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52
00751 핏물 속에서 피어나는 꽃(2). =========================================================================
처음에는 혀로 살짝 핥기만 했다. 그러나 기운의 힘을 확실히 느낀 걸까. 몸을 부르르 떤 이유정은, 곧 흐르는 황금의 바다에 고개를 처박고 양껏 들이켰다. 그렇게 한 모금을 흡입하고 막 목구멍으로 넘기려는 찰나였다.
‘어쩌면….’
그때.
‘나 때문일지도 몰라.’
어디선가 들려온 음성이, 새하얗게 일색 된 머릿속을 스치듯이 지나쳤다. 이내 작은 고저를 그리려던 목울대가, 돌연 서서히 가라앉는다.
‘미친년이야. 피에 미친년. 광년으로 불렸다고.’
‘하하…. 그렇게 밝은 애가 피에 미친년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거의 정신 줄을 놓은 상태에서, 이유정은 저도 모르게 손을 주먹 쥐었다.
왜일까, 왜일까.
이럴 리가 없을 텐데.
이제 입에 머금은 기운을 삼키기만 하면 되는데, 왜 망설여지는 걸까.
이런 상황에서 절대로 들릴 리가 없을 텐데, 왜 갑자기 오빠의 음성이 들려오는 걸까.
뇌가 혼란스럽다. 얼른 삼키라는 욕망과 아직 끊기지 않은 한 가닥 이성 사이로, 이유정은 이대로 주저앉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이어서 뜻 모를 눈물이 치솟아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자신조차 모르는 까닭없는 눈물이었다. 그냥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 시간이 없다!
– 어서 삼키라니까!
이윽고 야만 왕의 음성이 재촉하듯이 윽박지른 찰나,
‘사실 나는 별로 상관이 없기는 해. 왜냐면 이미 한참이나 늦었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이유정은 아직 아니잖아.’
‘이상하게 변하는 걸 보고만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애야. 사람이든, 사용자로든.’
잔잔하고 웅혼하게 울려오는 음성이 또 한 번 이유정을 붙잡는다. 하지 말라는 듯이, 그만두라는 듯이.
– 크릉…!
낯을 크게 찡그린 야만 왕이 나직한 울음을 흘렸다. 어느새 공간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까지 몰린 상태였다. 그러니까 시간이 없다. 한데 이제 마지막 의식을 남겨둔 상황에서,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유정이 망설이고 있다. 실제로 기운을 머금어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턱 부근이 느릿하게 풀어지는 중이다.
잠시 후.
– …젠장! 용서해라!
야만 왕이 황급한 손놀림으로 이유정의 턱을 우악스럽게 부여잡는다.
‘…모르겠다. 요새 들어서는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지도, 아니 잘해왔는지도 모르겠고.’
‘그 누구도 바로 결과를 내라고 하지 않아. 김수현의 말을 듣고도 모르는 거냐.’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고 있잖아.’
‘그럼 최소한 보여주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냐.’
그와 동시에 김수현과 허준영의 음성이 겹쳐, 기운에 취한 머리를 일깨웠다. 이유정은 두 눈을 힘껏 치떴다. 흐리멍덩하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정상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퉤!”
강제로 고개가 젖혀지려는 찰나, 이유정이 입안 가득히 머금은 것을 힘차게 뱉어버렸다. 이번에는 반대로 야만 왕의 눈이 황망해졌다.
–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콜록! 콜록콜록!”
그러나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기운을 토해낸 이유정은, 마치 취한 사람처럼 몸을 비틀거렸다. 이마는 여전히 띵하고 복부도 욱신거렸지만, 어지럽던 머릿속으로 개운한 기분이 한 줄기 찾아 든다. 이윽고 몸을 가누지 못한 이유정이 발라당 나동그라졌다.
– 어이!
“쌍, 입 닥쳐!”
짝!
야만 왕은 급히 손을 내밀었으나, 돌아온 건 걸쭉한 욕설과 힘찬 따귀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야만 왕이 멍하니 팔을 쓰다듬고 있자, 이유정이 침을 퉤퉤 뱉으며 금세 몸을 일으킨다. 오른손에 은색으로 빛나는 무언가를 꼭 쥔 채로.
