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72
00771 최후의 전조는 조금씩 태동하고. =========================================================================
“사실 조금 놀랐습니다. 아스타로트도 아니고, 설마 당신이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네요.”
어둠 속, 깔끔한 야회 예복을 입은 악마가 어둠에 몸을 묻는다. 말하는 목소리는 약한 비난 조가 섞여 있었으나, 이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앉으시죠. 아쉽네요. 미리 기별을 주셨다면 좀 더 좋은 공간에서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요.”
“함부로 침입한 건 사과하도록 하지. 루시퍼.”
사탄은 순순히 사과했다. 루시퍼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시답잖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누가 그러면 철없는 행동처럼 보일지 몰라도, 말쑥한 인상의 루시퍼가 그러니 까닭 없이 품위 있어 보였다.
사탄은 느릿하게 걸어와 적당한 어둠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흘깃 오른편을 흘겼다가 도로 앞을 응시했다. 방금 사탄이 쳐다본 곳은 루시퍼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공간이었다. 그것을 의식했는지 루시퍼는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시는 겁니까?”
“흠?”
“아뇨. 이미 소문은 들으셨을 거라 생각되니까요.”
“…플루톤 말인가.”
사탄은 낮은 침음을 흘렸다. 플루톤. 그저 그런 마족도 아니라, 무려 악마 14 군주 중 일 좌를 차지하는 악마. 그런 악마가 얼마 전 소멸했다. 소중한 전력임은 두 말할 것도 없으며, 아무리 대 악마라도 속이 쓰릴 일이다.
한데 플루톤을 예하로 두고 있던 루시퍼는 먼저 말을 꺼냈다. 흡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사탄은 느긋이 다리를 꼬았다.
“그래서, 어떻지?”
“이야, 정말 큰 일이라니까요. 플루톤을 잃은 슬픔이 큰지, 프로세르피나도 필사적으로 장악에 힘쓰고 있어요.”
청승맞게 웃어 젖히는 루시퍼. 사탄은 문득 짜증을 느꼈다. 루시퍼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실없는 얘기를 꺼내는 건,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지를 전달한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사탄은 고민했다. 적당히 화제를 돌릴까, 아니면 툭 까놓고 직구를 던질까?
결국 선택한 건 후자였다.
“상황이 썩 좋지가 않아.”
루시퍼는 또 한 번 눈을 크게 치떴다. 아까는 의례적인 표현에 불과했다면, 이번에는 확실한 감정이 드러났다. 비록 살짝 내비친 정도에 불과할지라도.
“별일이네요.”
루시퍼는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소식은 간간이 듣고 있습니다. 남 대륙 일은 꽤 잘 돼 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얼마 전 오딘 클랜의 주도로 아르코느 오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라그나로크로 가는 길을 개척했다고….”
“그랬지. 손을 좀 썼어.”
“한데.”
“하지만, 느려.”
사탄은 딱 잘라 말했다. 루시퍼는 머리를 갸웃하고는 부드러운 손길로 턱을 쓰다듬었다. 과연 어떤 의미로 느리다는 말을 한 걸까? 루시퍼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하면 저한테 강요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현재 북 대륙에 손을 대는 대 악마는 저 혼자로 알고 있거든요.”
“손을 대는 게 아니라, 붙잡고 있는 건 아닌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플루톤의 소멸을 말미암아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그러자 루시퍼는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적막한 공간에 끅끅거리는 웃음이 울리고, 사탄의 시뻘건 동공은 뱀처럼 가늘어졌다.
잠시 후, 간신히 웃음을 그친 루시퍼가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참, 딜레마네요. 선택은 두 가지인데, 어느 걸 선택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니.”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악화할 필요는 없지 않나?”
“제 실패를 확신하시는 겁니까?”
“너는 성공을 확신하는가?”
되돌아온 물음에 루시퍼는 느긋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 그건 아니에요. 플루톤이 소멸한 마당에 확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꼴불견이겠죠. 저는 그냥….”
“그냥?”
“…우리가 처한 상황이 재미있을 뿐입니다. 하하.”
“…….”
