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70
00769 여왕의 혈통(血統). =========================================================================
(수현아!)
반가움이 듬뿍 묻은 격한 음성이 흘렀다. 구슬에 비친 형상은 예상대로 형이었다. 아직 도시로 돌아온 건 아닌지 구슬이 보여주는 하늘 풍경이 훨훨 지나가고 있다. 형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간신히 표정을 관리했다.
“그동안 뭘 하고 지낸 거야? 그것도 몇 달 동안이나.”
(아,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겼었거든. 성공하고 지금 돌아가는 길이야.)
“하고 싶은 일? 뭘 성공했는데?”
(아마 너도 들으면 깜짝 놀랄걸?)
형은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는 가벼운 윙크를 날렸다. 아마 지금 가르쳐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나 되게 많이 찾았다면서? 우리 수현이, 형이 그렇게 보고 싶었어?)
“걱정되니까 그렇지! 아무 말도 없이 몇 달 동안….”
(와, 그럼 형 걱정해준 거야? 정말로?)
“호, 이렇게 나오시겠다.”
형의 장난은 나를 굉장히 부끄럽게 만들지만, 이럴 때는 특효 약이 있다. 이내 여기 보라는 듯 연초 한 대를 꼬나무니, 형은 능글맞은 웃음을 싹 지우고 엄한 기색을 비쳤다. 그리고 (어허, 수현아.) 라고 꾸중한다.
“왜. 나도 작정하고 연락 없이 지내볼까?”
(미안, 미안해. 형이 정말 잘못했다. 그러니까 제발 그러지는 말아주라.)
엄포 놓듯이 말하니 형이 곧바로 사과했다. “흥.” 연초를 품으로 되돌린 후, 구슬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형의 주변 풍경이 수풀이 아니라 하늘이잖아? 그리고 스치는 속도는 왜 이렇게 빠른 거야?
“형. 혹시….”
(응? 수현아, 잠깐만.)
형은 돌연히 양해를 구하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이윽고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훤칠한 이마가 서서히 찌푸려졌다.
(이상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어두워진 거지….)
“어둡다고? 당연하잖아. 밤 시간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아까보다 훨씬….)
“……?”
그때였다. 문득 후끈후끈한 바람이 어디선가 훅 밀려왔다. 기운을 느낀 순간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하고도 흉흉한 느낌. 흡사 꽁꽁 농축된 거대한 악의(惡意)와 마주한 듯한 기분. 어찌나 강력한지 EX 랭크에 오른 심안으로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
흐어어어어어어어….
이어서 들려오는 기괴한 공명음(共鳴音). 흡사 죽음을 앞둔 병자가 내지르는 듯한 단말마의 울림은, 엄청난 증오와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만 들은 건 아닌지, 정원으로 삽시간에 웅성거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간신히 턱을 젖히니 먹구름, 아니 먹구름도 아니다. 시꺼멓게 변색한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비로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형, 나중에 연락할게.”
우선 통신을 끊은 후,
– 닫아!
“닫아!”
화정과 내 외침이 겹쳤다. 곧바로 중앙을 바라보니, 허공에 떠오른 칠흑 빛 마법 진에서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통신 때문에 걸음을 옮긴 터라 나와는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다. 그나마 목소리는 닿았는지 곧 고연주, 하승우, 허준영이 동시에 치달리기 시작했다. 속도는 고연주가 가장 빨랐으나 거리는 하승우가 가장 가까웠다.
– 안 돼, 이미 늦었어…!
그때였다. 한순간 고연주의 형상이 땅으로 꺼지듯이 사라지더니, 마법 진 바로 아래서 불쑥 솟아올랐다. 고연주는 솟아오르는 동시에 빛살처럼 손을 내뻗었고, 바닥에 놓인 상자의 입구를 힘차게 후렸다. 이어서 텅, 소리와 함께 상자가 도로 닫힌 순간, 내부를 가득 채우던 이상한 기운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턱 막혔던 숨이 이제야 흘러나간다.
– 와, 됐다! 야, 김수현! 쟤 누구야?
‘고, 고연주. 그림자 여왕.’
– 아~. 그림자였구나. 쟤 센스 괜찮네. 거의 0.1초 차이였어.
‘0.1초?’
