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48
00747 근원(根源). =========================================================================
뺏은 장비를 대충 던져두고 쳐다보자, 가지런히 무릎을 꿇은 마녀가 보인다. 살짝 숙인 얼굴은 하염없이 땅을 응시하고 있다. 꼭 이지를 상실한 사람처럼 반응이 없는 게,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듯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전의를 잃은 건 어디까지나 마녀일 뿐이니까. 그 증거로 마녀가 무릎을 꿇은 지면에서 검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킬.”
그때, 마녀의 눈빛이 갑작스럽게 일변했다. 이윽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더니, 시꺼멓게 변색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한다. 이제는 숫제 전신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올 정도였다.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다.
악마 14 군주인 플루톤이 깨어난 것이다.
“하…. 빌어먹을 마녀 년…. 이래서야, 참.”
길게 한숨을 흘린 마녀, 아니 플루톤은 힘껏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당당히 치부를 드러내는 게, 태도가 훨씬 여유로워졌다. 애초 기습이 통할 상대가 아닌지라, 나는 무검을 다잡으며 천천히 거리를 재기 시작했다. 동료들도 심상찮은 마기의 흐름을 느꼈는지 이리저리 움직이는 기척이 감지됐다.
이윽고 팔을 내린 플루톤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이, 김수현. 하나만 물어보자. 도대체 어떻게 여기로 올 생각을 한 거지?”
“내 이름을 알고 있나?”
“킬, 그럼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그렇게나 깽판을 쳐놓고서?”
“…운이 좋았지. 소년의 상태도 이상했고 경비병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혹여 정찰을 온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야.”
적당히 대답하자 플루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으나 자꾸 쩝쩝 입맛을 다시는 게, 무언가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하다. 뭐, 저놈 기분까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무검을 상단으로 세워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냥 얌전히 죽어주면 고맙겠는데…. 그래 줄 리는 없겠지?”
“그냥 얌전히 도망치게 해주면 고맙겠는데…. 그래 줄 리는 없겠지?”
플루톤은 피식 웃더니 얄밉게 이죽거렸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아니? 무슨 농담을 해도. 마몬도 못 이긴 놈을 내가 어떻게 이기냐? 당연히 지겠지.”
“뭐?”
“하지만 좀 봐달라고. 그래도 명색이 악마 14 군주인데, 승산이 없다고 그냥 곱게 죽어줄 수는 없잖아?”
“…….”
“너무 서운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킬! 네 덕분에, 나는 몇 달 동안 준비한 걸 고스란히 날리게 생겼으니까. 아니. 이미 날린 거나 다름없지?”
그렇게 말한 플루톤은 마치 항복이라도 하듯 순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거기다 어서 자신의 목을 치라는 듯 턱을 까닥까닥 움직이기까지. 그러자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함정인가? 아니면?’
머릿속으로 무수한 고민이 스쳤다. 이대로 돌격해 목을 치면 끝날 것 같은데, 무언가 이상하다. 악마 놈들이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놈들이던가?
아니, 단언컨대 절대로 아니다. 무릇 악마란, 설령 비참하게 죽을지언정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악독함의 대명사가 아니던가. 설마 자폭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
문득,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자폭.’
그래, 만약에 죽어도 상관이 없다면?
그러니까 죽어도 무조건 발동되는 어떠한 상황을 만들어놓았다면?
“흥. 알아차렸나? 그래도 상관없지만. 엇차!”
그렇게 생각한 찰나, 플루톤이 돌연 힘차게 위로 뛰었다. 날개를 활짝 펼치는 걸로 보아 하늘로 활공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플루톤은 하늘로 올라가지도 않았으나 땅으로 내려오지도 않았다. 마치 홀드 마법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딱딱하게 굳더니, 허공에 정착이라도 한 듯 우뚝 정지했다.
“킬킬킬킬!”
이윽고 플루톤은 갑자기 힘차게 웃어 젖히며 양팔을 좌우로 벌렸다.
“아까 네가 그랬지? 이러느니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
“그런데 말이야. 이런 생각은 안 해봤나? 내가 그걸 감수하고, 이런 거지 같은 공존을 선택한 이유를 말이야!”
“무….”
그때였다.
쿵!
돌연히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하강했다. 기둥은 허공에 묶인 듯한 플루톤을 그대로 덮쳤고, 사방으로 터지듯이 흐르며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었다. 시야가 멍해진다.
우우우웅!
이윽고 힘찬 공명이 고막을 떠르르 울리는 동시, 반사적으로 안력을 돋웠다. 그러자 플루톤의 몸에서 돌연 붉디붉은 마법 진 하나가 튀어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니, 하나가 아니었다.
