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65
00764 선택의 시간. =========================================================================
어스름한 테라스. 하늘을 물들인 옅은 어둠은 탁 트인 입구로 흘러 들어와 방안 깊숙한 곳으로 스몄다. 테라스 난간에 비치된 라이트 스톤이 말간 빛을 뿜는 가운데, 중앙에 마련된 둥근 식탁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여담이지만, 김수현의 집무실은 굉장히 넓다. 크기는 100평을 가볍게 넘는 정도. 애초 설계할 때 집무뿐이 아니라 숙소, 욕실, 야외 섹스(?) 등 여러 용도를 염두에 두고 개축했다. 그래서 테라스도 여느 방보다 널찍한 면적을 자랑한다. 생각해보라. 이 드넓은 테라스에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저녁 식사를 한다. 맛 좋은 음식과 차갑게 식힌 술, 그리고 경치 좋은 풍경도 곁들였다. 정말 환상적인 분위기가 아닌가?
“…….”
“…….”
…아무래도 아닌가 보다. 왜냐면 현재 김수현과 겸상을 하는 사용자들이 매우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오늘 초대받은 5명은 왼쪽부터 선유운, 신재룡, 안솔, 임한나, 그리고 제갈 해솔. 사내 2명은 원래 과묵한 성격이라손 쳐도, 3명의 여인은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안솔은 토끼 눈을 뜬 채 김수현을 훔쳐보기 바쁘고, 임한나는 낯을 잔뜩 붉힌 채 안절부절못하며, 제갈 해솔은 무언가 대단히 분한 눈을 하고 있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전혀 모를 정도였다.
탁.
식탁에 흐르는 거북한 공기를 감지한 걸까? 김수현이 수저를 내려놓자 5명은 흠칫 몸을 떨었다.
“식사가 입에 안 맞으시나 들 봅니다?”
그러나 5명이 서로 눈치만 살피니 김수현이 머리를 갸웃했다.
“허, 오늘은 약간 신경 좀 써달라고 했는데….”
“아, 아닙니다. 아주 맛있습니다. 하하.”
결국에는 가장 연장자인 신재룡이 나섰다. 그리고 선웃음을 지으며 잘 익은 고기를 썩썩 잘라 먹는다. 이어서 4명이 억지로 수저를 들자 김수현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식사를 재개했다. 동시에 껄끄러운 공기도 재차 흘렀다.
현재 5명이 서먹한 기분을 느끼는 이유는 두 개. 우선은 김수현의 부름이 굉장히 공교로운 일이다. 공적인 용무가 아닌, 이런 사적인 식사 제안이 드물다는 소리다. 그리고 백 번 양보해서 이해한다고 해도, 김수현을 감싸는 분위기가 변한 건 확실히 이상했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 원래 차가운 얼굴인 건 알고 있었으나 오늘 보니 본(本) 인상에 뜻 모를 마력이 깃들었다. 무언가 서늘하면서 썩 찬 느낌. 그걸 위엄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엄숙함이라고 해야 할까. 5명 누구도 정확히 짚어내지는 못했으나 감히 항거할 수 없다는 기분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방금도 그렇다. 그냥 입에 안 맞느냐고 물어봤을 뿐인데, 황급히 수저를 놀리지 않았는가?
기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원인은 바로 김수현의 새로운 능력 ‘군주여, 호령하여라.’ 에 있었다. 저번 3차 회담 때 한소영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A Plus 랭크의 카리스마는 한 번 작정하고 내뿜으면 수백 명 정도는 가볍게 침묵시킬만한 위력을 갖고 있다. A Plus가 그 정도인데, 하물며 S Zero는 말할 필요가 있으랴. 거기다 효과가 상시 발동이라니 김수현을 어려워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말인즉 현재로써는 방법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저 익숙해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그렇게 5명은 이래저래 속이 턱턱 얹히는 걸 느끼면서도 간신히 식사는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환호하며 방으로 들어갔을 때, 책상과 탁자에 놓인, 허연 김을 모락모락 피어 올리는 찻잔을 보며 도로 절규했다. 누가 이랬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아마 식사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고연주가 몰래 갖다 놨을 것이다. 김수현은 역시 센스가 좋다며 칭찬했지만, 5명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잡았다. 이래저래 고난의 연속이었다.
