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42
00741 Unpredictably. =========================================================================
– 그런데요, 있잖아요. 그쪽은 왜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인 척해요?
– 계속 짖어라, 마녀. 그 여린 목이 비틀리고 싶으면 말이지.
– 아니,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종족이 궁금해서 그래요. 호 족? 묘 족? 견 족? 랑 족?
– 이익…!
– 그만하시오.
– 응? 폐 태자? 왜 저를 방해하시는 거죠? 혹시, 질투?
– 야만 왕이 싫어하지 않소. 원래 마녀라는 족속은 그리 말이 많소?
– 아니요. 느낌이 꽂힌 상대한테만 말이 많아져요.
– 첫 눈에 반했다는 거요?
– 뭐, 해석하기 나름이죠. 갖고 싶다고나 할까?
– 그게 그거 아니겠소. 그나저나 참, 도둑놈 심보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 왜요? 저처럼 예쁘고, 똑똑하고, 몸매도 좋은 여인이 호감을 갖고 있다는데?
– 그건 인정하는데, 나이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소?
– …나이?
– 내 듣기로, 본래 마녀는 수백….
– 당신, 죽고 싶나요?
신 대륙 아틀란타(북 도시 비밀 도서관), ‘빅토리아 왕조 실록 – 18대 황제(147 ~ 147)’ 中 ‘왕국으로 가는 길.’
*
들어오기 전, 앞서 말을 해둔 게 정답이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상태 이상에 걸리니 동료들은 한참 동안 혼란스러워했다. 그나마 미리 경고해놨기에 망정이지, 그냥 바로 들어갔으면 사기가 바닥을 쳤을지도 모른다.
결국 수십 분을 진정하는 데 소비한 후, 우리는 겨우 야영지를 정리하고 행군을 시작할 수 있었다. 김한별, 정하연, 허준영 등 정상적인 행군이 불가능한 이는 동료들이 한 명씩 업고 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혼란은 간신히 가라앉는 듯했다.
…아니. 사실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
힐끔.
“…….”
또 힐끔.
숲은 고요했고, 행군도 어제처럼 조용했다. 그러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동료들은 몇 걸음 걷다가도 은근한 곁눈질로 누군가를 계속 흘깃거렸다. 시선이 모이는 중심에는 바로 한소영이 있었다.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은은한 색기를 흘리는 그런 차갑고 성숙한 여인이 아닌, 키가 50 센티미터는 줄어든 채 아장아장 걷는 여아가.
상태 이상, 시간 역전(逆轉) 현상. 사용자 입장에서 보면 절대로 좋은 일은 아니었다. 적당히 어려졌다면 모를까, 갓 초등학생 1학년 된 몸으로 무얼 하겠는가. 애초 입고 온 로브와 갑옷도 맞지 않아 벗어버린 상황. 허나 그럼에도 옷이 길다. 헐렁헐렁한 옷을 질질 끌면서 힘겹게 걸음을 내딛는데, 정말이지 무척 귀여웠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정말 너무 좋다. 나만 이런 게 아니라 동료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같이 도와주고 싶어 안달 난 얼굴로 한소영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사방에서 쏟아지는 눈초리 속에서, 한소영은 꿋꿋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려졌다는 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지 모조리 무시하며 정면만 응시한다.
하기야 오늘 새벽 자신의 상태 이상을 확인했을 때도, 한소영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썼다. 침낭도 척척 개고 밥도 냠냠 먹었다. 흡사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정작 나는 그 모습도 어여쁘다고 생각했지마는. 그래. 젖살이 통통히 오른 발그레한 볼과 앳된 인상의 한소영은….
아, 정말 어떻게 저렇게 귀여운 걸까? 한 번 보면 귀엽고, 두 번 보면 사랑스럽고, 세 번 보면 깨물어주고 싶고, 네 번 보면 까닭 없이 감사하게 된다. 아마 한소영은 어렸을 때 표정이 풍부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저렇게 색다른 매력이 철철 흘러나오는 게 아닐까? 전, 후, 좌, 우, 360도 어디를 봐도 예쁨이 팡팡 터지잖아.
“악.”
그때였다. 한창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즈음, 돌연 한소영이 앞으로 풀썩 넘어졌다. 길이 워낙 울퉁불퉁하다 보니 옷이 걸려 넘어진 모양이다. 금세 고개를 들었으나, 발갛게 변한 앙증맞은 코와 꼭 깨문 입술을 보자 안쓰러움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괘, 괜찮으세요?”
