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53
00752 핏물 속에서 피어나는 꽃(2). =========================================================================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주 극소량만이 남은, 최후의 모래 한 줌이 잘록한 부분을 통과하는 것과 모래 시계가 박살 난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도처에 떠오른 동그란 빛의 입자들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아아아악!
모래 시계 조각들은 흡사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듯이 빛을 흡수했고, 이내 시야가 새하얗게 칠해지며 모든 것이 희미해졌다. 마녀도, 이유정도.
그렇게 모든 것이 어렴풋하게 변해가는 가운데,
콰콰콰쾅!
갑자기 빛이 폭발하며 눈앞으로 완연히 하얀 공간이 드러났다. 고막을 찢는 굉음과 정체 불명의 격렬한 충격에 몸이 기우뚱 기우는 것도 느꼈다.
이윽고 폭풍에 휩쓸려 아래로 추락하는 와중, 돌연히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모든 게 느려지다 못해 서서히 동작을 멈추는 느낌. 비록 하얀 세상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현재 이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늘어지는 기분이다. 반사적으로 남은 마력을 돋우려다가, 그냥 전신의 힘을 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
문득 주변이 한없이 고요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살그머니 눈을 뜨자 잔잔히 흐르는 밤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시야가 정상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럼 아직은 살아 있는 건가? 아니, 살아난 건가?
체력이나 마력은 여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으나 그 외 별다른 이상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상반신을 들고 주변을 둘러봤고, 그제야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전의 현상은 시간이 멈췄던 게 아니라, 느낀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나도 모르는 사이 바닥과 부딪쳤을 뿐. 차마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에 착각한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아까와는 다르게 상당히 조용하고 어느새 풍경도 달라진 것 같은데….
띠링!
『전설의 업적!』
그때였다. 멍하니 어두운 숲을 응시하고 있자, 불현듯 익숙한 소리가 들리고 메시지가 눈앞으로 출력된다.
『사용자 김수현 외 14명은 꽃의 마녀 ‘필리아 트리토리스’, 악마 14 군주 ‘플루톤’, ‘마법의 근원’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일인 군단으로 불리던 공포의 마녀를 압도적으로 몰아붙이고, 사용자의 눈을 피해 몰래 이루어지던 악마의 계획을 분쇄했으며, 모든 법칙을 아우르는 초 정보 집합체 근원을 상대로 승리한 것은, 가히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금세기 최고의 성과입니다. 해당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사용자 김수현 외 14명은 꽃의 마녀 2,000,000 Gold Point, 악마 14 군주 플루톤 4,500,000 Gold Point, 마법의 근원 10,000,000 Gold Point, 총 16,500,000 Gold Point를 부여합니다!』
『각 사용자당 1.100.000 Gold Point를 분배 받습니다.』
『캐러밴 시스템 확인! 각 사용자의 공헌도에 따라 추가 Gold Point를 지급합니다. 1. 김수현(52%) 2. 한소영(23%) 3. 이유정(11%). 4. 하승우(5%)…. 그러므로 사용자 김수현은, 총 보상 Gold Point의 52%인 8,580,000 Gold Point를 추가로 부여받습니다!』
『캐러밴 시스템 확인! ‘막타’를 친 사용자 김수현에게 150,000 Gold Point를 추가로 지급합니다!』
“헐.”
모든 메시지를 읽은 이후, 나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머리가 휙휙 돌아가기 시작한다. 보자, 내가 보유한 골드 포인트가 10,857,460 GP였지? 그리고 이번에 9,830,000 GP를 추가로 얻었으니까, 그럼 총 20,687,460 GP를 갖게 된 셈인가?
좋아, 아주 좋다. 안 그래도 이번 원정이 끝나면 비밀 상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로 퍼주면. …아니, 잠깐만.
“이 메시지가 출력됐다는 건….”
나는 곧장 제 3의 눈을 일으켰다. 그리고 제대로 발동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선을 돌리니 약 20 미터 정도 떨어진 왼편서 멍하니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안솔이 보였다.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은데,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은 표정이다. 이윽고 안솔과 시선을 맞춘 순간, 갑자기 장난기가 일었다.
“오, 오라버니?”
안솔의 부름에 나는 전혀 소리 내지 않고 입만 벙긋벙긋 움직였다. ‘안, 솔.’ 이라고. 그러자 안솔의 정수리로 물음표 하나가 동동 떠오른다.
“에? 오, 오라버니? 잘 안 들려요!”