결국 김수현이 본론으로 들어간 건, 찻잔을 깨끗이 비우고 연초를 끝까지 태운 이후였다.
“오늘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살짝 운을 띄운 김수현은,
“뭐, 우선 보시죠.”
곧 책상으로 무언가를 차곡차곡 올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보랏빛 장궁 하나, 길쭉하고 뭉툭한 빛이 흐르는 메이스 하나, 작은 돌 증표 하나. 호기심을 품은 시선이 모이자 김수현은 추가로 세 장의 구즈 어프레이즐(Goods Appraisal : 물품 감정서)을 꺼내 올렸다.
“사용자 선유운은 장궁을, 사용자 신재룡은 메이스를, 사용자 임한나는 증표를 가져가시면 됩니다.”
호명 받은 두 사내와 한 여인은 반사적으로 일어나기는 했으나 서로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가져가시고 구즈 어프레이즐을 읽어보세요. 어서요.”
허나 김수현이 재촉하자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물건과 기록을 집었다. 선유운은 가라앉은 눈으로 장궁을 응시했다. 그리고 1 미터 80 센티미터에 달하는 긴 길이를 보며 작은 탄성을 흘렸다. 구불구불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활대가 인상적이고, 중앙 부근에는 아름다운 장식이 박혀 있다. 홀린 듯이 엄지로 쓸어보니 무언가 요동치는 기운이 느껴졌다. 척 봐도 신이(神異)한 기운을 품은 장궁이다. 무심한 눈동자에 작은 불꽃이 일었다.
『천궁(天弓)』
(설명 : 아주 오랜 옛날, 용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용의 편에 선 인간 중, 일부 변절자는 마(魔)의 힘을 받아들여 한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그 단체의 구성원들은 스스로 ‘Der Freischütz’, 즉 마탄의 사수라고 칭했습니다.
마탄의 사수에 의한 피해가 날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인간들은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원했고, 기원을 담은 하나의 화살을 하늘로 쏘아 올립니다. 그 화살을 바로 ‘천궁’이라고 부릅니다. 그 결과 인간을 가엽게 여긴 신 아폴론은, 무지개의 여신 플라비우스에게 부탁해 기원에 응답하기에 이릅니다.
그날 이후, 인간 진영 곳곳에서 활에 재능을 보이는 이들이 나타나고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재능은 실로 하늘이 내린 수준이라, 용의 힘을 받은 마탄의 사수조차도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허락한, 신에 의해 태어난 궁수를 ‘천궁’이라고 일컫습니다.)
“…어.”
이윽고 구즈 어프레이즐을 읽은 순간, 선유운은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그것은 신재룡, 임한나도 마찬가지였다.
『신성 투사(Sacred Champion)』
(설명 : 역사적으로 성전(聖戰)은 수도 없이 일어났으나, 가장 의미 있는, 그리고 가장 거대했던 전쟁을 꼽으면 복마전(伏魔殿)을 상대로 한 그라치아(Gratia) 교단의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종교적 이념에 의한 전쟁이라기보다는, 거룩한 사명을 띤 전쟁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라치아 교단은, 복마전의 일방적인 선전포고로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린 안젤루스 교단을 구원하기 위해….)
“그러나 복마전의 힘은 강력했고…. 종래에는 대항할 수단을 강구하기에 이르는데…. 엄선한 팰러딘 중에서…. 금지된 주문인 강신을 풀어, 성인에 대항할 전사를 키워내기에 이르는데…. 그들을…. 신성 투사….”
신재룡은 길쭉한 메이스를 양손으로 고이 받쳐 든 채, 멍한 음성으로 띄엄띄엄 중얼거리고 있다.
