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45
00744 역사(歷史). =========================================================================
“우욱.”
갑자기 치솟는 구역질에 허리가 저절로 고붓이 휘어지며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그런다고 구토감이 사라질 리는 만무했으나, 이유정은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불쾌한 감각을 겨우 삼켰다. 하지만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 이상한 공간에 들어온 후, 어느 순간부터 느낀 감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 온몸을 거침없이 헤집는 것 같다. 강철 발리스타가 서너 대는 박힌 듯하다. 마치 복부가 퍽 터지는 것 같은, 끔찍하리만치 생생한 느낌.
“우욱! 웨에에엑!”
“유정아!”
결국 이유정은 참지 못했다. 간신히 허리를 펴는가 싶더니, 무너지듯이 주저앉는다. 그 와중 어떻게든 참으려 이를 악물어 봤으나 결국에는 토사물을 토해내고 말았다. 시큼한 냄새와 비릿한 피 내음이 섞여 들어오자 토악질은 계속 반복됐다. 그렇게 속을 게워내니 약간 괜찮아지기는 했지만, 이내 다른 감정이 찾아와 빈자리를 대신했다. 눈앞에 질펀히 흩어진 더러운 무언가를 보자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것은 일종의 자괴감이었다.
‘안솔도 참아냈는데….’
누군가는 등을 두드려주고, 또 누군가는 괜찮으냐고 말하면서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유정은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한 찰나, 또다시 복부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고, 기껏 세운 팔이 절반으로 꺾였다. 갑자기 까닭없는 무력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이유정은 남몰래 입을 깨물면서 양손을 바스러지도록 움켰다.
“무슨 일이야. 괜찮나?”
그때 괜찮으냐고 물어오는 김수현의 음성이 들렸다. 이유정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거의 애걸하다시피 해 간신히 얻어낸 자리였다. 도움이 되지 못할망정, 아니 애초 도움을 주지도 못했으니 폐는 끼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김수현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이유정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아!”
“아닌 것 같은데. 너무….”
“아니! 정말로 괜찮아!”
“…….”
이유정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한동안 물끄러미 응시하던 김수현은,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내뱉고 몸을 돌렸다. 이유정은 필사적으로 호흡을 추스르며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낙인이 찍힌 부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복부는 여전히 시리듯이 아팠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통에 젖은 동료들을 이끌고, 끝없이 이어지는 길에서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눈앞으로 세월의 흐름을 간직한 낡은 고성이 보였다. 거리는 약 50 미터 정도. 정면 방향, 시커먼 어둠이 드리운 입구를 보며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심안의 영향으로 금세 가라앉기는 했지만, 이내 나도 모르게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입구를 통과했다.
풍경은 더 이상 변화하지 않고, 스치듯이 지나쳤다. 좌우로 늘어선 기둥을 지나 삽시간에 회랑을 통과하자 비로소 거대한 철문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각 모서리에 형이상학적인 문양이 각인된, 5 미터는 넘는 육중한 문이었다. 막 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찰나, 문득 거칠어진 숨이 느껴졌다. 안개를 통과하면서 체력이 하락해 만전의 상태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힘들다기보다는, 누군가 내 안에서 숨이 차 몰아 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가슴을 가라앉히며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쫓아온 동료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낯을 찌푸리고 있는 게, 이상한 눈으로 문을 응시하고 있다. 고통, 증오, 분노, 상실…. 심지어 원망까지.
“들어가겠습니다.”
조용히 뇌까린 후, 나는 주저하지 않고 문을 밀어젖혔다. 그리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둥글고 넓은 방이 나타났다. 주변을 둘러볼 필요는 없었다. 앞쪽으로 큼직한 제단이 있었고, 그 제단에 누군가가 걸터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무검을 치켜들며 조심스레 전진하기 시작했다. 동료들도 모두 무기를 들어 나를 따라온다.
우리가 들어온 걸 모르는 걸까. 거리가 20 미터도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단의 인영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올려다보니 형상이 또렷이 눈에 들어온다.
과연 잠자는 숲의 공주님이 이랬을까? 인영의 정체는 소름이 끼칠 만큼 신비롭고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젊은 미인. 푹 눌러쓴 마녀 모자 아래, 풍성하게 흘러내린 보라색 머리카락이 아름답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보는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공허해 보이고, 눈은 꼭 감고 있었다. 마녀의 얼굴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지 않고 있다.
그때였다.
“이…!”
누군가 앞으로 달려나가려는 찰나, 나는 곧장 손을 뻗어 제지 신호를 보냈다. 주변에서 전해지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은 게, 아무래도 여기까지 오면서 약간 흥분한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조금 전 마녀가 깨어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가만히 보면 조용히 잠을 자는 것 같으나 방금 아주 살짝 움직였다. 왼손에 쥔 모래 시계를 한 바퀴 돌린 걸 확실히 놓치지 않았다.