그 말에 나는 ‘잘, 있, 어.’ 라고 최대한 느릿하게 입을 움직였다. 이어서 최대한 초연한, 그리고 약간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이려 애쓰며 스리슬쩍 물러나기 시작했다. 안솔은 한동안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갑자기 “앗!” 소리를 지르며 눈을 크게 치떴다.
“오, 오라버니! 거짓말이죠? 마, 맞아. 오라버니가 죽었을 리가 없어.”
오, 성공한 모양이군.
나는 살짝 웃으며 스르르 미끄러지듯이 뒷걸음질 쳤다.
“아, 안 돼요! 오라버니! 가지 말아요! 으앙!”
나를 쫓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안솔은 금세 몸을 일으켜 땅을 박찼다. 중간에 한 번 심하게 넘어지기는 했지만, 기어코 죽자사자 따라와 나를 꽉 붙잡는다. 그리고 그렁그렁한 눈을 들더니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어엉…. 오라버니…. 잘못했어요…. 제발 가지 마세요…. 앞으로 컵도 안 훔치고 말도 잘 들을 테니까…. 어어어엉….”
조금 장난이 심했나. 펑펑 우는 안솔을 보니 약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것 같아 고맙기도 했고. 나는 안솔의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어줬다. 그러자 또 무슨 오해를 했는지 더욱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다.
“안 돼요! 이대로 가시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아직 저랑 그것도 못했는데! 으아아앙!”
“안…. 응?”
“최소한 저랑 한 번은…! 아, 안 돼. 이럴 시간이 없어. 지금이라도 빠르게…!”
“…….”
그렇게 말한 안솔은 왼손으로 내 바지를 끌어내리는 동시, 오른손으로 자신의 로브를 훌렁훌렁 벗어 젖히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응시하다가, 불현듯 깜짝 놀라 안솔의 정수리를 쥐어박았다.
퍽.
“이 녀석이!”
“아악!”
약간 힘을 담아 때리자 안솔이 머리를 감싸 안으며 철퍼덕 주저앉는다.
“아, 아파라~. …에? 오, 오라버니?”
입을 삐쭉 내밀던 안솔이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본다.
“주, 죽으신 거 아니셨어요?”
“죽기는 누가 죽어. 아무튼, 방금 무슨 짓이야?”
“아, 아니…. 오라버니가 그대로 가버리실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래서…. 사라지시기 전에…. 얼른 임신하려고….”
“이, 임신? 너 인마.”
…하. 이제 정말로 막 나가는구나. 어이없는 기분에 쳐다보자 안솔이 발끈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왜요! 그럼 적어도 애라도 보고 살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리고 애초에 장난치신 오라버니가 나빠요!”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머리를 젖혔다. 뭘 잘했다고 눈 동그랗게 뜨고 또박또박 대드는지. 정말이지 기가 막히는 기분이다. 이래서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 같다.
“아이고….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머리 아파 죽겠는데.”
그때 선율의 힘겨워하는 음성이 들렸다.
선율은 나처럼 이마를 짚은 채 비틀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사라, 하승우, 남다은, 임한나, 신재룡, 한소영…. 백한결은 기절한 듯이 뻗어 있었으나, 거의 모두가 정신을 차린 것 같다.
이윽고 스스로 뺨을 짝짝 때린 선율이 살그머니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우리 설마 죽은 건 아니겠죠?”
엄숙히 머리를 가로저으려다가, 선율의 눈이 게슴츠레 변한 것을 보고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돌기둥 같은 것들이 있지 않았어요?”
가슴이 무거운지 임한나는 등을 두드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말대로였다. 사방은 어두운 숲으로, 우리가 공간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풍경을 보이고 있었다. 확실히 기억하고는 있으나, 딱 하나 차이가 있다면 바로 기둥의 유무였다. 아스트랄 차원의 통로를 열어주었던 15개의 기둥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을씨년스러운 공터만이 휑하니 남아 있을 뿐. 이건 과거의 기억과 똑같네.
여하튼 최후의 순간, 이유정의 외침을 듣고 모래 시계를 베어버린 것까지는 기억한다. 한데 이후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냥 하얀 것밖에 보지 못했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어찌어찌 빠져 나오기는 성공한 것 같은데, 과연 어떻게 된 걸까….
“유, 유정이가!”