– 너…. 설마 거부한 거냐?
“거부는 개뿔. 뭐? 용서해라? 미친놈이 무슨 짓을 하려던 거야?”
이를 갈며 말한 이유정이 턱을 쓱 닦으며 콧김을 흘렸다. 뺨에는 선명한 눈물 자국이 남아 있고 두 눈은 아직도 그렁그렁한 주제에, 야만 왕을 흡사 죽일 듯이 노려본다. 야만 왕의 낯에 떠름한 기색이 스쳤다.
– 이, 이봐. 이대로면 어차피 곧 죽는다고?
“아가리 닫으라고 했지. 그리고 이미 뒈진 놈이 뭔 상관이야? 남이사 죽든 말든.”
– 장난하지 말…!
“나는 인간이야!”
돌연히 빽 소리를 지르는 이유정. 기세가 어찌나 거셌는지 그 야만 왕조차 흠칫하며 물러나게 할 정도였다. 이유정은 씩씩거리면서도 오른손에 쥔 것을 꾸기듯이 썼다. 은은히 빛나는 머리띠를 확인한 야만 왕이 호오, 놀라운 표정을 짓는다.
“전투에 죽고 살고, 살육에 환호해? 그딴 게 수인이라면 되고 싶지도 않거든?”
– 약한 게 싫다고 하지 않았나? 강해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 싫어. 근데 그렇게 해서까지 강해지고 싶지는 않아. 스스로, 내 방식대로. …그래, 나는 최소한 인간으로서 강해질 거야.”
– …각오는 좋은데, 현실을 직시하라고. 네가 내 도움 없이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알았으니까 이만 아가리 닫아. 도와줄 생각 없으면, 여기서 가만히 구경하면서 딸이나 치던가.”
– …….
대차게 쏘아붙인 이유정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러나 방법은 확실히 들었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은 하나. 이윽고 저 앞에 붉은 장막을 확인한 이유정이 바로 달려나가려는 찰나였다.
– 흥, 합격이다.
갑자기 들려온 걸걸한 음성에 움직이려던 걸음이 우뚝 정지했다. 휙 고개를 돌리니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는 야만 왕이 보인다.
– 애초에 진작 이러던가…. 하여간 묘 족은 애먹이는데 도가 튼 놈들이라니까.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 어이, 나는 개가 아니야. 웬만하면 사자 소리라고 해줘. 그리고…. 아까는 미안했다. 실은 나도 많이 급해서 말이지.
“……?”
야만 왕이 쑥스럽다는 듯이 말하며 머리를 긁적이자 이유정이 의아한 눈빛을 보였다.
–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었다고? 확실히 각성시켜줄 수는 있었어. 뭐, 그 후의 일은 장담 못 하지만….
성큼 다가온 야만 왕은 천연덕스레 어깨를 으쓱거리자 이유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몸에 어른거리던 황금빛이 상당히 약해져 있다.
– 그러니까 말을 바꾸도록 하지. 조금 부끄럽지만, 도와다오.
담담히 말한 야만 왕이 이유정을 똑바로 응시했다.
– 너는 친구를 구하고 싶다고 했지?
“그런데.”
– 나도 친구를 구하고 싶거든.
“응? 친구?”
이유정이 이상하다는 어조로 되물었다. 이미 죽은 이에게 친구가 있을 리가 없다고 여긴 탓이다. 그러자 쓰게 웃은 야만 왕이 길게 숨을 흘리며 허공을 응시한다.
– 이곳은 내 무덤이기도 하지만, 나를 구하러 온 멍청한…. 친구, 놈들이 묻힌 곳이기도 하지. 놈들은 여전히 이 공간을 배회하고 있어. 나를 구하겠다는 일념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서.
야만 왕은 친구를 말할 때 약간 더듬었다가, 곧 힘주어 말을 이었다. 사실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유정은 조용히 경청했다.
