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66
00765 장비 나와라, 뚝딱! =========================================================================
“응?”
“안 봐도 뻔하죠. 그거 받고 클래스 계승하라는 소리 아니에요. 그러니까 싫어요.”
제갈 해솔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서 딱 잘라 거절했다. 무언가 기분이 나쁜 걸까? 볼은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고 눈은 실을 연상케 할 정도로 가늘다. 평소처럼 건방지다기보다는, 오히려 시선을 피하려는 느낌. 허나 싫다는 목소리만큼은 매우 단호했다. 나는 양손을 깍지 낀 채 놓고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주려는 거 아닌데요?”
“갑자기 반말…. 아니. 뭐, 뭐라고요?”
하하. 천하의 제갈 해솔도 이건 예상치 못한 건가? 화들짝 놀라는 얼굴이 꽤 웃기다. 그러나 킥킥 웃는 걸 봤는지 아랫입술을 와락 씹더니 이맛살을 몹시 찡그린다. 이런, 정말로 화난 건가.
“농담입니다.”
“당신, 정말….”
그러나 예상외로 제갈 해솔은 화내지 않았다. 그냥 삼키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더니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이러나저러나 분하기는 한지 끙끙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신음 한 번 야하네. 꼭 강아지 같아.
“아무튼, 들어나 봅시다. 왜죠?”
“후~우.”
“사용자라면 누구나 클래스 계승을 꿈꾸고 원합니다. 그런데 사용자 제갈 해솔은 왜.”
“잠깐만요. 말할게요, 말하는데.”
그때 말을 끊고 들어온 제갈 해솔이 심히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왼쪽을 가리키며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저쪽으로 눈 좀 돌려주면 안 돼요?”
“눈을 돌려달라고요?”
“네. 그러니까 나랑 눈 좀 마주치지 말아달라고요.”
“그게 무슨….”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클랜 로드, 제발.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고요.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저는….”
“…저는?”
“아마 조만간, 아니 오늘 밤이라도 당신의 몸 아래 깔리게 되겠죠.”
“예?”
“그리고 그동안 소중히 지켜온 처녀막을 무참히 찢고 들어오는 흉물을 느끼고, 추접스러운 교성을 지르며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릴 거예요. 바로 저 침대에서.”
“…….”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다.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 상상력이 뛰어난 건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건 완전 상상, 아니 망상에서 개헤엄 치는 수준이잖아.
“그렇게 되기는 죽기보다 싫어요. 아직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얼마나 많은데. 이대로 당신의 육체 노예가 되는 건 정말로 싫다는 말이에요.”
“사용자.”
“아 보지 말라고요, 좀! 사람 말이 말 같지가 않아요?”
“사용.”
“그럼 애초 이상한 기운을 풍기지나 말던가!”
“사.”
“왜!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 풀풀 풍기면서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하~아.”
결국에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말려드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됐습니까?”
“네. 사실 여전한 것 같지만, 그나마 낫기는 해요.”
삽시간에 신비로운 음성으로 돌아온 제갈 해솔은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럼 말하기에 앞서, 그거 두 개 구경 좀 해도 돼요?”
“얼마든지.”
가져가라는 의미로 손짓하니 성큼성큼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윽고 구즈 어프레이즐을 읽기 시작했는지 정적이 서서히 내려앉는다.
『백야(白夜)의 무희(舞姬)』
(설명 : 무희란 본래 춤을 추는 여인을 뜻하며, 고대 홀 플레인에서는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물로 인식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백야의 무희가 출현한 이후 그 인식은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이 특출한 무희의 기원은 태양이 어둠에 먹힌 시절, 신녀곡(神女谷)에서 스스로 걸어 나온 한 여인에게서 시작됩니다.
여인은 전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흉(凶)과 화(禍)를 막고, 길(吉)과 복(福)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고아한 춤사위는 죽어버린 토지를 달래고, 단 한 번 선자(扇子)를 떨침으로써 하늘을 가리는 어둠을 물리쳐, 온 인간의 우러름을 받았습니다.
끝에는 강력한 악령에게 패배 당해 저속해지기는 했지만, 결국 스스로 악령에게 안겨 나락으로 타락하는 길을 선택한 비운의 여인입니다. 이처럼 비록 최후는 아름답지 못했다고는 하나, 세상을 구원한 아름다운 기적을 의심할 여지는 없습니다.
백야의 무희는 초자연적인 존재, 혹은 신비적인 힘을 비는 토속 주술에 근간을 두며, 특히 악(惡)을 상대로 절대적인 상극 관계를 가집니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애초 백야의 무희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악마와 절대적인 상극 관계라는 설명이 눈을 끌었고, 한편으로는 비밀 도서관에서 ‘신녀곡’에 관한 기록을 읽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제갈 해솔이 싫다고 해도 새로운 사용자를 키우면 그만이다. 딱히 제한은 없는 것 같으니까.