결국 참지 못했는지, 임한나가 선수를 치고 말았다.
“혹시, 아니 그냥 저랑 같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지만, 임한나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한소영이 주섬주섬 일어나면서 손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 지그시 노려보자, 임한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애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성격이었지.
이윽고 행군이 재개됐으나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멈췄다. 한소영이 또다시 넘어진 것이다. 이번에도 금세 고개를 들었으나 어느새 눈은 그렁그렁하게 변했다.
좋은 일은 아니었다. 냉정히 말해서 우리는 현재 숲의 한복판에 위치한 상태였다. 온갖 상태 이상에 걸려 있는데, 습격이라도 받으면 그야말로 끝장이다. 안 그래도 행군 속도가 한층 느려지지 않았는가. 화정의 말대로 최대한 빨리 벗어나는 게 해답인 상황에서, 이런 지체는 전혀 달갑지 않다. 한소영도 그걸 알고 있기에 갑갑해 하는 것일 테고.
이러한 자기 합리화(?)를 거치고 나서, 나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머, 머쪄너리 로드…? 합.”
한소영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그대로 입을 닫았다. 아마 앳되디 앳된 자신의 음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부디 양해를.”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후, 허락도 받지 않고 몸을 덥석 잡아버렸다. 한소영은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뜨더니 “으으으응.” 허리를 요염이 비틀기 시작했다. 그대로 천천히 들어올리자, 이제는 숫제 바동바동 용을 쓴다. 마치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듯이.
“시, 싫어….”
“……?”
“이, 이런 머쪄너리 로드는 싫어요….”
“으어어어어어어어!”
그때였다. 싫다는 말을 들었는지,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선율이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상태 이상 침묵에 걸린 주제에, 얼른 내놓으라는 듯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달려온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와 음험한 욕망을 느낀 걸까. 한소영은 깜짝 놀라더니 “힉.” 소리를 지르며 곧장 내 목을 껴안았다. 아이 특유의 달콤한 내음이 콧속을 물씬 찌른다.
“에….”
선율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나를 선택한 한소영의 행동에 상처를 받았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나는 뭇 동료들의 질투 어린 시선을 받으며 의기양양이 걸음을 옮겼다. 한소영은 무언가 상당히 언짢아하는 기색을 비쳤지만, 얌전히 내 품에 안긴 채 입술만 짓씹었다. 이내 긴 한숨을 흘리는 소리와 동시, 가슴에 고개를 묻는 감촉이 느껴졌다. 심장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만 같다.
그리고 재개된 행군은, 그야말로 행복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중간에 갑갑해 하는 것 같아 소매를 걷어주자 고사리 같은 손이 드러났다. 나는 절로 거칠어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행여나 놀랄세라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소영의 손을 살포시 감쌌다. 그러자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일부러 눈을 맞추지는 않았다. 왜냐면 나도 모르게 표정이 이상해질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가슴에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끼면서, 나는 안개가 흐르는 숲을 가로질렀다.
*
사실 행군 와중 엄청나게 고민하기는 했다. 다름 아닌, 한소영을 안고 가는 시간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찾아든 것이다.
그러나 끝끝내 이긴 건, 감성이 아닌 이성이었다. 무엇보다 이틀 차에 접어들자, 화정의 말대로 체력이 저하되는 걸 점차 체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며 안개의 숲을 벗어나는 데 집중했고, 그 결과 해 질 녘 즈음에는 연기가 흐르는 지역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마력이 묶인 점을 고려하면 이것 또한 쾌거라 볼 수 있었다. 과거에 어렵게 통과했던 것과는 달리, 단 한 번도 습격을 받지 않고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처음 결심했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한 점이 없잖아 있었는데, 점점 내 결정에 확신이 서는 게 느껴졌다.