잠시 후.
“…의외네.”
높은 톤의 여성스러운 미성(美聲)이 고요한 공간을 왕왕 울렸다. 흡사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음성. 이어서 마녀가 천천히 눈을 뜨자, 가는 속눈썹 아래 텅 빈 듯한 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살짝 고개를 든 마녀가 차분히 우리를 훑는다.
“여기까지 온 애들은 대부분 죽자사자 달려들던데….
이렇다는 건 스스로 다스렸다는 소리겠지. 그래. 너희는, 아니 너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어.”
그렇게 말한 마녀는 오연히 다리를 꼬았다. 짙은 색 로브가 아래로 펄럭이고, 눈부신 종아리가 훤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윽고 양손을 제단에 짚은 마녀는 정확히 나를 응시했다.
“그래서, 어때? 수백 년 전의 역사를 되짚어, 이렇게 또 한 번 내 앞에 선 기분은?”
“……?”
“너는 그때의 기분을,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겠니? 세 번째 폐 태자?”
“…….”
세 번째 폐 태자라. 나는 곧바로 마녀의 말을 이해했다. 첫 번째는 폐 태자 본인, 두 번째는 앞서 들어온 캐러밴 중 한 명,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나. 말인즉, 현재 내 육체가 폐 태자의 영혼과 연결됐다는 소리였다.
“앞서 들어온 15명은 어떻게 됐지?”
나는 대답 대신 무검을 곧추세웠다.
“내가 먼저 물었어. 대답하지 않는다면, 나도 말해주지 않을 테야.”
그러나 마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기분, 감정 따위 몰라.”
“대답이 부족해.”
“모른다고 했잖아. 그냥 멍청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멍청하다고? 폐 태자가?”
침착히 머리를 끄덕이자 마녀의 눈이 살며시 커졌다. 찰나의 순간, 공허하기만 하던 보랏빛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잠시 후, 나를 빤히 바라보던 마녀의 흰 뺨이 돌연 “푸.” 부풀었다.
“꺄하하하하하하하!”
흡사 비명을 지르는 듯한, 찢어지는 웃음이 허공을 가르며 장내에 가득히 울렸다. 무에 그리 웃긴지, 아까 느낀 느낌과는 다른 발랄하면서도 활기찬 소리였다. 이제는 숫제 허리까지 꺾어가며 박장대소한다.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발을 구르자, 마녀의 육감적인 몸매가 약간 작은 로브로 인해 심히 도드라진다.
“모두 전투 준비!”
더 두고 볼 수만은 없어 나는 바로 지시를 내렸다. 동료들은 기다렸다는 듯 마녀를 향해 무기를 겨눴다. 공교롭게도, 마녀 또한 서서히 진정하고 있었다.
“아아, 가련한 폐 태자…. 그렇게나 폼을 잡고 달려오더니, 정작 후세에 인정받지도 못했어. 그래, 멍청해. 정말로 멍청하지.”
마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다가, 문득 색정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눈에는 아직 닦지 못한 눈물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싸울 거야? 나는 너랑은 싸우기 싫은데. 어차피 소용없는 승부이기도 하고.”
“무….”
“그리고 아직 대답도 안 했고. 듣고 싶으면 무기를 내려.”
“…….”
아마 혼자였으면 벌써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작정 달려들 수는 없다. 어쨌든 임무를 맡은 입장이니 앞서 들어온 15명의 행방은 알아야 했고, 한편으로는 마녀의 정보가 읽히지 않아서였다. 이곳은 현세가 아닌 마녀와 폐 태자의 공간이다. 홈 그라운드가 아닌 이상, 그리고 마녀가 전력을 알 수 없는 이상 바보 같은 짓은 지양해야 한다. 어쩌면 마녀는 마볼로는 가볍게 넘어서는 수준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를 갈며 무검을 내렸다. 마녀는 꽃이 피는 것처럼 활짝 웃으며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응. 착해, 착하다. 착한 애는 좋아.”
“15명.”
“아이, 급하기는. 뭐 좋아. 걔들은 너희처럼 신사적이지가 않아서 말이지. 나를 보더니 발정 난 수캐처럼 달려들지 뭐야? 그래서~. 마침 준비하는 것도 있고 해서, 모조리 잡아다가 양분으로 썼지.”
“양분…. 아니, 준비?”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무언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원래대로라면 마녀는 이 공간에 갇힌 채 봉인된 상태였을 터. 나는 앞서 들어온 캐러밴이 잠든 마녀의 영혼을 깨운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마녀의 말은 초점이 맞지 않는다.
