인의 입장보다는 일의 가능성을 우선시하죠.
– 가능성이라. 자신감이 대단하군. 왠지 벌써 왕위를 되찾은 기분이구려.
– 그럼요. 뭐가 문제에요? 폐 태자가 있으니 명분도 확실하고, 제 마법과 군단도 있고, 그리고 수인의 왕까지 있는데?
– 응? 수인의 왕? 그게 누구….
– 어? 자, 잠깐…!
– 저기, 혼자서 먼 산을 쳐다보는 사내요.
신 대륙 아틀란타(북 도시 비밀 도서관), ‘빅토리아 왕조 실록 – 18대 황제(147 ~ 147)’ 中 ‘드러나는 야만 왕의 정체.’
*
동료들의 호들갑과 화정의 폭풍 같은 잔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행군을 재개할 수 있었던 건 무려 20분이라는 시간을 소비한 후였다.
– 너, 말조심해! 자꾸 수틀리게 하면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상태 이상 효과에 걸려보고 싶은 거야?
화정의 최후통첩에 나는 속으로 거듭 사과하며 행군에 속도를 붙였다. 이윽고 머릿속을 울리는 씩씩거림이 서서히 잦아들 즈음, 돌연 바로 옆에서 누군가 꼼지락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니 한껏 긴장한 눈동자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백한결이 보였다. 문득 동그랗게 오므려진 앵두 빛 작은 입술이 눈에 밟혔다. 그리고 어여쁘게 솟은 콧날과 아담한 어깨, 흰 살결….
“응? 형님?”
형님이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끈적한(?) 시선을 느낀 건지 백한결은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머리를 세게 흔들자 살포시 미소 짓는다. 웃는 것도 예쁘네.
“죄송해요. 자꾸 불안해서요. 어디서 괴물이 나올지 모르니까….”
“으음.”
과거 안개가 흐르는 숲을 지날 때는 엄청나게 고생했다는 것으로 기억한다. 마력이 묶이고 상태 이상에 걸린 상황에서 전투를 치른다? 그때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여하튼 그렇게 생각해보면 현재의 상황은 확실히 의외였다. 허나 아주 납득 못할 일도 아니다. 왜냐면 그때와 현재는 ‘시기’가 다르니까.
과거처럼 첫 발견 후 몇 년이 지나고, 이후 몇 번이고 실패하면서 달성 조건을 알아내 공략한 게 아니었다. 이번 ‘야만 왕의 무덤’ 공략을 결정하면서, 나는 모든 조건을 맞춘 채 최대한 빠르게 달려왔다.
물론 아직 초입인 만큼 속단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만일 안개의 숲을 벗어날 때까지 습격을 받지 않는다면, 적어도 내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은 가질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백한결의 정수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원래는 한 번만 어루만지려고 했는데, 워낙 머릿결이 좋다 보니 두 번 세 번 만지게 된다.
“괜찮아. 혹시 나와도 옆에서 지켜줄 테니까.”
“아….”
이상한 신음 내지 마. 이대로 살금살금 내려가 귓불도 건드려보고 싶어지잖아. 반응이 궁금해.
“그러니까 너는 걱정하지 말고 방어막에만 집중하면 돼. 알겠지?”
“네, 네!”
백한결은 흠칫 고개를 움츠리면서 얼굴을 다소곳이 붉혔다. 배시시 웃는 모습이 꼭 아기 강아지를 보는 듯했다. 그러자 자꾸만 울리고 싶다는, 못되기 짝이 없는 검은 욕망이 뭉클뭉클 치솟는다.
…아무래도 나는 변태가 맞는 것 같아.
*
“…….”
눈에 흐르는 차가운 공기를 느낀 즉시 살며시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가 보이는 동시, 나는 가벼운 신음을 흘렸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뜻 모를 노곤함 때문이었다. 어제 강행군을 했다고는 하나, 원래 잠을 자고 일어나면 몸이 개운한 법이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피로가 느껴진다는 건….
‘화정이 말이 맞았다는 건가.’
침낭 속에서 천천히 몸을 푼 후,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아직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시간인지 살을 스치는 공기가 차다. 거기다 연기까지 흐르고 있으니 한층 더 춥다고 느껴졌다.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니었는지, 주변에 보이는 침낭은 하나같이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안으로 쏙 집어넣고 잠든 모양이다.