– 그것도 무려 수백 년 동안…. 이제는 해방될 때도 되었잖아. 그런데 이렇게 세상이 멸망해버리면 우리도 꼼짝없이 소멸할 수밖에 없거든. 수백 년간 기다림의 끝이 영혼의 소멸이라니,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
야만 왕은 문득 가볍게 주먹을 내밀어 이유정의 어깨를 툭 쳤다.
– 그래서 너보고 도와달라는 말이야. 부디 우리가 자유롭게 해방될 수 있도록.
이유정은 가만히 있었다. 음성이 자못 진중하기도 했지만, 허공을 바라보는 야만 왕의 눈이 까닭 없이 아련하게 느껴진 탓이다.
– 이렇게 계속해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도 지친다고…. 뭐, 비록 죽은 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정신은 살아 있다. 나도, 저 천하의 바보 멍청이 친구 놈들도. 이제는, 이제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자연으로 돌아가 편하게 쉬게 해주고 싶다.
그렇게 말한 야만 왕은,
– 그게 내 최후의 바람이다. 비록 폐 태자가 후인에게 병신 같다는 욕을 먹을지언정…. 정말로 나를 구하러 왔었다는 걸 알았을 때, 사실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어.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친구를 구원할 차례다.
– 그러니 부디 나와 내 친구를, 이 심연의 공간에서 해방시켜주지 않겠나! 묘 족 소녀!
씩 웃으며 이유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미 죽은 영혼이라서 그런지 그림자가 드리워지지는 않는다. 그저 굉장히 희미해진 황금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를 뿐.
이유정은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른다. 단, 적어도 서로의 이해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깨달았다.
“…상관없는데, 수인이 되는 거라면 사양이야.”
– 흐흐, 농담은. 걱정하지 마라. 이미 나는 너를 인정했으니까.
화아아악!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 야만 황의 온몸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꺼져가는 촛불이 최후의 불꽃을 불태우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빛을 내며 따뜻한 빛을 뿜어낸다. 그러자 강렬해진 빛에 가렸는지 더 이상 야만 왕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환히 타오르는 황금의 형체만이 남아 이유정을 향해 손짓할 뿐.
– 자, 어서!
이유정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아까처럼 요사스러운 기운이 아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지도 않고, 달콤한 냄새를 풍겨 유혹하지도 않는다. 꽤 거칠기는 하지만, 한없이 자유로우면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 자유를 갈망하는 기운에 이끌린 걸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유정이 차분히 손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빛 안에서, 무언가를 바스러지듯이 움켜잡았다.
– 좋아!
그 순간.
– 이제 슬슬 시작해보자고! 후계자!
이유정이 보는 시야가, 찬연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붉은 장막 안은 조용했다. 대부분이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모두 입을 다문 채 장막 내 선두에 있는 사내를 응시한다. 사내는, 아니 김수현은 굳건히 서 있는 채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언가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동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모두….”
그때 결심을 내렸는지 김수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김수현은 흘끗 뒤를 돌아봤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최강의 방어막을 준비합니다.”
“…….”
“제 마력도 서서히 바닥을 보이는 중입니다. 그러면 이 장막도 끝이에요. 그전에 승부를 보겠습니다.”
“…….”
모두가 김수현의 말을 이해했다. 그래서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에는 또 기댈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다. 말인즉 남은 인원이 온 힘을 다해 저항하는 동안, 김수현이 최대한 빠르게 근원을 처리하겠다는 소리였다. 당연하지만 처리와 별개로 발생한 현상을 해결할지는 미지수였다.
“어….”
그때 허준영이 어딘가를 쳐다보며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돌린 김수현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무언가가 흡사 바람처럼 장막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비단 두 명만 본 게 아닌지, 일부의 시선이 바깥을 향한다.
붕괴하는 공간 속에서, 황금의 빛무리가 몰아치듯이 달려가고 있다.
그래.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는 게 아닌, 거센 격류와도 같이 힘차게 몰아치고 있다. 그리고 춤이라도 추듯이 붉은 머리카락이 사방팔방 나부낀다. 흡사 폭풍이 지나치는 것 같은 달음박질에, 누군가 약한 침음을 흘렸다.
“저건….”
우지지직, 우지지직!