『빛(光)과 어둠(暗)의 결정(Crystals Of Light And Darkness)』
(설명 : 빛과 어둠이 절반씩 혼재돼 있는 ‘혼돈’의 결정입니다. 여태껏 단 한 번을 제외하면 세상에 드러난 전적이 없는, 매우 강력한 정령과 연결된 결정(結晶)입니다. 재능이 굉장히 뛰어난 사용자가 아니라면 섣불리 사용하지 않는 걸 권합니다.)
그러나 빛과 어둠의 결정은 얘기가 다르다. 비교적 간단한 설명은 차치하고서라도, 이처럼 주의 사항이 붙어 있는 경우는 절대로 만만하게 볼 수 없다. 말 그대로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진정한 재능 있는 사용자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제갈 해솔을 생각했는데….
“클랜 로드. 궁금한 게 있는데, 시크릿 클래스와 각성 시크릿 클래스의 차이가 있나요?”
그때 호기심 가득한 제갈 해솔의 음성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뜰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별로 차이는 없습니다. 있어봤자 발현 과정…. 그 정도일 겁니다.”
“으응. 그렇군요. 아무튼, 구경 잘했어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네요.”
깔끔한 거절. 제갈 해솔은 아마 결심을 달리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사실 나로서는 당최 이해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니까. 우선은 들어보기로 했다.
“음~. 물론 이렇게 챙겨주신 건 고맙지만….”
조금 기다리니 약간 고민하는 듯한 음성이 이어졌다.
“저는 제가 가고 싶은 길에 불순물이 끼어드는 걸 원하지 않아요.”
“불순물?”
“네. 저는 이 세상에 입장할 때 저한테 주어진 것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거든요.”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럼 이런 것들이 걸리적거린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니죠. 홀 플레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요. 당연히 도움이 되겠죠. 하지만 제가 가고 싶은 길에는 확실한 방해가 될 것 같네요.”
“…….”
젠장, 표정이라도 보고 싶은데. 눈을 감고 있으니 엄청나게 갑갑하구나.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그러니까 순수성을 지키고 싶다고 해야 할까요?”
“순수성.”
“그렇죠. 오직 마법의, 마법에 의한, 마법을 위한 사용자 제갈 해솔. 즉 저는 마법사이고, 마법사로서 근원에 다다르고 싶으니까요. 금번 원정에서 확실하게 느꼈어요.”
“근원이라….”
꽤 긴 문답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내 제갈 해솔의 높은 목소리에는 극히 미미한 불꽃이 맺혀 있었다. 헛소리고 아니고를 떠나서 최소한 진심이라는 소리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문득,
‘어렸을 때부터 피나는 노력을 거쳐 조금씩 마력을 쌓아나가고, 머리가 터져라 마법 책을 읽고, 손가락이 부서지도록 주문을 맺으며 연습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별 꼴같잖은, 수련 같지도 않은 수련을 하고 능력을 사용하는 주제에, 우리들의 이루어놓은 성과를 의심하지를 말았으면 좋겠구나.’
마볼로의 비웃음과,
‘인간을 후계자로 두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제갈 해솔이라는 인간은 그렇습니다. 수천 년을 살면서 그 정도의 재능을 지닌 인간은 한 다섯, 여섯 명 정도 봤을까요? 아마 고대 시절의 홀 플레인에서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한 시대를 주름잡았을 겁니다.’
헬레나, 아니 마그나카르타의 감탄이 뇌리를 스쳤다.
무언가 알 듯 말 듯한 기분. 정확히 짚어내지는 못하겠지만, 여하튼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다. 동시에 미약한 소름이 끼쳤다. 생각해보니 제갈 해솔은 1회 차에서도 일반 클래스였던 걸로 알고 있다. 말인즉 아무리 좋은 의도였다고는 하나, 어쩌면…. 나는, 제갈 해솔의 빛나는 미래를 망칠 뻔한 게 아니었을까?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에는 설득을 포기하기로 했다. 본인의 의지가 저리도 확고한데 강제로 계승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냥 인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리라.
“후회요? 후후. 전혀 안 해요. 저는 최소한 마법에 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생각이니까.”
“열의는 좋습니다만, 가끔은 겸손한 모습도 보기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어떡해요 그럼? 자신 있는 걸 어떡하라는 말이에요~.”
“하, 누가 말리겠나요.”
선웃음을 지은 후, 그간 계속 만지작거리던 마력 상승의 영약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윽고 제갈 해솔은 한창 연구 중에 끌려왔다며 이만 가도 되느냐고 물었고,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곧 이제는 익숙한 마력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비로소 눈을 뜨니 제갈 해솔은 자리에 없었다.