“사용자 신재룡은 신체 능력도 꽤 괜찮지 않습니까? 그래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하.”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재룡이 망연히 눈을 들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이미 다른 데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나 너는…. 말 안 해도 알고 있지?”
임한나 역시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김수현의 말은 들렸는지 증표를 양손으로 살며시 감싸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얼마나 기다렸는가? 황혼의 무녀로 한 조각, 용이 잠든 산맥에서 한 조각, 그리고 지금 한 조각. 이 세 조각이 모임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고대 무녀가 완성된 것이다.
“좋습니다. 확인했으면 세 명은 이만 나가셔도 좋습니다.”
이윽고 축객령을 내리자 3명은 동시에 시선을 올렸다. 김수현은 미미한 웃음을 보였다. ‘그런 눈치라고는 밥 말아 먹은 자네에게….’. 예전 이만성이 말한 대로, 김수현은 연애를 제외한 부분에서는 눈치가 좋다.(물론 스스로는 연애에 관해서도 좋다고 생각, 아니 착각하고 있지만.) 5명이 ‘왕이여, 호령하여라.’ 의 효과로 어색해 한다는 사실은 이미 진작 눈치채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3명은, 특히 선유운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잠시만. 클랜 로드.”
“응?”
“이건 도대체 어디서….”
“아…. 그냥 정당한 거래로 얻었습니다. 아무튼, 자세한 사정을 굳이 알 필요는 없을 텐데요.”
굳이 알 필요는 없다. 간단한 말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명백했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러자 선유운, 신재룡, 임한나는 갑자기 정말로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선유운은 말을 더듬었다.
“하, 하지만…. 저희가, 어떻게 이걸.”
“받겠느냐고요? 그래요? 받기 싫습니까?”
약간 장난스럽게 느껴지는 음성에 선유운은 본능적으로 활을 움켰다. 이상하게도 활대가 뜨거웠다. 받기 싫으냐고? 아니, 좋다. 좋지 않을 리가 없다. 좋은 걸 넘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클래스 계승은 사용자라면 누구나 오매불망 꿈꾸는 일이 아닌가? 물론 한편으로는 ‘정말 받아도 될까?’ 라는 생각이 스쳤으나, 그보다 꼭 갖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그만큼 3명의 감정은 한층 격앙돼 있었다.
“단, 하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때 김수현의 음성이 방안을 나직이 울렸다.
“저는 여러분의 그동안 쌓아온 공적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물론 실력도 인정하고요.”
“…….”
“하지만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더욱 높이, 드높이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
“그와 동시에 자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설령 그 클래스를 계승한다고 해도, 머셔너리에는 여러분보다 강력한 사용자가 있으니까요. …가령 고연주, 남다은, 허준영 등등.”
“…….”
3명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왜냐면 말에 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자 여왕(Queen Of Silhouette) 고연주, 검후(劍后) 남다은, 침묵의 집행자(Executor Of Silence) 허준영. 사실상 김수현을 제외하면 머셔너리 클랜 내 1, 2, 3위를 다투는 사용자들이다.
“방금 말한 세 명을 넘어설 자신이 있다면. 그걸 갖고 방을 나서도 좋습니다.”
그리고 김수현은 넘어서라고 말했다. 3명의 사용자는 그러고도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갈등하는 낯빛을 숨기지 못한 채. 그러나 결국에는 먼저 정신을 차린 선유운을 시작으로, 흡사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홀연히 문을 나가는 이들을 확인한 후, 김수현은 남은 2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솔.”
먼저 부른 건 안솔이었다.
“네, 네! 오라버니!”
안솔은 차려 자세로 벌떡 일어섰다. 천연한 낯에는 기대감이 잔뜩 서려 있다. 무슨 일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김수현이 무언가 굉장한 것을 줬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선물이, 그것도 오라버니가 준 선물이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안솔은 산타클로스를 보는 눈으로 양손을 척 내밀었다.
“너도 나가도 좋아.”
그러나 김수현은 빙긋 웃는 낯으로 안솔의 기대를 배신했다.