그 순간, 일직선으로 직행하는 황금의 형상 앞으로 무너진 지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지면뿐만이 아니다. 빛의 선이 지나간 곳에는, 허공에도 균열이 발생하며 아예 지나갈 공간 자체를 부서트리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도 군데군데 성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없는 건 아니었으나 매우, 극히 미약한 수준이다. 심지어 지금도 공간은 허물어지듯이 부서지며 더 이상의 전진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마치 지나가는 모든 것을 삼킬 듯한 망망대해를 보는 기분. 문제는, 저 황금의 빛무리가 도저히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붕괴하는 하늘과, 분열된 허공과, 무너진 대지.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이 부서져 없어지는 사이로, 단 하나, 모든 것을 비춰 밝히는 타오르는 형상이 있다. 그 형상은 아름다운 잔상을 수놓으며 금빛 질주를 이어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망망대해로 뛰어들었다.
“하아!”
대찬 기합과 함께 붕괴된 지면 위로 형상이 공중을 활보한다. 이어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켜보던 누군가의 추락할 것이라는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허공을 크게 젓는 발길질은, 마침 위에서 떨어진 작은 하늘 조각을 밟아 도로 튀어 올랐고, 갈라진 공간의 균열 사이를 귀신같이 빠져나갔다. 가속이 붙은 그대로 부드러운 S자를 그리는 게, 흡사 초고속 전투기의 곡예 비행을 보는 듯하다.
단 한 걸음만 삐끗해도 추락해버리는 세상. 손톱만 한 조각을 밟고 올라 그대로 뛰어넘고, 우그러진 공간의 틈새를 살아있는 화살처럼 통과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오직 그것만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모두가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결국에는 형상의 발걸음이 그나마 온전한 지면을 밟는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근원의 바로 아래까지 도착했다.
“이유정….”
형상의 정체를 알아챈 김수현이 나직이 뇌까렸다. 아주 잠시 ‘어떻게?’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삽시간에 지워졌다. 현재 저 인간 같지도 않은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보다는 돌연히 속에서 무언가가 질박하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김수현도 알고 있다. 스스로 세운 계획의 성공 가능성이 3할도 채 안 된다는 것을.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상황이 달라졌다. 아직 정확한 파악까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던가. 절망적인 상황의 끝에서, 김수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단 한 번의 역전의 기회가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바로 아래까지 도착한 이유정이 고개를 젖힌다. 아직 온전한 허공에는 축 늘어진 마녀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으나 무심한 눈동자는 흘끗 움직였다. 아직 살아 있다는 방증.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움직이는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이유정은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하앗!”
그 기합에 응하여, 발차기 한 번으로 이유정의 신형이 폭발적으로 솟구친다.
하늘을 나는 게 아니었다. 이유정에게도, 수인에게도 하늘을 나는 능력 따위는 없다. 그러나 도약은 가능하다. 인간과는 다른 신체 구조를 지닌 수인이라면, 그 중에서 수인의 왕이라면. 6 미터 정도 떠오른 허공의 적 따위 충분히 닿고도 남는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도약력!
그렇게 야만 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발판 삼아, 이유정은 전신을 불태우며 아름답고도 용맹하게 일직선으로 치솟는다. 혼신의 힘을 담은 최후의 질주가 공중을 미끄러지듯이 올라간다.
이유정에게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지고 복부도 더 이상 아프지 않다. 스치는 풍경도 보이지 않고, 귓가를 스치는 바람도 느껴지지 않고, 아까부터 떠오른 몇 개의 메시지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 마녀의 가슴 앞에 떠 있는, 멸망을 향해 치달리는 모래 시계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위, 위험해!”
허준영이 외쳤다.
어느새 붕괴는 멈춘 상황이었다. 그러나 절대로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곳곳을 쭉쭉 긋고 다니던 빛의 선이 빙그르르 나선을 그리며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그러니까 일종의 반응이라고 봐도 좋았다. 말인즉, 근원이 처음으로 이유정을 위험한 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유정!”
들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허준영은 소리 질렀다.
그 찰나의 순간, 우뚝 멈춘 하얀 빛은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이내 근원으로 다가오는 이유정을 노려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강을 시작한다.