그때 임한나가 갑자기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 바로 시선을 올리니 아직도 공중에 떠오른, 온몸이 어른어른 불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보인다. 전신을 휘감은 금빛의 불길은 이제 막 서서히 꺼져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유정은 아련해 보이는 얼굴로(나도 처음 보는 표정이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마치 누군가를 배웅이라도 하듯이. 하늘로 뻗은 손끝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가루가 밤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아니. 비단 이유정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그랬거니와, 다른 모든 동료의 몸에도 반짝이는 가루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허나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 빛나는 가루는 모조리 바람을 타고 올라 하늘로 사라졌다. 그 후에야 이유정이 천천히 하강을 시작했고, 황금빛 기운도 완전히 사그라졌다.
자세히는 모르나 비슷한 현상은 예전에 몇 번 본 적이 있다. 나는 곧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1. 이름(Name) : 이유정(4년 차)
2. 클래스(Class) : 용병 여왕(Secret, Mercenary Queen, Expert)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야만 왕의 후인(後人)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6)
7. 신장 • 체중 : 166.3cm • 54.5kg
8. 성향 : 호전 • 순정(Aggressive • Pure Love)
1. 야성(野性)(Rank : B Zero)
* 사자 왕의 영향으로 특수 능력 ‘피에 젖은 마음’이 고유 능력 ‘야성(野性)’으로 진화합니다.
1. 동체(胴體) 강화(Rank : D Zero)
* 사자 왕의 영향으로 새롭게 생성된 능력입니다.
1. 달빛 단검술(Rank : B Zero)
* 오브아나 알카트라츠의 영향으로 ‘양손 단검술’이 ‘달빛 단검술’로 진화합니다.
2. 묘(猫) 족 체술(Rank : B Zero)
3. 야수(野獸)의 이빨(Rank : C Plus)
* 베가스의 영향으로 ‘백병전’이 ‘야수(野獸)의 이빨’로 진화합니다.
전 : [근력 83] [내구 79] [민첩 92(+2)] [체력 84] [마력 90] [행운 88] 후 : [근력 87] [내구 84] [민첩 94(+2)] [체력 88] [마력 90] [행운 88]
“허.”
이유정의 사용자 정보를 확인한 순간, 속으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래도 아스트랄 차원에서 모종의 기연을 얻은 듯싶다. 레어 클래스에서 시크릿 클래스로 상승한 걸 보면 거의 100%일 것이다.
그나저나 여명의 검투사나 베가스 스티그마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사자 왕이라고? 아차. 그러고 보니 여기가 야만 왕의 무덤이던가? 그러면 이유정은….
“아…!”
그때였다. 한참 생각을 잇던 찰나, 비로소 땅에 안착한 이유정이 허물어지듯이 쓰러졌다. 나는 아까 마녀의 손에 관통 당한 기억을 떠올리고는, 이형환위를 사용해 곧바로 이유정을 받아냈다. 흡사 공주님을 안는 듯한 자세라 약간 민망했지만, 가슴에서 핏물을 철철 흘리는 이유정을 보니 민망함은 바로 사라졌다.
“오빠….”
아직 의식을 잃지는 않았는지 이유정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나…. 잘했어?”
이어서 떨리는 음성으로 조심스레 묻는다.
…나 잘했어 라고.
잠깐이지만 가슴이 살짝 찔리는 기분을 느꼈다. 상당한 중상을 입었음에도 아픔을 호소하는 게 아닌, 내 평가를 바라고 있다. 아마 근래 혼자서 꽤 속을 썩이고 있던 것 같다.
우선 궁금한 것은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하고, 나는 차분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잘했다.”
이유정은 그제야 안심한 듯한 기색을 비치고는 끊어질 듯이 숨을 흘렸다.
“조금만 참아. 사제를 부를 테니까.”
그리고 바로 시선을 돌렸으나, 곧 따로 부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솔과 신재룡은 호들갑을 떨며 지팡이를 찾고 있었고, 다른 동료들은 물약을 외치며 어딘가에 버려진 아기 미믹을 찾고 있었으니까.
나는 싱겁게 웃으며 상처 난 구멍에 손을 얹고 화정의 힘을 일으켰다. 상처 치료에 많은 도움은 못 돼도 몸이라도 따뜻하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잠시 후.
치료에 들어간 두 사제와 하얀 빛에 휩싸인 이유정을 보며, 나는 비로소 이번 원정이 끝났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아니.
우리는, 성공했다.
============================ 작품 후기 ============================
후후. 마녀의 몸(?)과 뺏은 마녀의 장비 이야기는 다음 회에 하도록 해요. 🙂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조아라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습니다.
드디어 제 누명, 아니 오명을 벗을 기회가 온 것이지요. 하하!
정말로 기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