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50
00749 핏물 속에서 피어나는 꽃(2). =========================================================================
‘마법의 근원’의 몸이 축 늘어졌다. 폭풍처럼 이어지던 전투가 끝나고, 아니 아직 끝난 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상황은 잠시 소강 상태를 맞이했다.
이윽고 날개를 접은 김수현과 변신을 해제한 한소영이 동시에 지상으로 안착했다.
“헉, 헉!”
“후우, 후우….”
착지한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거칠게 몰아 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강력한 힘에는 그만한 제한이 걸려 있기 마련이니까.
김수현은 체력이 하락한 상태서 연속해서 무리해버렸고, 한소영의 변화도 상당한 체력 소모를 요구하는 능력이다. 특히나 김수현의 경우는 조금 심각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체력의 소모는 물론, 아까 근원의 ‘하얀 용의 숨결’을 막아냄으로써 만만치 않은 마력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능력들을 바탕으로 근원을 그로기 상태까지 밀어붙인 건 사실이나….
문득, 김수현의 뇌리로 ‘게헨나의 보호 요새’를 건네 받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 당시 게헨나는 구슬을 건네주면서 딱 하나 신신당부한 게 있다. 바로 언제나 남은 마력의 양을 계산하고 사용하라는 것.
김수현은 현재 그 말을 절절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사용자 정보상의 마력 능력치는 절대로 낮은 수준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실제 전투에서 사용해보니 정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게나 힘든 걸까. 김수현이 호흡을 추스르며 간신히 머리를 들었다. 한소영의 활약으로 ‘애니메이트 미스트’는 사라지고, 이제 근원 홀로 남은 상태. 한소영이 변신을 해제함으로써 ‘롱기누스의 창’도 사라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복부에 뻥 뚫린 구멍은 여전히 남아 있다.
잠시 후, 사방으로 퍼져 있던 여러 동료들이 천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
이유정은, 가장 후방에서 홀로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할 말을 잃은 것 같은 망연한 표정으로.
고개는 우두커니 정지해 있었지만, 눈은 이미 모여드는 동료를 훑고 있었다. 하나같이 성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모두가 완연히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에 반해 이유정은 조금도 지치지 않았고, 보이는 모습도 깨끗하다. 이번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방증인 것이다.
확실히 이렇게 마력이 주가 되는 전장에서 근접 계열이 참여할 여지가 적기는 했다. 애초 이런 상황을 예상한 김수현이 근접 계열을 적게 데려온 것이기도 했고.
허나 엄밀히 말하면, 이유정은 입장이 다르다. 남다은이나 허준영은 비록 크게 활약하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상황에 따른 필요한 행동은 해줬다. 한소영이 나서기 전, 연기가 몰려올 때 가장 먼저 사방을 경계한 것도, 방어막이 깨질 뻔했을 때 마법사들의 앞을 지켰던 것도 바로 그 두 명이었다.
그런데 이유정은?
‘한 게…. 없어.’
이유정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키고 있었다. 스스로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공중에 떠 있는 상대할 수단은 없었으나, 화려한 마법이 오고 가는 전장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한소영처럼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기 보다는, 그냥 나서지 못한 게 전부였고 또한 사실이었다.
‘고작…!’
이러려고 따라온 게 아니었다. 애초 철저한 짐꾼이 되겠다는 조건으로 참가할 수 있었으나,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든 진가를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이었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데….
‘나는….’
오히려, 이번 전투로 잔인하리만치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원래는 김수현이나 한소영처럼 전투를 열고 주도하지는 못해도, 다른 동료들처럼 어떤 역할이라도 맡고 싶었다. 어떻게든 한 손이라도 거들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짐이 되기는 싫었다.
그러나 현재 전장에서 이유정은 확실한 짐이었다. 없어도 전혀 상관없는, 있으면 오히려 신경 쓰이는 짐짝.
“아…!”
그 순간, 욱신거리는 아픔이 돌연히 복부를 엄습했다. 아까 길을 걸어올 때부터 느꼈던 통증으로, 낙인이 찍힌 부분을 칼로 찌르고 헤집는 듯한 고통이었다. 적당히 참다 보면 사그라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아파….”
이유정은 입술을 깨물며 살그머니 복부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이런 고통보다 이유정이 더욱 아프게 느끼는 건, 누구도 이런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 앞에 모여 있는 동료들과 이렇게 홀로 피해 있는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자, 갑자기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마치 끼어들지 않는 게 당연하다는 듯, 김수현을 포함해 그 누구도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같은 공간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혼자만 따로 서 있는 느낌이랄까?
피식거리는 자조 섞인 웃음이 배어 나온다. 어쩌면 이런 생각 자체가 웃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분명 김수현은 도시를 떠나기 전부터 각자의 역할을 배정했으며, 이유정은 거기서 짐꾼 역할을 맡았다. 더욱이 실제 전투가 벌어지고 나서는, 대부분이 알아서 움직였다.
결국에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이유정 자신의 잘못이 가장 클 것이다.
– 재확인…. 현재 손상률은 73% 입니다.
– 가동률이 30% 이하로 하락했음을 확인합니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허공에서 울려오는 음성에 이유정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 정착한 채 축 늘어져 있던 근원이, 기름칠이 덜된 로봇처럼 끼릭끼릭 움직이면서 겨우 몸을 일으킨다. 검붉은 빛이 꺼진 눈동자는 색을 잃기는 했으나, 여전히 무념의 극을 달리고 있다. 김수현이 침을 탁 뱉으며 무검을 다잡는다.
– 새롭게 받아들인 정보를 바탕으로, 전장의 정보를 재구성합니다.
– 액셉트. 분석 완료.
