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49
00748 근원(根源). =========================================================================
검푸른 색으로 물든 하늘, 그리고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한소영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화스트 페이스(Fast Face).”
파직, 가열찬 정전기가 손등 주변으로 튀기는 동시에, 고요히 감겨 있던 두 눈이 천천히 떠진다. 드러난 짙은 동공 너머에는, 진한 보랏빛을 발하는 무언가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그것은 평소와 같은 흑 수정이 아니다. 각 눈동자 속에는 둥그런 마법 진이 요요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우웅!
이윽고 깔끔한 공명 소리에 이어, 한소영의 눈에서 떠오른 두 개의 마법 진이 폭사하듯 외부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 진은 순식간에 수십 배 이상으로 크기를 확장했고, 서서히 하나로 겹쳐지며 빙그르르 돌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나 점차 빠르게. 한소영의 정수리를 중심으로 회전하던 마법 진은, 이윽고 차분히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소영은 알고 있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느끼고 있었다. 바로 ‘초감각’으로.
현재 어두운 하늘 아래 홀로 빛나는 저것은, 한소영도 처음 인지하는 존재였다. 물론 ‘제 3의 눈’이 읽지 못하는 것을, 초감각이라고 정체를 밝힐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초감각의 직감이, 마법사로서의 본능이 외치고 있다. 저 ‘근원’은 절대로 가까이하지 말라고. 너는, 아니 자신은 자격이 없다고. 호기심에 끌려 어설프게 다가가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거라고.
흡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사를 한꺼번에 상대하는 느낌이었지만…. 그러나 포기한 건 아니다. 한소영의 사전에 포기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해야 할 일은 차고도 넘친다.
거기다 혼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우연이든 기적이든 간에, 어떻게 상황을 만들 수만 있다면. 그 상황으로부터 역전의 찬스를 이끌어낼 수 있는 사용자가 동료 중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한 한소영은 아주 약간 자세를 낮췄다. 마지막 삼 단계 주문을 외우기 전 최종 준비 자세.
한소영의 특수 능력 ‘칵 키드 피스톨(Cocked Pistol) – 여왕의 군대(Queen’s Army)’의 발동 현상은 총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생전에 영웅이었으며, 사후 무지개의 여신 ‘플라비우스’의 친위대로 거듭난 전투 처녀 ‘아르쿠스 발키리’들을 소환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칵 키드(Coked)….”
그때였다. 단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체내에 잠재된 마력이 갑작스럽게 증가했다. 찰나의 순간, 한소영의 마력은 방대하면서 촘촘하게 이어진 회로를 폭발적으로 메우는 것도 모자라, 미처 감당치 못한 몸 밖으로 흘러나오며 주변을 밝게 비췄다.
“…피스톨(Pistol)!”
이윽고 비로소 최종 주문을 외친 한소영은, 거의 동시에 땅을 힘껏 박차 뛰어올랐다. 그러자 허공에 소환된 보랏빛 마법 진에 정수리부터 가볍게 통과한다.
그 순간이었다.
파지지지지지지직!
한순간, 눈부실 정도의 엄청난 방전 현상이 발생했다. 한소영의 몸이 중앙을 통과하는 순간, 겹쳐진 마법 진이 갑자기 빛나며 폭발한 것이다. 진의 회전에 순간적으로 가속이 붙어 폭풍처럼 휘돌기 시작하고, 사방으로 찬란한 스파크가 뻗어 나가며 주변의 공간을 이지러트린다.
잠시 후, 환하게 빛나는 마법 진 중앙으로, 완전히 변화한 한소영의 모습이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한다.
문득 마법 진 중심으로 감미로우면서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나온다.
어느새 한소영은, 약간 처연하게 느껴지는 자태로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눈은 여전히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짙은 보랏빛이었고, 마법 진의 발광(發光)으로 살결은 더욱 희어 보였다. 새로이 생성된 마력의 갑옷은 찬란하게 빛나며 주변을 환히 비췄고, 곳곳에 형이상학적인 마력의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다.
저 새롭게 태어난 한소영의 형상을 과연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전투 처녀? 아니면 여신?
이어서, 마력 갑옷만큼이나 알 수 없는 무기가 드러난다. 아니. 무기의 형상은 완연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주변 공간을 찢어버리는 균열과 심한 방전 현상으로 간신히 형체만 드러났을 뿐.
아무튼, 분명한 건 한소영의 오른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다는 것.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마력이 거칠게 날뛰고 있다. 공간을 일그러지게 만들 정도로 강대하고 가공한 마력이 한소영의 오른손에 소환된 것이다.
‘근원’도 이건 가볍게 보지 못한 걸까. 시종일관 김수현을 쫓던 무심한 시선이 처음으로 한소영을 향했다. 그러나 정작 상대는 근원을 보고 있지 않았다. 공중으로 활공하는 한소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지상에서 슬금슬금 밀려오는 연기의 무리를 향해 있는 힘껏 오른팔을 휘둘렀다.
