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73
00772 최후의 전조는 조금씩 태동하고. =========================================================================
‘왜 했느냐?’ 고 묻는다면 ‘필요에 의해서.’ 라고 말할 수 있다. ‘굳이 할 필요가 있느냐?’ 고 묻는다면 ‘언젠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라고 말할 것이다. 김유현은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김수현의 생각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적어도 ‘강해지는 방법’에 관해서는,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는 매우 명쾌한 해답이 있다. 수련을 하거나 아니면 사용자끼리 힘을 합쳐 캐러밴을 꾸린다. 탐험을 나가 괴물을 사냥하면서 사용자 정보 상승을 꾀한다. 획득한 전리품을 처분하고 더 좋은 무기를 장만한다. 그야말로 명확한 시스템이며 김유현도 딱히 이견을 제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어느 일이든 예외는 있는 법이다. 그리고 김유현은 한 번쯤은 그 예외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괴물이라고 무조건 사냥만 하는 게 아니라, 공존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현재의 시스템을 최대한 해치지 않는 선에서. 왜냐고?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우와, 인간이다.’
‘잘 먹겠습니다! 헤헤.’
물론 쿠샨 토르와의 인연이 아주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는 없다. 허나 ‘괴물도 하나의 생명’이라는 별 어쭙잖은 생각에서 발로한 계획은 절대로 아니었다.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동물이고, 김유현도 똑같은 인간이다. 김수현만 제외하면 누구에게 언제든지 냉혹해질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단, 서로가 상부상조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강철 산맥으로 도로 들어갔고, 그래서 괴조를 찾아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모르겠네…. 아무튼, 알겠어. 형도 무슨 생각이 있겠지.’
그래서 안타까웠다.
형과 여인을 살리고 같이 지구로 돌아가겠다. 김수현의 입장은 이해가 간다. 아니, 이해하는 것을 떠나서 사실 누구도 알 수 없는 차원이다. 예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기는 했으나 세세한 부분까지는 듣지 못했다. 김수현은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김유현은 눈치채고 넘어갔다. 그냥 굉장히 끔찍했으리라 추측할 뿐. 이 잔인하리만치 현실적인 세상에서 정점에 섰다는 건, 헤아릴 수 없는 시련을 이겨냈다는 방증이리라. 당연히 그만큼 상처도 입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가끔 보면, 김수현이 무언가에 꽉 얽매여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1회 차와 연관돼 있는 것 같지만,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사로잡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맹목적으로 목을 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너무 변했다고 해야 하나. 한 번씩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까닭 없이 안쓰럽다는 기분이 강하게 치밀어 오른다.
물론 김유현이 어떻게 해결해줄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도와줄 수는 있다. 새로운 변화라는 걸 한 번 보여주고 싶었다. 1회 차는 1회 차일 뿐, 현재는 2회 차라는 사실을. 미래는 예정된 게 아닌 개척해나가는 거라는 사실을. 다가오는 미래를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훗.”
김유현은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옆으로는 괴조 우두머리가 터벅터벅 걷고 있다. 꽤 많은 사용자가 모였으나 자동으로 길을 터주는 탓에 걸음에 거리낌은 없다.
이미 괴조 우두머리와 이야기는 끝냈다. 인간은 강철 산맥 내 괴조가 살아갈 터전을 보호해줄 것이고, 괴조는 강철 산맥의 안정화를 돕는다. 이게 끝이 아니다. 나아가 개인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경우도 나올 수 있고, 더 나아가 새로운 이동 수단이 생길 수도 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서로 맹약을 맺고 약속이 지켜진다면, 충분히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아무튼, 이렇게 계획을 시작한 이상 허투루 처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긴 생각을 정리한 김유현은 살그머니 왼손을 폈다. 손바닥에는 따스한 온기가 서린 남빛 구슬이 놓여 있다. 실은 구슬이 아니라 영약이다. 복용 시 마력을 2 포인트 올려주는 영약. 방문을 마치고 가는 길에 김수현이 억지로 쥐여주었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침을 질질 흘릴만한 영약이나 김유현은 원래 받지 않으려고 했다. 동생이 고생해서 얻은 성과인데, 그걸 냉큼 받아먹는 파렴치한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는 이미 하나 먹었다는 김수현의 설득과 이 영약은 한 사람이 두 개 이상 먹을 수 없다는 말, 그리고 ‘흐, 흥! 시, 싫으면 말던가!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한테 주면 그만이니까!’ 라는 새침한 모습에 밀려, 결국에는 억지로 받아들이고 말았다.(사실 김수현은 전혀 새침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냥 김유현의 기억 형태가 심히 왜곡돼 있을 뿐.)
‘그리고….’
받은 건 영약뿐만이 아니다. 오른손에는 큼직한 구슬이 또 하나 쥐어져 있었다. 기록용 구슬이었다. 김유현이 방문을 마치고 돌아갈 즈음, 웬 상냥한 인상의 여인이 ‘아주버님~. 잠시만요~.’ 살갑게 굴면서 건네줬다. 꼭 마음에 드실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도대체 뭐길래 그러지?’