– 사용자 김수현의 전투력을 정확히 계측할 수 없습니다. 현재 상태로 전투를 지속한다면 승리 가능성은 0%로 수렴합니다.
– 그러므로 현 시점부터 사용자 김수현을 ‘대상’에서 제외. 그에 따라 최대로 상정 가능한 299,412가지 경우의 수 중 299,411가지가 폐기되며, 남은 한 가지 방법을 시행합니다.
담담한 음성이 끝난 순간, 허공에 걸려 있던 몸체가 갑자기 크게 들썩였다. 마치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몸을 크게 펄떡였다가 도로 늘어진다. 지켜보던 모두는 불현듯 을씨년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무언가 끝난 것 같은 느낌인데, 끝이 끝이 아닌 것 같은 기분.
오히려 종말을 고하는 동시, 이제 시작이라는 이상하고도 미묘한 느낌.
“아악!”
그때, 조용히 있던 안솔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주변의 시선이 모아졌으나 안솔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털썩 주저앉는다. 당최 무엇을 보고 있는지, 두 눈이 황망하기 이를 데가 없다.
“아아아악!”
이어서 또 한 번 비명이 터지자 모두가 흠칫했다. 가뜩이나 불안한데, 안솔까지 저러니 더더욱 불길해지는 것이다. 더구나 안솔의 능력을 알고 있는 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안솔!”
김수현이 다가가자, 안솔은 호흡 곤란을 일으킬 정도로 경기를 일으키며 간신히 몸을 기댔다. 실제로, 안솔은 용이 잠든 산맥에서처럼 남들이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성녀의 예언’이 제멋대로 발동됐다.
말인즉 현재 안솔이 보고 느끼고 있는 건 바로 두 가지 선택지.
그래. 현재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다. 저 근원을 서둘러 처리한다 와, 가만히 놔두고 도망친다. 통상적으로는 선택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결과는 같다. 어쩌면 그것은 이 공간을 발을 들였을 때부터 이미 예정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끝…! 끝이…!”
“정신차려라, 안솔!”
“세상이, 세상이…!”
“…뭐?”
안솔의 어깨를 흔들던 김수현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가라앉았다.
– 기다렸으나 적의 공격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남은 가동률 27%를 강제로 0%로 변환합니다.
– 변환된 가동률은 남은 계획의 발동으로 전환합니다. 이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예상 소요 시간이 비약적으로 줄어듭니다.
이어서 들려오는 음성에 김수현의 머리가 반사적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기다렸다고? 강제로 0%로 만들었다고?’
사실상 처음부터 내키지 않은 원정이었다. 왜냐면 김수현 자신이 직접 참가하지 않아 잘 모르는 것도 있었지만, 과거에도 이 장소의 원정 결과는 상당히 이상했기 때문이다. 당시 석판 해독 후 야만 왕의 무덤으로 들어간 원정대는, 이후 해당 공간 자체가 사라짐과 동시에 도시와 소식이 끊겼다. 즉 안정화는 완료했으나 완전한 공략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발생했는지에 관해 의견이 분분했는데, 김수현은 플루톤의 반응을 확인했을 때 약간의 이상함을 느꼈다. 너무 여유로운 반응은 물론, 심지어 자신을 어서 죽이라는 제스처까지. 한 마디로 모종의 든든한 보험이 있는 태도? 그리고 만에 하나, 그 보험이라는 것이 과거의 결말과 연관이 있다면?
– …완료. 최후의 경우의 수 시행이 승인됩니다.
– 현 시점으로 자폭 모드, ‘멸망의 거울’이 발동됩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에는 이미 한참이나 늦은 상태였다. 아니, 이 공간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확정된 결과라고 봐도 좋다.
돌연히 근원의 몸체가 서서히 발광(發光)하며 빛무리를 줄기줄기 뿜어내기 시작한다. 이윽고 따스하게 뻗어 나간 빛줄기가 공간의 어느 지점에 닿은 순간이었다.
쩌저저저저저저정!
“큭!”
“꺄아아악!”
고막을 거슬리는 소음에 일부는 귀를 틀어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눈을 뜨고 있던 이들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빛이 뻗어 나가 닿은 공간에, 흡사 바닥에 떨어트려 깨트린 유리처럼 사방팔방 균열이 생겼다는 사실을.
우지지직, 우지지직!
이어서 발생한 균열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한다.
‘멸망의 거울.’
순간적으로 모두의 머리에 아까 들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빛무리들은 첫 균열을 생성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치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더니, 여지없이 거센 소음이 들리며 또 다른 허공에 균열을 일으켰다. 하나에서 두 개, 두 개에서 네 개, 네 개에서 여덟 개, 여덟 개에서 열여섯 개….
균열은 시시각각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그에 따라 빛은 점차 가속이 붙으며 빠르게 범위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이건….”
누군가 짧은 침음을 흘렸다. 어느새 김수현을 포함한 모든 사용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걸음을 물리며 서로 등을 맞대고 있었다. 모두가 암암리에 느끼고 있는 것이다.
교착 지점에서 반사돼 사방팔방 날아다니는 빛의 선.
그에 맞춰 발생하는 깨진 거울과도 같은 허공의 균열.
그래.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
15명은, 멸망을 앞둔 차원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기적 ‘따위’로는 구원이 불가능한 최악의 종말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 작품 후기 ============================
아, 한소영은 현대에서 여군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 나가는 젊은 CEO였어요. 왜 이렇게 설정했느냐 하면, 돌아간 후 김수현을 돌보고 보살피며 먹여 살릴 생각이라…. 응? 하하. 농담입니다. 🙂
여하튼 정말 빠르면 다음 회에 끝나고…. 아마 늦어도 2회 안에는 끝나겠네요.
로유진 : 가라! 유정츄!
이유정 : 유정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