그리고,
꽈꽝!
빛이 잠깐 번쩍였다가 사라진 찰나, 엄청난 굉음을 동반한 마력이 허공을 가르고 내려가 지면을 부쉈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쾌속의 공격.
그러나, 결과는 명명백백(明明白白)히 드러났다. 어느새 지상에는 직경 5 미터 가량의 깊숙한 균열이 파인 상태였고, 여파를 이기지 못한 흙먼지가 휘말려 올라오는 중이다.
연기? 당연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애초 존재했던 것 자체가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이 갈 만큼 터럭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위력!
어느새 모두가 입을 벌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공중의 형상은 지금이 전투 상황임을 잊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고, 또한 강력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자태와는 다르게, 이어지는 한소영의 행동은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번쩍!
또 한 번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꽈앙!
추락하듯이 내리 꽂히는 보라색 마력은 마치 융단폭격처럼 지상을 두들기고 파헤쳤다. 흡사 천상에서 강림한 여신이 지상의 미물을 단죄하는 듯한 풍경.
그 광경은 눈을 떼지 못할 만큼 고혹적이고, 치가 떨릴 만큼 강렬하다. 무시무시한 마력이 휩쓸고 지나간 지점에는, 연기는 물론 씨 하나도 남지 않고 모조리 소멸한다. 그리하여 한소영의 오른팔이 휘둘러질 때마다, 애꿎은 땅은 섬광에 휩싸이며 연기와 함께 사라져 갔다.
어느새 자욱이 흐르던 연기는 온데간데없다. 마녀의 주술과 악마 마법의 조합으로 탄생한 ‘애니메이트 미스트’가 너무나 손쉽게 스러져간다.
그러자 한소영을 지그시 응시하던 ‘근원’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칵 키드 피스톨, 여왕의 군대’의 분석을 마쳤습니다.
– 무지개의 여신 ‘플라비우스’의 강림과 마력 갑옷 ‘발키리 스커트’, 그리고 ‘멸살(滅殺)’의 권능을 품은 신기 ‘롱기누스의 창(Spear of Longinus)’의 소환을 확인…!
화륵, 화르르륵!
하지만 근원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수십 개의 열화검이 사방을 에워싸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대응하기는 했으나, 열화검은 삽시간에 일어난 수백의 방어 마법 진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며 들어왔고, 근원의 몸체는 사정없이 흔들거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 경고, 경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격입니다. 분석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 손상률 29%…! 자력 재생…. 실패. 마력 재생…. 실패. 아스트랄 차원을 끌어와 강제 복구를 시도합니다.
갑자기 짓쳐 들어온 정체 불명의 공격. 근원은 서둘러 복구를 시도하려고 했으나, 그것조차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돌연 홀연히 솟구친 한 줄기 섬광이 하늘을 밝히더니, 구름 일대가 환하게 변하며 섬광으로 이루어진 화살 수십 개를 떨어트린다.
– ‘황혼의 무녀, 축문’의 분석을 마쳤습니다.
– 손상률 33%…!
허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벌을 내리소서!”
안솔의 외침과 동시, 하늘에서 허연 벼락 서너 줄기가 근원으로 추락하듯이 내리 꽂혔다. 딱히 말한 건 아니었으나, 서로 본능적으로 교감한 것이다. 한소영이 홀로 연기 무리를 상대하는 동안, 남은 모두가 저 이상한 존재에게 화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 ‘광휘의 사제, 천벌’의 분석을 마쳤습니다.
– 손상률 38%…!
물론 근원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 몸체 보호를 목적으로 방어 마법 진을 최우선적으로 재가동합니다.
– 샛별 찌르기.
또 한 번 마법 진이 우수수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근원이 지상으로 눈부신 광선을 발출했다.
샛별 찌르기. 약간 이상한 이름이기는 하나, 근원에서 튀어나온 마법은 어느 것 하나 만만히 볼 수 없다. 보이는 그대로 표현해보면 직경 50 센티미터의 빛의 광선과도 같다.
여하튼 근원은 처음으로 김수현도 한소영도 아닌, 다른 13명을 공격 대상으로 잡았다.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이윽고 비스듬히 하강하는 빛의 광선이 지상을 고스란히 덮치기 직전, 돌연 우윳빛을 띤 방어막이 둥글게 피어올라 광선과 맞부딪쳤다.
결과적으로, 빛의 광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무언가에 반사 당한 것처럼 강제로 방향이 비틀어지더니,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로 치솟고 말았다. 백한결과 김한별이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 간신히 궤도를 비트는 데 성공한 것이다.
고오오오오오오오….
근원의 눈동자는 여전히 무심하다.
– ‘신의 방패, 이지스 시스템’의 분석을 마쳤습니다.
– 이지스 시스템을 역으로 연산합니다…. 성공. 해당 능력에 최적화된 파훼 마법을 검색합니다…. 성공.
– 연산 및 검색 결과에 의거, 대(對) 이지스 시스템용 마법을 개방합니다.