햇빛을 반사하는 기록용 구슬이 어서 자신을 보라는 듯 반짝거리는 빛을 흘렸다. 도통 모르겠으나 어쨌든 내용을 확인해보면 될 일. 김유현은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조심스레 마력을 흘려 넣었다.
*
내(內) 도시 발전은 상당한 속도로 진척돼, 어느새 구 대륙에서 신 대륙으로 이전 작업을 마치는 건 물론, 이미 새로운 건물이 속속히 세워지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도시에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이번에 새로 신설된 시작의 여관이 푸른 장막에 휩싸였다.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강철 산맥 공략 이후 비로소 첫 예비 사용자들이 들어온 것이다. 그에 따라 아틀란타의 사용자 아카데미도 첫 번째 개방을 눈앞에 두게 됐으며, 북 대륙도 자연스레 시끌시끌하게 변했다. 예비 사용자가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화젯거리이거니와, 한편으로는 전력을 보충할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2,000명을 웃도는 인원이 들어온다니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허나 그와는 별개로, 들어오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에 몰두하는 사용자도 있었다.
“더 세게, 더 빠르게! 기껏 강화까지 걸고 들어오면서, 왜 뒤를 생각하는 거지?”
“하아아앗!”
“이렇게 일직선으로 들어오면 누가 못 피해? 네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풋워크(FootWork)는 어디로 갔니?”
“하악, 하악!”
늦은 저녁, 캐슬 정원의 한구석에는 두 여인의 고함으로 시끄러웠다. 우선 수로 왼쪽으로는 오늘 점심쯤만 해도 가지런히 정리돼 있던 수풀이 엉망진창으로 밟혀 있었다. 그렇게 짓밟힌 수풀 가운데에는 얼음 빛이 흐르는 갑옷을 걸친 여인이 오연히 서 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인은, 온몸에서 황금빛을 흘리며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얼음 여인의 주변을 둥글게 질주하는 중이었다.
“아아아아아아!”
쥐어짜는 듯한 기합이 힘차게 터졌다. 그러자 한순간 금빛 기운이 역류하는가 싶더니 이유정의 신형이 총알처럼 폭발적으로 쏘아졌다. 이번에는 일직선이 아니었다. 왼발과 오른발을 불규칙하게 놀리자 샛노란 잔상이 지그재그를 그리며 이어졌다.
그러나 지켜보는 남다은의 눈동자는 차갑기만 했다. 당황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여전히 가만히 서 있는 자세로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자세를 한껏 낮추고 달려드는 이유정을 발견한 즉시 손을 놀렸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삭!
강력한 마력을 품은 손날이 이유정의 진로를 가볍게 훑었다.
“푸헉!”
이어지는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거세게 돌격하던 이유정이 남다은을 눈앞에 두고 갑작스럽게 고꾸라진 것이다. 어떻게든 자세를 잡으려는 듯 몸을 크게 비틀어보았지만, 결국에는 관성의 힘을 이기지 못해 넘어지는 자세 그대로 정원을 힘차게 구른다.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어느새 목덜미에 겨누어진 싸늘한 칼날을 느꼈기 때문이다. 살며시 고개를 돌리니 냉기를 풀풀 날리는 얼음 칼이 언뜻 보였다.
“…속도는 꽤 빨라진 것 같은데.”
남다은은 흙이 덕지덕지 묻은 이유정의 얼굴을 칼등으로 툭툭 털어주며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칭찬에 입을 헤 벌리는 맹한 표정을 보고는 냉정히 말을 잇는다.
“하지만 조절 능력은 여전히 수준 이하야. 내가 저번에 했던 말 기억해?”
“네? 네, 네! 저는 하승윤이 아니니까….”
“그래. 걔도 용병이지만 너와는 확연히 스타일이 달라. 또 어느 정도 완성된 부분도 있고. 아무튼, 그리고?”
“그리고…. 그…. 아! 강화에 집착하기보다는, 우선 힘을 배분하는데 신경을 쏟으라고 하셨어요.”
“그랬지. 한데 알고 있으면서 그래? 방금도 간신히 방향만 트는 게 고작이잖아?”
“…죄송합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항상 자신을 최고라고 여기던 이유정이 순순히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것도 김수현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남다은이 긴 숨을 흘리며 검을 거두자 이유정은 얼른 몸을 일으켜 자세를 잡았다. 몇 시간이나 쉴 틈 없이 뛰어다녔는지, 땀에 젖은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잘록한 굴곡을 드러내고 있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뜨거워진 몸을 식혀준다.
“아니.”
그때 남다은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느릿하게 자세를 낮추던 이유정은 눈을 의아히 치떴다.