“힘드네.”
의자에 몸을 묻자 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온다. 어째 얻는 것보다 나눠주는 게 더 고된 기분이다. 어쨌든 이로써 남은 건 3개의 정령 결정과 백야의 무희. 그리고 근력, 내구, 마력의 영약.
“그러고 보니 형의 마력 능력치가 얼마였더라?”
*
결과적으로 그날 이후, 머셔너리 클랜에는 두 명의 각성 시크릿 클래스와 한 명의 시크릿 클래스가 새롭게 탄생했다. 그리고 소문은 무서운 속도로 퍼졌다. 하기야 그저 그런 소문도 아니고, 무려 클래스 계승에 관한 건데 가볍게 넘길만한 거리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 소문에 힘입어 회의장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아직 계승할 클래스는 네 개가 남았으며, 누구든지 좋으니(최소한으로 클래스 제한은 걸었다.) 자신만 있으면 찾아오라고 공지한 것이다. 그냥 ‘혹시나.’ 라는 생각에 온다면 단단히 깨질 줄 알라는 경고와 함께.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용자를 스카우트하거나, 앞으로 들어올 예비 사용자를 육성하는 방법도 있기는 했다. 허나 클랜원들을 우선하여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러는 게 옳기도 했고, 또 뒷말도 나오지 않을 테니까.
그러는 동안 여러 날이 흘러, 내(內) 도시 발전도 상당히 진척됐다는 보고와 특수 건물 이전 작업도 마쳤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물론 그에 발맞춰 우리도 머셔너리 아카데미 공사에 들어간 상황. 이렇게 큰 사건 사고 없는 나날이 지속되는 듯했으나, 사실 근심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죄송해요. 도련님? 정 급하시면 저희가 연락이라도….)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직 강철 산맥에 있다면서요?”
(네….)
“그럼 기다리는 게 낫겠네요. 돌아오면 바로 연락 좀 주시겠습니까?”
(네. 꼭 전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확답을 받은 후 통신을 끊었다. 빛이 사라진 통신용 구슬을 보며 연초를 하나 물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형은 내가 원정을 출발할 때도 강철 산맥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강철 산맥에 있다. 그럼 약 두 달, 아니 이제는 거의 세 달에 가깝게 체류하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연기를 푹푹 내뱉은 후 책상으로 시선을 옮기니, 반짝이는 세 개의 결정과 푸른빛이 흐르는 부채가 눈에 들어온다. 보면 볼수록 얼른 처리하고 싶다는 기분이 강해진다.
기실 이렇게 안달이 나는 이유는 하나. 엄밀히 말하면 영약은 나중에 줘도 큰 상관이 없다. 능력치 포인트 상승은 몇 초면 끝낼 수 있으니까. 그러나 클래스의 경우는 확연히 다르다. 계승하고 나서도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만큼, 지체할수록 손해 보는 기분이 가시지를 않는다. 그리고 여태껏 한다고 하면서 계속 미뤄왔으니,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확실하게 처리하고 싶기도 했고.
달칵.
그때였다.
“아~빠~!”
돌연히 문이 스르르 열리는가 싶더니, 누군가 앙증맞게 나를 부르며 달려온다. 황급히 연초를 끄고 몸을 돌리니 13쌍의 날개를 파닥거리는 마르가 덥석 안겨 들었다. 어이쿠, 무거워졌네. 그새 또 성장한 건가.
“마르 왔어?”
“응!”
무언가 신 나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등을 토닥이며 묻자 마르는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책상을 가리켰다.
“아빠. 저건 뭐예요?”
“응?”
“저거요, 저거. 예쁜 상자요.”
“예쁜 상자?”
결정이나 부채가 아니라?
뒷말은 속으로 꿀꺽 삼킨 후 시선을 돌렸다.
마르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아, 저거?”
6개의 상자가 반듯하게 쌓여 있었다.
무려 100만 GP나 주고 구입한 ‘괴물 소환 상자 4’였다.
============================ 작품 후기 ============================
* * * ┏┓ * * * 내 손 끝은 빛나고,
* * * ┃┃ * * * 키보드는 심판을 내린다.
*┏━┛┗━┓* 기꺼이 독자에게 응전하고,
*┗━┓┏━┛* 놀림엔 인터뷰로 되갚으니.
* * * ┃┃ * * * 오, 신이시여.
* * * ┃┃ * * * 나를 남성 곁에 두시고, 사내들 중에 세우소서.
* * * ┃┃ * * * 남의 성별을 매도하는 자, 이번 크리스마스에 솔로이리라.
* * * ┗┛ * * * 그것이 신의 뜻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