나는 뻐근한 몸을 풀면서 걸어가다가, 한순간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야영지 중앙에는 총 5명의 동료가 서로 사이 좋게 꿈나라를 여행하는 중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5명씩 3교대로 경계를 돌렸는데, 어떻게 모두가 잠들 수 있는 걸까. 심지어 신재룡도 나무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흠, 흠!”
“음…? 허, 헉!”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신재룡은 살짝 눈을 떴다가, 돌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건장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허둥거리더니 나와 눈을 맞추자 벌떡 몸을 일으킨다.
“크, 클랜 로드!”
“많이 피곤하셨나 보네요.”
“죄, 죄송합니다. 조, 조금 전까지는 깨 있었는데…!”
“괜찮아요. 아직 거스름돈은 많이 남아 있으니, 앞으로 조심해주시면 됩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신재룡의 어깨를 두드렸다. 잠깐이기는 했으나 신재룡의 낯이 딱딱히 굳었다. 그래. ‘거스름돈’의 의미를 깨달았다면, 방금 내 말이 위로가 아닌 경고라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이다. 왜, 이런 말도 있잖은가. 전투에 진 건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를 소홀히 한 건 용서할 수 없다고.
“앞으로는 정말로 주의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나저나, 몸은 괜찮아요?”
신재룡은 아차 한 표정을 짓더니 얼른 머리를 숙였다. 한동안 몸을 두루 살피는가 싶더니 한결 안도한 기색을 보였다.
“후,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좋네요. 그럼….”
우선 신재룡은 이상 무. 다음으로, 나는 주변에 널브러진 네 명을 응시했다. 신재룡은 멋쩍게 웃고는 얼른 다가가 한 명씩 깨우기 시작했다.
“자자, 일어나세요. 어서!”
이유정과 김한별을 깨우는 걸 보다가, 나는 곤히 잠들어 있는 사라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사라의 허벅지를 베고 있는 선율을 발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부스스 눈을 뜬 선율은 자신을 건드리는 발을 보며 낯을 찌푸렸다. 그리고 찢어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몸을 일으켜 입을 크게 벌렸다. 마치 고함이라도 치려는 듯이.
그러나.
“이이이이이이이익!”
“……?”
“으으? 으아아아아아?”
“…….”
한순간 이건 또 무슨 장난인가 싶었다. 그런데 표정을 보니 장난이 아니다. 선율은 스스로 놀란 얼굴로 입을 더듬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선율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첫 피해자가 발생했다.
“아무래도, 침묵과 비슷한 상태 이상에 걸린 것 같은데요.”
“나도 그런 것 같은데.”
갑자기 인근에서 누군가 불쑥 말을 걸었다. 허준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딱히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데…. 아니, 잠깐만. 왜 저렇게 비틀거리는 거지? 평소에 애용하는 긴 검은 흡사 지팡이처럼 앞을 두드리고 있었다.
“허준영?”
“실명했다. 눈이 보이지 않아.”
허준영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용케도 내 옆을 찾아오더니 풀썩 주저앉는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괜찮나?”
“어쩔 수 없지. 벗어나면 회복된다니 기다리는 수밖에. 아무튼, 당분간 도움이 되기는 어렵겠다.”
마지막 말을 하면서 허준영은 약간 언짢은 기색을 비쳤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근접 계열이 실명했다는 건, 그야말로 치명적인 상태 이상이니까.
그때였다.
“한별양? 한별양!”
황급한 음성에 시선을 돌리니 신재룡이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보였다. 사라와 이유정은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옆을 쳐다보고 있었고. 보아하니 김한별도 상태 이상에 걸린 모양이다.
“클랜 로드! 한별양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고요?”
“예, 예! 뺨을 쳤는데도 웃으면서 자고 있습니다!”
“…수면 이상인가.”