– 어. 그림자에서 완전히 솟아오른 후에 상자를 집고 닫았으면, 아마 100% 늦었을걸? 치솟는 동시에 입구를 쳐서 닫았으니 아슬아슬하게 맞춘 거지. 후유, 여하튼 십 년 감수했네.
‘젠장, 100만 GP가 또 날아갔잖아. 이번에는 또 누구였던 거야?’
이로써 100만 GP나 주고 산 상자가 두 개나 날아갔다. 매우, 엄청나게 아까웠으나 한편으로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했다. 아까 세 번째 상자를 개봉했을 때는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타나토스의 꽃이 약해서라기보다는, 힘의 격차가 너무나 큰 탓에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게헨나가 차원 이동 진을 넘어 등장했을 때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본능적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인간이 상대할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하게 느꼈다. 아까 느낀 악의는 그 정도로 강렬하고 거대했다.
– 고대 악신(惡神)…. 그 정도로 보면 돼.
‘고대 악신? 그놈은 또 얼마나 강한 거야? 이번에도 동급?’
– 아니, 동급까지는 아니고. 한 서너 단계 아래 급으로 봐야지.
‘서너 단계 아래라….’
– 그래도 얕보지 마. 창조신 계열을 기준으로 서너 단계 아래라는 소리는, 어지간한 신들은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니까.
‘으음.’
– 만약 정상적으로 소환됐으면 이 도시는 하루도 안 돼서 소멸했을 거야.
‘알겠다.’
화정의 말을 듣고, 나는 더 이상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 예전에 각성한 쿠샨 토르를 처리한 이후, 그동안 신이라는 존재를 우습게 본 감이 없잖아 있는 듯했다. 생각해보면 반신, 그것도 갓 각성한 존재에 불과했는데. 괜한 욕심을 부렸다가 허망하게 죽느니 그냥 미련 없이 포기하는 게 나으리라.
– 그래, 잘 생각했어. 그리고 오늘은 이제 그만둬. 쟤 보니까, 오늘 더 하면 안 될 것 같다. 느낌이 너무 이상해.
화정의 말이 백 번 옳다. 무조건 안솔에게 맡기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행운을 올려도 너무 올린 게 문제였다. 미젯 스미스나 오벨로 기사처럼 상대 가능한 괴물이라면 모를까, 타나토스의 꽃이나 고대 악신을 척척 소환해대는데, 이건 허용 범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나는 상자 하나를 남겨두고 해산할 것을 지시했다.
*
형은 빠르면 이틀, 늦어도 사나흘 안에는 도시로 도착한다고 했다. 강철 산맥에서 아틀란타까지 사나흘이라니 도저히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형은 ‘그래? 그럼 내기라도 할래?’ 라고 자신감을 내비쳤고, 나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어지간해서는 확신하지 않는 형의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기다리겠다고 하자 형은 아쉬워하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지만, 어쨌든 돌아오자마자 나와 만나기로 약속했다. 긴히 할 말도 있고, 뭘 저렇게 숨기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여하튼 형과의 만남을 제외하면, 현재 가장 급선무는 ‘강화’였다. 나를 강화하고, 클랜원들을 강화하고, 나아가 북 대륙 전체를 강화해야 한다. 현재 아틀란타를 중점으로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단순히 자리를 잡은 것과 안정화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으니까.
그러나 아틀란타를 북 대륙 정도로 안정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정도로 안정화하려면 몇 년이나 걸릴지 예상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제로 코드를 발견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그 시간을 앞당기는 방법은 확실히 있다. 바로 내가 알고 있는 성과를 모조리 공개하는 것이다.
그러면 활동은 한층 활성화될 테고, 곳곳의 성과는 훨씬 빠르게 발견되며, 당연히 안정화 속도도 상승한다. 결과적으로 북 대륙 전체의 수준이 향상된다. 성과 습득은 물론, 탐험하는 것 자체로 얻을 수 있는 경험치도 무시 못 할 테니까.