날개로 하늘을 나는 것과 일반적인 도약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중간에 선회할 수 있고 없고의 차이. 김수현처럼 허공에 임의로 마력을 생성시키는 수준이 아닌 이상, 이유정이 저 공격을 회피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몇 초 후, 빛의 선은 그대로 이유정을 후려갈겨 조각 내버릴 것이다.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
역시나 회피는 무리였던 걸까. 직선으로 하강한 빛의 선은 여지없이 이유정을 꿰뚫었다. 동시에 장막에 있던 인원이 발악하듯이 외치고, 김수현의 눈에도 경악과 놀라움이 빛이 스쳤다.
“아…!”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유정이 몸이 녹아내리 듯이 스르르 사라졌으니까.
“이, 이형환위?”
뒤늦게 알아챈 허준영이 입을 쩍 벌리며 경악한 음성을 질렀다. 통상적인 사용자보다 몇 배는 더 빠른 마력 흐름을 요구하는 능력이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걸 이유정이 성공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사실은 이형환위에 가까운 궁신탄영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김수현은 꾹 참고서 무검을 고쳐 잡았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으니까.
아무튼, 말 그대로였다.
황금빛은 여전히 하늘로 올라가고, 하얀 빛의 선은 그대로 수직으로 추락한다.
두 개의 빛무리는 그렇게 교차했다.
그리고, 비로소 근원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오른손에 쥔 것이 닿기까지 3초, 2초, 아니 1초…!
왔다, 왔다, 마침내, 드디어 도착했다!
이제는 끝낼 수 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그렇게 생각한 이유정이 환희에 찬 함성을 지르며, 눈앞까지 다가온 모래시계를 향해 힘차게 손을 휘두른다. 거의 동시에, 정지해 있던 마녀의 팔 하나가 움직였다.
이윽고 금빛을 튀기는 거대한 기운이 가열차게 모래시계를 박살 내려는 찰나,
푹.
닿기 직전에, 가녀린 몸이 배터리가 다한 로봇처럼 덜커덕, 정지했다.
이유정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에서 심한 격통이 밀려온다. 본능적으로 무언가에 관통 당했다는 걸 느꼈다. 살짝 고개를 든 마녀의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마치 이 정도도 예상하지 못할 줄 알았느냐는 듯 비웃는 것 같다.
그러나.
성공의 직전에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유정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아니. 애초 빛의 선이 자신을 노릴 때부터 이유정은 성공을 확신한 상태였다. 왜냐면, 이 공간은 자신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잠시 후.
“오빠아아!”
이유정이 참은 숨을 토해내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모래시계를 부수면 된데에에!”
“알겠다.”
비명의 끝으로, 담담한 음성이 화답한다.
펄럭!
힘찬 날갯짓에 이어서 누군가가 근원의 옆으로 불쑥 솟구쳤다. 그리고 근원이 채 고개를 돌리기도 전, 힘차게 내리쳐진 보이지 않는 칼날은 얼마 남지 않은 모래 시계를 그대로 베어 갈랐다.
============================ 작품 후기 ============================
이유정 : 야 이 작가 개XX 미친XX 기껏 다 해놨더니만 막타를 시X!
로유진 : 미, 미안.
이유정 : 왜 그랬는데!
로유진 : 업적 시스템에 막타가 계산되거든…. 그거 김수현한테 주려고….
이유정 : 왜!
로유진 : 이 파트 끝나고 세라프랑 꽁냥꽁냥하면서 GP 써야 하는데. 이왕이면 많은 게 좋잖아? ‘- ^*
이유정 : *)(#&$(*@#$*(@#$&*(#@$&*(@#$&(! 죽여버리겠다!
로유진 : 잠깐만!
이유정 : 최후의 유언이냐?
로유진 : 너, 김수현이랑 꽁냥꽁냥하기 싫냐? 잤잤하기 싫어?
이유정 : ……!
로유진 : 후후후후.
이유정 : 나, 나쁜 놈….
로유진 : 옆에서 손가락만 쪽쪽 빨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라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