“너는 최근에 깨어난 게 아니었나?”
“깨어나…? 아~. 맞아. 폐 태자 놈, 설마 이런 성과를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
마녀는 무언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손에 쥔 모래 시계를 공중으로 던졌다가, 할퀴듯이 잡아챈다.
“그런데 네가 말하는 놈들이 나를 깨운 건 아니야. 깨어난 건 훨씬 전, 그러니까 몇 달 전부터일걸?”
“뭐라고? 어떻게?”
“그건 나도 몰라. 설마 이런 아스트랄 차원까지 간섭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아무튼, 나한테는 고마운 존재지. 덕분에 복수를 할 수 있게 됐으니까.”
“…….”
복수라는 말이 나왔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무언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아직 소개를 안 했네. 얘, 일어나. 일어나렴. 손님이 오셨단다~.”
그렇게 말한 마녀는 자신의 심장을 톡톡 건드리더니 갑자기 제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바닥에 가볍게 안착한 후, 배시시 웃으며 모자를 벗는다. 주변에는 마녀와 우리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그럼 소개할게. 얘가 바로….”
그때.
“으, 응?”
돌연히 마녀가 주춤했다. 고개를 숙이더니 볼록하게 도드라진 자신의 가슴을 응시한다.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으응? 지옥?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망쳐? 도망치라고? 내가 왜?”
“저놈이 누군데?”
중얼중얼 혼잣말을 잇던 마녀는, 중간에 흘끗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는 도로 시선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치는 감촉이 느껴졌다.
“머셔너리 로드. 이상해요. 어서…!”
속삭이듯 들려오는 한소영의 음성.
그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
마녀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 흐아아아아아아악!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기껏 친구를 깨웠더니, 깨어나자마자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 그놈이다! 그놈이잖아! 어떻게, 어떻게? 분명 그때 지옥으로 보내버렸을 텐데?
“…으응? 지옥?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아, 아니지. 도망쳐! 어서 빗자루를 꺼내서 도망치라고!
“도망쳐? 도망치라고? 내가 왜?”
– 빌어먹을! 설명할 시간이 없어! 저놈은 너도나도 감당할만한 놈이 아니라는 말이다!
“저놈이 누군데?”
내면의 울림이 머릿속을 왕왕 울리는데도, 마녀는 태연히 고개를 갸웃했다.
– 그게, 아니! 앞!
그러한 찰나, 울림이 황급히 경고했다.
천연스레 고개를 든 마녀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는 김수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녀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동요도, 약간의 당황도 보이지 않았다.
“후유, 별로 싸우기는 싫은데….”
이윽고 몸이 두둥실 뜨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공중으로 솟구친다. 김수현도 있는 힘껏 도약했으나, 마녀는 차분히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주문도 외우지 않았는데 손의 주변으로 영롱한 푸른 물방울들이 생성되더니, 이내 아래로 줄기줄기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작은 파동으로 변한 물줄기는, 여지없이 김수현의 몸을 꿰뚫었다.
“거봐. 소용없다고 했잖아.”
그것을 확인한 후, 도로 제단에 올라온 마녀는 딱하다는 듯 싱거운 한숨을 흘렸다.
“소용없다고?”
그러나, 돌연 등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흠칫 몸을 떨었다. 이어서 공중에서 허공에 녹아들 듯이 흩어지는 김수현의 모습이 보인다.
“일루전? 아니!”
“정말로?”
놀란 마녀의 음성과 김수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겹쳤다.
그리고.
뿌드드드드득!
“깍!”
차마 뒤돌아보기도 전에, 목 부근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지고 혀가 길게 빼어졌다. 그런 마녀가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던 건, 크게 화내는 내면의 음성이었다.
– 젠장! 이 멍청한 년! 여기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에에!
– 메타몰포시스(Metamorphosis)!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독자 님들 정말 너배추하시네요!
저번 후기에 그렇게 목탁을 드렸는데, 아직도 그 사이트에 코멘트가 남아 있어요.
그런데 육히려 성지 순례라니요?
혹시 지워주시지 않을까 기대했던 제가 바가위였어요.
요즘 자정에 업데이트하려고 정히힝 노력하는데, 마음이 아프네요.
마지막으로, 목탁 드리겠습니다.
아니, 앞으로 계~속 그 코멘트가 남아 이상,
저 또한 앞으로 자정에 업데이트하려는 노력이나 간간이 연참을 하려는 노력을,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ㅌㅌ.
PS. 독자 분들. 저는 괜찮으니 싸우지 마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