“들었어. E 등급으로 상승했다며?”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듣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남다은의 말대로였다. 이유정은 근래 극한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연달아 임무를 맡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맡은 임무가 끝나는 즉시 돌아와 새 임무를 물색한다. 거기다 일을 가리지도 않으니 심할 때는 하루에 세 개까지 맡아본 적도 있었다. 당장 내일도 새벽 일찍 나가야 하는 처지였다.
“일 욕심도 좋지만, 제 몸 챙길 줄도 알아야지. 최소한 잠은 충분히 자는 게 좋을 거야.”
“아, 네.”
“그러니 오늘은 그만. 이제 돌아가.”
“감사합니다!”
음성은 차가웠으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유정은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곧장 단검을 거두고는 남다은이 턱을 까닥이는 걸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이내 서서히 멀어지는 이유정을 보며 남다은도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그때였다.
“!”
그것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거리를 줄여왔다. 소리는 물론, 언제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아까 이유정의 움직임과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완벽한 기습. 그리하여 허무하게 접근을 허용한 남다은은, 허리가 휙 뒤로 젖혀져 강제로 하늘을 보고 말았다. 흡사 탱고를 추는 여인 같은 자세였다.
“감히…!”
어느 무뢰한이 이런 짓거리를 저지른 걸까. 남다은은 단단히 혼쭐을 내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자신의 등을 받친 채 지그시 내려다보는 사내와 눈이 마주친 순간, 한껏 치뜬 두 눈에 놀라움이 깃들며 자동적으로 내리떠진다. 이어서 낯에 어린 북풍한설이 살살 녹아 내리며 차가움이 해제 당한다. 과연 누가, 어떤 마법을 부렸길래 이 여인의 얼굴에 따뜻한 봄바람을 자아내는 걸까?
“고생이 많네.”
“노, 놀랐잖아요.”
낮은 음성이 들려오니 낯을 붉히며 살며시 시선을 회피했다. 그런 남다은을 김수현은 귀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유정이랑은 계속 대련해주는 거야?”
“원래는 한두 번 두들겨 패주려고 한 건데…. 예상외로 가르칠 맛이 나네요. 그냥 적당히 두들겨주고 단점을 알려주는 정도지만요.”
“그것만 해도 어디야. 무려 검후의 가르침인데. 앞으로도 잘 좀 부탁해.”
“아, 알겠으니까 우선 이것 좀 놔주실…. 읍?”
살그머니 빠져 나오려던 남다은은 한순간 입을 닫았다. 김수현이 번개같이 손을 놀려 무언가를 입안에 쏙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남다은은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 들어온 무언가를 꿀꺽 삼켰다. 이어서 눈앞에 출력되는 두 개의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크게 놀라며 털썩 주저앉았다.
“내, 내구 능력치 상승…?”
“응. 항상 내구가 약점이라고 고민했잖아? 그래서….”
말끝을 흐리며 씩 웃는 김수현.
한편, 같은 시각.
“…헐.”
한껏 숨을 죽인 채 둘을 지켜보던 이유정이 작은 탄성을 흘렸다. 의도적으로 훔쳐보는 건 아니었다. 그냥 땀도 많이 흘렸고, 잠자기 전 목욕이나 하려 했을 뿐. 그러다 문득 남다은에 생각이 미쳤고, 친하게 지낼 겸 같이 목욕하러 갈 생각은 없느냐고 물어볼 생각으로 돌아왔는데, 뜻밖의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는 않는다. 애초 훔쳐 듣고 싶은 생각도 없다…. 가 아니라, 실은 굉장히 듣고 싶었다. 이유정은 콩닥거리는 심장을 추스르며 청력을 높였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아, 맛이 별로야? 하하.”
“아, 아니요…. 마, 맛이 문제가 아니라…. 너, 너무 갑자기….”
“그래도 삼켰지?”
“네, 네…. 저도 모르게 삼켰는데….”
“잘했어.”
“아, 아이…. 몰라….”
그 순간 이유정은 어머를 연발하며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굉장히 흡족해하는 김수현의 음성과, 어쩔 줄 몰라 하는 남다은의 음성. 아까 차갑기 짝이 없던 고함에 비해 맥이 탁 풀려 있는 목소리가 괜스레 야릇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여하튼 먼빛에 보이는 둘의 형상은 충분히 심상치 않다. 힘없이 주저앉은 남다은의 고개가 김수현의 중요한 부분을 앞두고 있다. 그것도 무척 가까이서 말이다. 거기다 김수현은 미미하게 웃는 얼굴로 남다은의 정수리를 부드러이 쓰다듬고 있다. 남다은의 등이 보이는 측면에서 보면, 충분히 오해하고도 남을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세상에…. 야외 펠라티오라니…. 쩐다….’
입을 뻐끔뻐끔 벌리던 이유정은 이윽고 조용히, 매우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안간힘을 다해 발소리를 죽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걸릴까 봐 무섭기도 했지만, 둘의 행복한 시간을 더 이상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게 크나큰 오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이유정은 천천히 자리를 떴다.
속으로 ‘B 등급, B 등급.’ 을 되뇌며.
============================ 작품 후기 ============================
(조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