잠깐의 침묵 후 돌아온 회답. 사탄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틀렸다. 방금 말한 대로 루시퍼는 현 상황을 재미있어하고 있다. 무언가 의미심장한 뜻이 깃든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루시퍼의 이명은 ‘타락 천사’. 스스로 타락한 이유를 물어봤을 때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아스타로트의 말마따나 성격은 어찌나 외곬인지, 한 번 결심한 일은 정말 어지간해서는 바꾸지 않는다. 언뜻 보면 예의 바르고 유해 보일지 몰라도, 7명의 대 악마 중 가장 종잡을 수 없는 악마가 바로 루시퍼였다.
생각을 정리한 사탄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루시퍼는 의외라는 듯 뜻밖의 기색을 비쳤다.
“어라? 벌써 가시는 겁니까?”
“더 이야기해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이런, 심기가 상하신 모양이군요.”
“…별로.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짧게 작별을 고한 사탄은 서서히 몸을 돌렸다.
이윽고 천천히 공간을 벗어나는 사탄의 등을 루시퍼는 하염없는 눈으로 응시했다.
사탄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
머리를 젖힌 순간,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그림자가 시야를 스쳤다.
“저건….”
그림자가 아니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새와 비슷했으나, 절대로 참새 따위로는 볼 수 없다.
가로 길이는 약 5 미터쯤 돼 보일까? 몸무게는 못해도 수백 킬로그램은 나갈 것 같다. 등에는 박쥐의 날개와 비슷한 모양의 날개가 쭉 뻗어 있고, 푸르게 빛나는 몸통은 만화에서 나오는 드레이크와 흡사하다. 그냥 괴조라는 말이 적당하지 않으려나.
아무튼,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말 어지간히 경계심이 없지 않고서야 괴물은 도시로 접근하지 않는다. 아니, 집단 습격이면 또 모를까? 그러나 허공에 나타난 괴조는 단 한 마리였다.
그렇게 무수한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동안, 괴조는 하늘을 부드러이 선회하며 캐슬 가까이 다가온다. 공격하려는 건가?
“용족…. 어?”
용족화를 사용하려는 찰나, 나도 모르게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쨍쨍한 햇살을 가르며 빙그르르 도는 괴조의 등에서, 무언가 익숙한 형상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곧바로 안력을 높이니 그 형상이 더욱 자세히 들어왔고,
“수현아~!”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형을 보며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
“후유. 이제 좀 살겠네.”
“형?”
“아, 잠깐 잠깐. 우선 좀 앉자. …아이고, 이제 좀 살겠다.”
“…….”
소파에 풀썩 앉는 형을 보니 절로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죽는 줄 알았네. 어때, 시간에 맞춰서 돌아왔지?”
그동안 고생깨나 하고 다녔는지 형의 몰골은 영 말이 아니었다. 허나 그것보다는 현 상황이 중요하다.
테라스 밖으로 나가 쳐다보자, 날개를 접은 채 정원에 얌전히 앉아 있는 괴조가 보였다. 클랜원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잔뜩 경계하는 중이고, 정문 밖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인파가 웅성웅성 모여 있다. 그리고 아기 페가수스는 용감무쌍하게 덤비며 괴조의 긴 꼬리를 물어뜯고…. 아니 너는 또 왜 그러고 있는 건데. 무섭지도 않나 봐.
그 순간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기 페가수스를 지켜보던 괴조는, 느닷없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 음, 그대가 그 인간이 말한 동생이라는 사람인가.
…어? 화정이 말한 건가? 아니, 이건 화정의 고운 음성이 아닌데?
– 고, 곱다니. 내 목소리가 그렇게 좋아? 헤헤….
– 흠. 듣던 것보다는 별로인 것 같은데.
화정이 부끄러워하는 음성에 이어, 이상한 목소리가 또 한 번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그제야 이 거칠거칠한 음성이 저 괴조의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괴조는 아주 정확하게 나를 직시하고 있었으니까. …잠깐만. 강철 산맥에 영물이 있었던가?
– 인간.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그 인간한테서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멋지고, 잘생기고, 아름답고…. 여하튼 최고의 동생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기대 이하였을 뿐이니까.