그러다 적당하다 싶을 때를 노려, 최후의 대륙 ‘테라’를 공개하고 진군한다. 이게 바로 현재 내가 세운 계획이다. 그래서 가브리엘과 협상할 때 비밀 도서관 기록 중 3할만 건드리겠다고 한 것이다.(물론 이 3할은 온전한 머셔너리의 몫이며, 해밀이나 이스탄텔 로우는 따로 계산한다.) 애초 아틀란타에 잠든 성과는 북 대륙처럼 독식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물론 테라 공개는 아직까지 머나먼 계획이기는 하다. 현재로써는 아직 나와 클랜원들을 강화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으니까. 허나 이 단계도 이제 거의 끝났다고 봐도 좋다. 물, 불의 결정의 주인은 이미 내정했다. 백야의 무희는 지켜보면 된다. 근력, 내구, 마력 상승의 영약도 누구에게 줄지 정했다. 그리고,
‘아차, 빛과 어둠의 결정이….’
똑똑, 똑똑.
달칵.
그때였다. 한창 상념에 잠겨 있을 즈음, 누군가 문을 살짝 열고 들어오는 기척이 잡혔다. 흘깃 눈을 돌리니 13쌍의 날개를 펄럭이는, 작은 은발의 소녀가 눈에 들어온다.
“마르니?”
“아빠~.”
부드러이 날아오는 비행체(?)를 안은 순간, 마르가 또 성장했다는 게 느껴졌다. 이제 아이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앳된 소녀의 향기를 풍긴다. 아마 근원의 동생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라, 한 번 볼 때마다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빠 아빠, 있잖아요.”
무에 그리 궁금한 걸까. 마르는 총명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쳐다봤다. 무언가 굉장히 기대하는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약간 급해 보이기도 했다.
나를 붙잡고 흔드는 마르를 어르고 달래며,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그러고 보니 근래 마르의 성장 정도를 확인하지 못했다. 저번에 봤을 때는 마르의 정보도 상당히 괜찮았던 것 같은데….
1. 이름(Name) : 마르
2. 클래스(Class) : -(미정)
3. 소속 국가(Nation) : -(미정)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1. 하프 엘프(Half Elf) 2. 여왕의 혈통(血統) • 요정의 숲
6. 성별(Sex) : 여성(1)
7. 신장 • 체중 : 94.2cm • 18.1kg
8. 성향 : 질서 • 순수(Lawful • Pure)
* 1차 각성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 강제로 받아들인 날개이기는 하나, 기적의 영향으로 현재는 완전하게 정착했습니다.
* 날개에 잠재된 지식을 저절로 습득합니다. 차후 성장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합니다.
* 13쌍의 날개는 역사상 처음으로 출현했습니다. 최고라 불리는 요정 여왕의 날개도 12쌍입니다. 만일 이대로 3차 각성까지 완료할 경우, 규격 외의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1. 가네샤의 축복(Rank : EX)
1. 진리를 꿰뚫는 요정의 눈(Rank : B Plus)
1. 하늘의 기적(Rank : S Plus)
2. 정령의 수호(Rank : EX)
3. –
“헉?”
마르의 거주민 정보를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한심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무언가 상당히 많이 변화했다. 신장과 체중은 당연히…. 아니 이것도 너무 성장했는데. 이뿐만이 아니라 진명, 능력치, 능력도 변했다. 특히 특수 능력에 자꾸만 눈이 갔다.
진리를 꿰뚫는 요정의 눈? 원래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 아니었나? 내가 모르는 사이 엄청난 변화라도 겪은 건가?
“아빠, 아빠~. 응?”
“어, 어?”
“빨리 가요. 네?”
“어디를?”
이런, 딴 생각에 빠져 있느라 마르의 말을 듣지 못했다. 허나 마르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창고요.”
“창고?”
“어제 망치요.”
“어제 망치? 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
“네!”
“그게 왜?”
“그거 얼른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
갑자기 창고는 왜 가자고 하는 걸까.
– 그냥 가주지 그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손해는 안 볼 것 같은데.
머리를 갸웃한 찰나, 화정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손해는 안 본다고?’
– 그래. 저번에도 한 번 말하지 않았나? 요정 여왕이 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으음.’
– 한 번 가봐. 어쩌면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하기야 가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그래, 가자꾸나.”
차분히 몸을 일으키며 말하니 마르가 뛸 듯이 기뻐했다.
“와! 신 난다!”
“왜 그렇게 신 나는데?”
그러자 마르는 양손을 앙증맞게 쥐어 올리더니,
“내가 아빠한테 좋은 거 해줄게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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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선 뿌리기가 끝났네요.
이제 서서히, 새로운 파트로 돌입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