– 저건…!
화정의 놀란 음성.
하나, 둘, 셋, 넷…. 마법 진은 계속해서 튀어나와 플루톤의 주변을 빙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예전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에서 마볼로가 일으켰던 수백의 마법 진과 흡사하다. 그러나 큰 차이가 있었다. 크기도 각양각색이었지만, 흘러 나온 붉은 마법 진은 천천히 공전을 멈추면서 하부 주변으로 다닥다닥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하반신이 마법 진에 에워싸였을 즈음, 축 늘어져 있던 상반신이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응시하는 크게 떠진 눈매와 가라앉은 눈동자.
아까처럼 전의를 상실한 눈이 아니다. 그렇다고 투지에 불타오르는 눈도 아니었다. 오롯이 무심하면서 편안하다. 그러나 검붉은 색의 눈동자와 마주하자 뜻 모를 오한이 엄습했다.
이윽고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살그머니 열린다.
– ‘아스트랄 차원’ 개방. 접근자…. 필리아 트리토리스.
– 확인…. 액셉트. 꽃의 마녀, 필리아 트리토리스의 근원으로의 접근을 허가합니다.
허공을 고요히 울리는 음성. 마녀의 목소리도, 플루톤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처음 들어보는 깊고 웅혼한 음성이었다.
화아아악!
웅웅웅웅웅웅웅웅!
이어서 소환된 마법 진이 일거에 빛을 뿜어냈고, 시야가 또 한 번 새하얗게 물들었다. 심히 펄럭거리는 도복을 붙잡고 있자, 누군가 나를 힘껏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나 또한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 필리아 트리토리스, 소멸 확인.
– 플루톤, 소멸 확인.
그러는 동안에도 허공의 음성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 조건이 달성됐습니다. 제 1 결정권자의 선택권 상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제 2 결정권자인 플루톤으로 사용 권한을 인계합니다.
– 잔존한 플루톤의 염원에 따라, 아스트랄 차원에 침입한 15 개체의 격퇴를 개시. 전투 개시 전 요구 사항으로, 전장 분석을 시작합니다.
격퇴 개시? 전장 분석?
– 벗어나!
무언가 소름이 돋으려는 순간, 화정이 급하게 외쳤다.
– 전장 분석 완료. 분석 결과, 가장 위험 분자인 사용자 김수현의 처리를 최우선시합니다.
그러나 채 벗어나기도 전, 하부를 가린 마법 진이 우수수 빛을 발했다.
– 영역 선포.
투쾅!
영역 선포라는 말을 들은 순간, 마법 진에서 쏟아진 반투명한 장막이 사방에 내리 꽂혔다.
“……!”
한순간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직 색깔만 다를 뿐이지, 내가 사용하는 능력과 완전히 똑같았기 때문이다.
허공을 쳐다보자, 마녀는 몸을 45도쯤 구부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것 같다. 황급히 달려온 동료들이 무어라 외치며 장막을 두들겼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 사용자 김수현과 14 개체를 구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우선은, 지체 않고 이형환위를 사용했다.
“김수현!”
“오, 오라버니!”
단숨에 밖으로 벗어나자 가까이 다가왔던 동료들이 삽시간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마녀, 아니 더 이상 마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쨌든 저것은 갑자기 말을 멈췄고, 이내 실 끊긴 인형처럼 천천히 몸을 기울여 나를 쳐다봤다.
– …정정. 구분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나는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 빠르게 속으로 말을 걸었다.
‘화정, 저건 어떻게 된 거지?’
– …내가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때 했던 말 기억해?
화정은 약간 가라앉은 음성으로 화답했다.
나는 신속히 기억을 더듬었다.
‘마법의 근원. 초 정보 집합체. 그러니까 금주라고 했었나?’
– 그래, 금지된 주문. 저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칙과 정보를 아우르는, ‘마법의 근원’. 즉 이 아스트랄 차원의 의식을 강제로 자신에게 끌어당긴 거야.
‘미친, 그게 가능해?’
– 당연히 안 되지. 애초 금주라고 했잖아. 근원에 다다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존재들조차 일부러 금지한 주문이야. 그리고 저 마녀는 그 자격도 없어.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은 살짝 엿보는 수준밖에 안 돼.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저 마녀가…!’
– …제물을 바쳤을 거야. 아마도.
화정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나는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물을 바쳤다고?