– 하얀 용의 숨결.
담담히 말을 마친 근원은 또 하나의 거대한 광선을 발출했다. 아니. 이번에는 직경이 못해도 1 미터는 넘어 보이는 게, 거의 기둥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이건 본능적으로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백한결과 김한별의 눈에 암담한 빛이 스친다.
그 순간, 빛의 기둥이 하강하는 방향으로 날개를 지닌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쿠웅!
거대한 힘과 힘이 격돌하는 충돌음. 그러나 근원이 새롭게 이루어낸 공격은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기세 좋게 뿜어진 빛의 기둥은, 붉은 빛이 흐르는 장막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진은커녕, 하릴없이 물을 퍼트리는 분수대처럼 사방으로 빛무리를 흩트린다.
“미친….”
잔뜩 찡그려진 얼굴에서 나직한 욕지기가 흘러나온다.
그랬다. 공격을 막아낸 장본인은, 누구도 아닌 김수현이었다.
하얀 용의 숨결은, 확실히 극한을 넘은 김수현의 마법 저항 능력조차 웃도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김수현의 방어 수단은 마법 저항 능력만 있는 게 아니다. 항마력이 돌파된 찰나 ‘게헨나의 보호 요새’가 전개된 것이다.
아무리 모든 정보와 법칙을 망라하는 ‘마법의 근원’이라도, 지옥 대공 앞에서는 갓난쟁이에 불과하다. 애초 게헨나가 옆에 있었다면, 10초가 지나기도 전에 차원 전체가 깡그리 작살났을 정도.
– 정체를 알 수 없는 방어 능력입니다. 분석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 분석 실패.
– 단, 전설상으로만 존재하는 ‘하늘 요새’와 비슷한 수준의 방어력을 지녔을 거라 추정합니다.
– 만일 이 가설이 맞는 경우, 현재는 어떠한 수단으로도 사용자 김수현의 방어를 뚫을 수 없습니다.
“화정!”
그 순간 근원의 음성과 김수현의 목소리가 겹쳤다.
그러자 또다시 수십 개의 열화검이 김수현의 주변으로 생성되고, 손짓 한 번에 근원을 향해 일제히 치달린다. 그 게헨나조차도 깜짝 놀라게 만든 열화검은, 현재 ‘염화(炎化)’ 능력을 제외하면 김수현이 지닌 최고의 절기라고 할 수 있는 어빌리티다. 물론 반대급부로 그만한 단점도 존재한다. 체력이 오른 이후 훨씬 나아지기는 했으나, 적잖은 체력의 소모는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 김수현의 체력은 안개의 숲을 통과한 이래로 지속해서 하락한 상태. 얼굴에 그늘진 피로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열화검의 고집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저 무지막지한 방어진을 파괴하려면 화정의 힘은 물론, 연속적인 타격이 필요한데, 열화검만큼 제격인 능력이 없었으니까.
화륵, 화르르륵!
쏘아진 수십 발의 일격은 곧 붉은 진을 가열차게 두드렸다. 뚫리는 족족 새로이 생성된 마법 진이 자리를 메우기는 했으나, 열화검은 그 이상의 속도로 신속하게 녹여버리고 있었다. 종래에는 겹겹에 에워싸던 마법 진이 마치 펀칭기에 뚫린 것처럼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충격의 여파로 마녀의 가녀린 몸이 바람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사정없이 흔들린다.
– 경고, 경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격입니다!
– 손상률이 50%를 넘었습니다!
– 재생, 복구에 실패합니다!
– 몸체 보호를 목적으로 방어 마법 진을 최우선적으로 재가동….
그 순간.
푹!
구멍 난 마법 진 사이로, 보랏빛 전류를 튀기는 날카로운 것이 깊숙하게 파고들어 와, 근원의 등을 세차게 꿰뚫었다. 이내 그 무언가가 복부를 삐죽이 뚫고 나오는 동시에, 마녀의 등이 구부러진 활대처럼 휘었다. 흘끗 시선을 돌린 김수현은 오른팔을 힘차게 내뻗은, 투척 자세를 한 한소영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마녀의 몸은 잠깐 실 끊긴 인형처럼 거슬리게 움직이더니, 결국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 롱기누스의 창에 의한 관통을 확인…. 치명상으로 판단합니다.
– 손상률 73%….
이어서, 마녀의 눈동자에서 새어 나오던 빛이 툭 꺼졌다.
============================ 작품 후기 ============================
아, 어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네요. 조아라의 많은 분들도 만났고, 아카네이아 작가 님도 만나 뵈었고요. 정말로 인상이 선하고 좋으셔서 즐겁고 편안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최강 동안 강xx 님의 당일치기 여행(?)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우선 오늘 업데이트 분은 올렸고, 말씀드렸던 대로 어제 올리지 못한 내용은 오늘 추가로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업데이트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고요, 오늘 중으로는 확실하게 업데이트하겠습니다.
그럼 독자 님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