“?”
–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하도록 하지.
“뭐, 뭐라고?”
무언가 굉장히 창피한 말을 들었는데, 머리가 혼미해지는 기분이다. 어질어질한 이마를 붙잡고 몸을 돌리니 빙긋 웃는 형이 보였다. 나는 곧장 득달같이 달려갔다.
“그런데 수현아. 너 분위기 꽤 변한 것….”
“설명해.”
탕,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묻자 형이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곧 여유를 되찾고는 숨을 길게 흘렸다.
“아…. 그냥 별것은 아니야.”
“별것이 아닌데 저런 괴조를 타고 와? 아니, 도대체 어떻게 타고 온 거야? 괴물이잖아?”
“수현아, 설명해줄 테니까 너도 앉지 않을래? 정신 사납다.”
“윽….”
순순히 자리에 앉자 형은 흘끗 바깥을 쳐다보고는 소파에 묻었던 등을 들었다.
“좋아. 우선 저 괴조는 확실히 괴물이지만, 지성을 갖고 있어. 즉 인간과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는 소리지. 이건 너도 알고 있지?”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아예 말하는 괴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아니고, 조금 전 겪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대단한 건 없어. 그냥 강철 산맥으로 들어가서 저 괴물을 찾고, 이야기하고, 결과적으로 서로 협력 관계를 맺었을 뿐이야.”
형은 매우 간단하게 요약해서 설명했다. 허나 이 정도로 의문이 풀릴 리가 만무하다.
“강철 산맥으로 들어가서 찾았다고? 그럼 일부러 그런 거야?”
“응. 저 괴조와는 강철 산맥 공략 때 약간의 인연을 맺었거든. 너도 알고 있을걸? 거인들을 공략할 때…. 말이다.”
거인이라는 말을 꺼낼 때 형의 낯빛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러고 보니 제 3 지역 공략 당시, 웬 괴조 무리가 거인들의 후면을 공략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
“그럼 강철 산맥에서 꼭 하고 싶다는 일이 이거였어?”
“그래, 맞아.”
그렇다는 듯 형은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까 서렸던 어두운 기색이 돌연 서서히 사라진다. 나는 멍하니 형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문득,
‘…미안하다.’
‘내 능력이 부족했다.’
‘북 대륙에서는 무서운 게 없었는데…. 모든 게 생각대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 것 같아. 그게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이었는지. 나는, 총 사령관의 자격이 없어.’
‘…거인 같은 괴물들이 많은가 봐?’
‘종족이라. 그럼 1회 차에서 말이다. 그 종족의 존재가 우리한테 밝혀지고 나서, 다들 어떻게 됐지?’
제 3 지역 공략이 끝나고, 형이 내게 했던 말들이 우수수 뇌리를 스쳤다.
“왜 이런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왜냐고…? 그야 쿠샨, 아니. 아니다.”
무언가 말하려던 형은 불현듯 머리를 흔들었다.
쿠샨이라. 혹시 형은 그때 거인과 모종의 관계를 맺었던 게 아닐까? 그냥 갑자기 스친 생각이었다.
“왜? 너는 별로라고 생각해?”
별로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모르겠다. 그냥 당혹스러울 뿐이다. 세상에 괴물과 협력이라니. 노예라면 몰라도, 이렇게 요상한 관계를 맺은 전례는 1, 2회 차를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니까.
“아니 별로라기보다는…. 그냥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을 뿐이야. 어쨌든 목적은 있을 거 아니야.”
스스로 느껴도, 까닭 없이 버젓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말이었다.
“목적? 그거야 당연히 있지.”
그러나 회답은 당연하다는 듯이 돌아왔다. 흘끗 눈을 올리니 형은 잔잔히 가라앉은 눈으로 테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데?”
“그러고 보니…. 흠. 뭐, 어차피 돌아오면 슬슬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
“수현아.”
나를 부르는 음성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이윽고 형은 테라스 너머를 보던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우리 말이다.”
“응.”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준비?”
내 반문에,
“그래, 준비.”
형은 힘주어 말하고는, 맑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집으로 돌아갈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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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용한 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