아무튼, 안개의 숲을 벗어난 이후 우리는 30분을 추가로 행군했다. 아직 주변 풍경이 변한 건 아니나, 안개가 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탁 트였다. 이내 자연적으로 형성된 적당한 공터를 발견한 후, 나는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나부터 시작해, 화정의 힘을 이용해 동료들의 상태 이상 효과를 곧장 해제해주었다. 동료들은 약 며칠은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지, 뛸 듯이 기뻐하며 환호했다. 심지어 한소영마저도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원정대의 전투력을 회복시키자 극심한…. 정도까지는 아니나, 완연한 피로가 온몸을 엄습했다. 하기야 거의 이틀 동안 화정을 내내 돌렸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윽고 나는 잠깐 쉴 것을 지시한 후 가까운 나무에 등을 기대앉았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정상으로 돌아온 걸 기뻐하는 동료들을 응시하려는 찰나, 허준영의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응?”
“그냥 궁금해서. 저 숲을 벗어나면 무언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
“더 가야 한다는 소리겠지. 애초 그렇게 듣기도 했고.”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안개가 변수이기는 했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너무 무난하다. 네가 회의에서 우리한테 겁을 준 것에 비해서 말이지.”
“겁이라니….”
“이상해, 정말 이상해…. 저 안개는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한 느낌이 든단 말이지. 아, 이건 흘려 들어도 좋아.”
흘려 들으라고는 했으나, 허준영의 말은 내 정신을 일깨웠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상하기는 했다.
혹시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처음부터 되짚어보자.
처음 소년이 찾아왔을 때, 안솔은 이미 몇 번은 죽었어야 할 상처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생존한 상태로 찾아왔고, 확인한 결과 몸이 장악된 상태였다. 그리고 소년을 데리고 온 거주민 경비병을 찾지 못했다. 이 점을 내가 알고 있는 기억과 합치면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 바로 소년의 캐러밴이 숲 너머의 무언가를 깨웠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깨어난 무언가는 왜 소년과 경비병을 굳이 아틀란타로 보낸 걸까? 이 부분은 확신할 수는 없으나, 가지고 온 ‘빅토리아 왕조 실록’을 보면 대강은 유추할 수 있다. 아마….
바스락, 바스락.
한창 생각에 잠긴 찰나, 돌연히 수풀을 밟는 소음이 신경을 거슬렸다. 소리는 차차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
시선을 올리자, 성숙한 여인으로 돌아온 한소영이 바로 앞에 서 있다.
“많이 피로해 보이시는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예? 아, 괜찮습니다.”
의외의 질문이기는 했으나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한소영은 여전히 고요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럼 마력의 활성화는 어떠신가요?”
“마력이요? 그거야….”
이상 없다고 말하려는 찰나, 나는 입을 닫았다.
…마력의 활성화?
갑자기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한소영은 괜한 말을 꺼내는 성격이 아니다. 말인즉 마력 상태가 괜찮으냐고 물어본 게 아니라, 감지를 활성화했는지 안 했는지 물어본 것이다. 현재 마력은 체력 회복 겸 잠시 비활성화로 놔둔 상태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마력을 활성화했다. 그러나 사방으로 돌려봐도 딱히 감지되는 건 없었다. 아주 살짝 허준영을 건드려보았으나, 허준영은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도 감지되는 게 없다는 의미 같다.
이윽고 숨을 삼킨 순간, 한소영이 천천히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가까이했다.
“좋은 상황이 아니에요. 그냥 듣기만 해요.”
그리고 한 손으로 어깨를 짚으면서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안개를 벗어났을 때부터,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어요.”
============================ 작품 후기 ============================
새벽에 차를 마시면서 생각해보니, 문득 옛날 일이 떠오르네요. 1차, 2차 로리 전쟁이 말이죠. 사실 그때 제가 너무 과하게 반응하지 않았나 반성했습니다. 후기에 적은 BL에 남성 독자 분들은 물론, 여성 독자 분들까지 상처를 입으셨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우리는 분명 합의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독자 분들의 니드는 다양하거니와, 요즘 그 니드를 서서히 깨달아가는 것 같거든요. 그래요. 그건 BL이 아니었어요. 하하.
아무튼, 이제 이르면 2회, 3회 안으로 적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그 회를 기점으로, 메모라이즈의 새로운 파트이자 완결로 달리는 기나긴 신호탄이 쏘아질 것 같아요. 조금은 홀가분하기도 하고,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네요. 🙂
아, 그리고 독자 님들. 죄송합니다. 다가오는 11월 28일(금요일)에 하루 쉽니다. 개인적인 일이 겹쳐서,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 늦게 돌아올 것 같아요. 11월 29일(토요일)에 연재를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의 너른 양해 부탁 드려요.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