나는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입맛이 쓰다. 침묵, 실명, 수면 등등. 시작부터 가장 좋지 않은 상태 이상이 찾아왔다. 미리 말을 해둔 덕에 큰 혼란까지는 번지지 않았으나, 원정대 전투력의 급감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아직 모두의 상태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방금 소란에 잠이 깼는지 어느새 한 명 한 명 침낭 속에서 기어 나오고 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야영지에 여러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머, 머리카락이? 머리카락이 왜 이래?”
남다은은 하얗게 탈색한 머리카락을 부여잡으며 혼란스러워했다.
“내 다리가! 내 다리가아아아!”
제갈 해솔은 털이 숭숭 솟은 다리를 보며 절규하는 중이었다.
“…….”
정하연은 말이 없었다. 눈은 뜬 걸 보니 의식은 있는데 전혀 움직이지를 못했다. 몸이 마비되는 상태 이상에 걸린 것이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정하연에게 나는 괜찮다고 속삭이며 다독였다.
‘그냥 여기서 한 번 해제하는 게 좋지 않을까?’
– 우선은 기다려. 아직 습격을 받은 건 아니잖아. 나로 인한 체력 소모가 그렇게 쉽게 회복되는 줄 알아? 지금 네 몸 상태 보면 몰라?
‘그래도….’
– 이렇게 한 번 걸린 이상, 다음에 걸리는 시간은 더욱 단축된다는 말이야. 그리고 아직 걸리지 않은 놈들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그냥 최대한 빠르게 벗어나는 게 정답이야.
예상은 했지만, 피해 정도가 너무 심각했다. 그냥 내가 한층 부담을 받더라도, 여기서 한 번 상태 이상 효과를 제거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화정의 반대로 우선은 지켜보는 것으로 결심했지만.
이윽고 뒤늦게 일어나 얌전하고 조신하게 하품하는 백한결을 보며, 혹시 여성화가 된 게 아닐까 기대…. 아니, 걱정하고 있을 즈음.(과거에 성별이 전환되는 상태 이상에 걸렸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기록에는 야만 왕의 여성화에 관한 기록이 나와 있다.)
“아.”
그 순간, 문득 한 여인의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한소영은? 이른 시간이기는 하나, 이 정도의 소란에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나는 주변을 둘러보기를 멈추고 한소영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침낭을 발견했을 즈음, 살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침낭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은 거의 평평한데, 오직 중앙 부분만이 둥그렇고 볼록하게 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큰 소리로 불렀으나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볼록이 솟은 부분만이 올라왔다가 내려가기를 규칙적으로 반복할 뿐.
실례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는 천천히 침낭을 걷었다. 그러나 한소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용자 정보로 확인한 키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윽고 의아한 생각에 더더욱 침낭을 아래로 걷은 순간이었다.
“우웅….”
불룩 솟은 부분까지 걷어낸 순간, 갑자기 웬 꼬마가 보였다. 말 그대로, 정말로 꼬마였다. 한 8살 정도 돼 보이는 작달막한 여아가, 온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돌연히 정신이 멍해졌다. 그, 그러니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머리를 힘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재차 쳐다봤으나, 여아는 여전히 꼬물거리며 침낭에 고개를 묻고 있다. 찬란한 윤기가 흐르는 칠흑색 머리카락과 가녀린 몸. 흡사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교하게 만든 인형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톰하게 돋은 연한 붉은색 입술이 꼬마 주제에 은은한 색기를 흘린다.
갑자기 손이 덜덜 떨린다.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자꾸만 까닭 없이 머릿속이 새하얗게 칠해졌다.
“웅?”
그때였다. 침낭 안으로 침투한 찬바람을 느꼈는지, 여아가 앳된 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뜨더니,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가 뜨며 어렵게 나를 응시한다. 이내 아등바등 몸을 일으킨 여아는 한 손으로 눈을 비비고, 남은 손으로 입가에 묻은 침을 닦는다.
잠시 후.
흑 수정을 연상케 하는 올망졸망한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여전히 눈을 비비는 여아의 입술이 천천히 열린다.
그 순간, 나는.
“머쪄너리 로드…?”
쿵! 심장이 힘차게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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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서서히 업데이트 시간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역시 적고 싶은 내용을 적으니 좋네요. 손가락이 춤을 춘답니다. 하하. 이렇게 보면, 역시 저는 로리유…?
아, 아닙니다.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ㅌ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