– 그래. ‘하늘을 굽어보는 마음의 눈’을 가진 존재조차도, 까딱 잘못하면 먹혀버리는 게 바로 ‘마법의 근원’이야. 그런데 고작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이 저렇게 버틴다는 소리는, 자신과 그 악마 놈까지 제물로 바쳤다는 소리겠지. 아니. 주체가 누구든, 말 그대로 시작부터 죽음을 각오한 거야.
화정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나는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화정의 말을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나, 적어도 플루톤이 자폭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이뤘음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어쨌든 중요한 건, 우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 하여 가장 화급한 문제를 물었으나, 기다려도 화정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잠든 게 아니라, 내 질문에 적절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다는 소리는…. 나 또한 섣불리 달려들 수 없는 상대라는 방증이다.
“쯧.”
갑자기 일이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일 자체는 잘 풀렸다. 그러나 이제는 달성의 문제가 아닌, 생사의 문제가 새롭게 튀어나왔다.
혀를 차며 시선을 올리자, 어느새 검게 물든 하늘과 아래로 붉은 마법 진에 휩싸인 마녀가 보였다. 여전히 어떤 감정도, 어떤 표정도 읽히지 않는다. 그냥, 더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뿐.
– …확인 완료. 분석을 종료합니다. 이형환위가 있는 이상, 사용자 김수현을 따로 처리하는 건 힘들다고 판단.
– 최우선 방법을 종료하고 차선책을 실행합니다.
– 마녀의 능력 ‘애니메이트 플로라(Animate Flora)’와 악마 마법 ‘사령(死靈) 소환’을 조합해 새로운 마법을 창조합니다.
– 애니메이트 미스트(Animate Mist).
음성이 끝난 찰나, 도처에 널린 식물의 잔해에서 자욱한 안개가 뭉클뭉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솟구친 안개는 주변을 유유히 감돌며 서로와 몸을 합쳤다. 그러자 그저 자욱하게 깔렸다는 사실만 인지할 뿐, 도저히 수를 가늠할 수 없다. 아니. 애초 어떤 형태의 마법인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는다.
‘어떻게….’
초조해지는 속을 추스르며,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을 거듭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백한결과 김한별의 조합이 언제까지 버텨줄지도 모르거니와, 하승우, 사라, 정하연은 마녀와의 일전으로 대부분의 마력을 쏟아 부었다. 거기다 제갈 해솔도 ‘소산 마법’이라는걸 따라 하느라 상당히 지친 상태.
결국 사제 두 명을 제외하면, 현재 최상의 상태로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은 7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과연 7명으로 이 상황을 버틸 수 있을까?
‘안 돼. 어디서 분명 구멍이 생길 거야.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였다.
“흐응~. 이제 밥값을 할 때가 왔나?”
들려오는 음성에 번뜩 정신을 차리니, 손에 두툼한 카드 뭉치를 쥔 채, 목을 좌우로 꺾으며 걸어 나오는 선율이 보인다.
“머셔너리 로드.”
이어서 누군가 내 어깨를 살며시 짚었다. 흘끗 돌아보자, 바로 옆에서 나를 빤히 응시하는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한소영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네요.”
그렇게 말한 한소영은 살그머니 고개를 젖히며 말을 이었다.
“혹시 저희가 시간을 끌면, 저것을 처리할 수 있으신가요?”
“…예?”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이 안개를 상대로 시간을 끌어주겠다고? 준비도 덜 됐고, 대응 방법도 모르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곧바로 되물었으나, 한소영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그냥 오연히 고개를 돌려 나를 지나치더니, 주변을 쓱 훑어보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간다.
“이스탄텔 로우…!”
펄럭!
대답은, 로브로 되돌아왔다.
가볍게 로브를 벗어 젖힌 한소영은 본래의 경장갑과 망토를 걸친 차림을 드러냈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공중의 마녀를 응시했다가, 느릿하게 오른팔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로드.”
왜냐면, 그런 한소영의 얼굴에서 일말의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이윽고.
“라운드 하우스(Round House).”
어두운 하늘을 향하는 가녀린 손등에서, 찬연한 보랏빛이 분사됐다.
============================ 작품 후기 ============================
아니, 독자님들!
왜 벌써 마녀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설마 저를 그렇게 잔인한 사람으로 보셨는지요.
아닙니다. 저는 착한 사람이에요.
아, 물론 인정은 합니다. 확실히, 그동안 여러 캐릭터가 사망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겨우 유현아, 차승현, 반다희, 미샤 예시카, 마탄의 사수, 안소연, 백서연….
어…. 세어보니 좀 많네요. 흠흠.
아무튼, 이번에는 하승우 때와 비슷한 수준의 반전을 마련해놨습니다.
이제 종반으로 접어들었으니, 결과를 기대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