“에?”
“나가도 좋다니까. 너한테 더 이상 볼 일은 없으니까.”
“네, 네? 그, 그럼 왜….”
“밥 맛있었지?”
그러자 안솔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그렁그렁해졌다. ‘정말이요?’ 라는 눈초리로 쳐다봤으나 김수현은 어깨를 으쓱 들먹였다. 오히려 얼른 나가라고 검지로 문을 가리킨다.
“…느에에에.”
심하게 놀림 당했다는 기분을 지우지 못했으나 안솔은 얌전히 몸을 일으켰다. 기분 같아서는 으앙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김수현을 보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니 오직 최소한의 반항으로 아직 반쯤 남은 식은 찻잔을 거칠게 들이킬 뿐.
그때였다.
“응?”
질끈 눈을 감은 채 벌컥벌컥 들이켜던 안솔은 돌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언가 작고 동글동글한 것이 찻물과 함께 입안으로 쏙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전히 쏟아 붓다시피 한 찻물을 타고 그대로 목구멍 안으로 골인했고,
『행운 상승의 영약을 복용합니다.』
『2 능력치 포인트가 새롭게 생성됩니다.』
이어서 눈앞으로 두 개의 메시지가 출력됐다.
“푸우우우!”
안솔은 아직 입안에 남은 찻물을 세게 뿜었다.
“…아.”
분사된 찻물벼락(?)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제갈 해솔은 고요히 눈을 감았다.
“아, 아니! 캑캑! 죄, 죄송! 우캐캐캐캐캐캐캑!”
사레가 들린 걸까? 안솔은 한 마리 원숭이로 빙의해 방안 곳곳을 뛰어다녔다. 마치 자신 좀 어떻게 해달라는 듯 제갈 해솔의 등을 퍽퍽 때리고, 탁자에 이마를 쿵쿵 찧는다. 한숨을 푹 흘린 제갈 해솔이 가볍게 손을 튕기니, 이내 안솔의 몸이 푸른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이로써 방에는 한 여인이 남았다. 제갈 해솔은 정면에서 전해지는 흥미로운 시선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1층으로 보냈어요. 지나가던 누군가가 도와주겠죠.”
“잘했습니다.”
김수현은 담담히 말하고는 책상으로 또 한 번 물건을 올려놓았다. 이번에는 빛과 어둠이 섞은 구슬과 은은한 푸른빛이 흐르는 부채였다. 제갈 해솔은 최대한 김수현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두 물건을 심드렁히 응시했다. 쳐다보는 눈동자에는 어느새 황금빛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사용자 제갈 해솔은….”
김수현이 입을 연 순간이었다.
“싫어요.”
============================ 작품 후기 ============================
하하. 저도 몰랐는데, 오늘이 연재 2주년이네요.
독자 분들이 말씀해주셔서 저도 알게 됐습니다…. 는 실은 아니고요.
죄송합니다. 제가 진짜 하소연할 곳이 여기밖에 없네요.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었느냐 면요.
아버지 : 유진아, 너 이제 곧 2주년 아니니?
로유진 : 네? 아 그런가요?
아버지 : 그럴걸?
로유진 : 잠시만 확인 좀…. 어, 그러네요. 곧 2주년이네요.
아버지 : 축하한다. 이왕 시작한 거, 꼭 완결까지 가렴.
로유진 : 헤헤, 감사합니다…. 가 아니라, 아버지? 잠시만요?
아버지 : ㅂㅂ. 출근함.
로유진 : 아버지! 아빠아아!
…네. 이렇게 알게 됐습니다.
아 이해가 안 됩니다.
안 읽는다고는 하시는데, 그럼 어떻게 2주년인걸 정확히 알고 계시냐고요.
이 와중에 형은 또 “음. 그럼 슬~슬 밀린 부분을 읽어볼까?” 이러고 있습니다.
아오, 진짜.
내가 그렇게 사정사정했는데. 제발 놀리지 좀 말라고.
아오, 그냥.
아오오오오오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