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78
00777 새로운 출격(出擊). =========================================================================
“허, 여기는….”
두어 걸음 아래로 내려가자 형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발바닥에 평평한 지면이 느껴지는 동시에 약 20평 정도 돼 보이는 네모난 공간이 나타났다.
사방에 빛이 들어올 곳이 없는 터라 공간은 어두웠다. 안력을 높이니 시야가 한층 또렷해졌다. 들어가는 입구를 제외하면 벽면에 하나씩 총 세 개의 책장이 비치돼 있었고, 가운데는 낡은 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형은 주변을 정신 없이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여기가 바로 비밀 도서관?”
“그래.”
“흐음, 생각보다는 좀 작네. 그냥 오래된 서재를 보는 느낌이야.”
“애초 도서관인데. 뭘 상상한 거야.”
“하긴. 그나저나 이런 곳이 숨어 있을 줄은 전혀 몰랐거든.”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싱겁게 웃은 후 왼쪽 벽면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이렇게 비밀 도서관을 찾은 이유는 둘. 이번 원정에 필요한 기록을 찾으러 오기도 했지만, 형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였다. 어쨌든 각성 시크릿 클래스는 잘 받아먹었으니 가브리엘과의 약속을 이행해야지 않겠는가.
그래도 우선은 기록부터. 어디 보자. 신녀곡(神女谷)에 관한 기록이 어디 있더라?
“그러니까 여기 있는 기록이 아틀란타의 성과가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지표라고?”
“그렇지. 그냥 헛소리만 찍찍 적힌 뜬구름 잡는 내용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작성한 고증된 기록이니까.”
듬성듬성 비치된 기록을 뒤지며 대충 대꾸하자 형은 연신 감탄성을 흘리며 주변을 기웃거렸다.
“그래서 이 기록을 공개적으로 개방해달라는 거야? 북 대륙 사용자들한테?”
“응. 하지만 전부는 안 돼. 가운데 책장은 남겨놔.”
“가운데? 왜?”
“그건 형, 나, 이스탄텔 로우 로드 거야. 나눠주기는 하겠지만, 우리가 먹을 건 있어야지.”
그러자 “훗.” 웃은 형은, 돌연 내 어깨를 턱턱 가볍게 두드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기특해 하는 느낌이다. 괜스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기록을 찾는데 더욱 열중하기로 했다. 허나 형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우리 수현이, 많이 성장했구나.”
초연한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으악, 갑자기 오글거려.
“그래, 그렇지. 아주 좋은 계획이야. 실은 나도 우리만 깡그리 독식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나누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 그래?”
“응. 그런데 먼저 이렇게 얘기를 해주니까 고맙네. 왠지 네가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으, 응.”
그만해, 제발. 팔뚝으로 쭈뼛쭈뼛 소름이 돋잖아.
속으로 ‘그냥 협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나누는 거야.’ 라고 밝힐까 말까 한창 고민할 즈음, 문득 손으로 얇은 기록 더미가 잡혔다. 절반쯤 꺼내고 해석하니 ‘신녀곡’ 그리고 ‘무희’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찾았다.
“그래도 괜히 미안해지네. 괴조 문제 처리하는 것도 바쁠 텐데….”
“아니, 전혀. 그건 잘 돼 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이것도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
잔뜩 묻은 먼지를 털 겸 손을 탈탈 흔들자 형은 씩 웃어 보였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였다.
“생각해둔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방법이야 많지.”
“예를 들어 어떤?”
“아니 아니. 공개하기로 결정한 이상, 방법은 문제가 되지 않아. 중요한 건 이 기록만 있으면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안 그래?”
형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냥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야. 적당한 상황만 만들면 되니까. 아무튼, 기대해도 좋아.”
하등 옳은 말이라 저절로 머리가 끄덕여졌다. 애초 귀찮은 일을 부탁하는 입장이니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도 아니고, 또 형의 수완은 알고 있으니까. 뭘 기대해도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기록도 찾았으니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아 참, 수현아.”
그때 형이 나를 불러 세웠다. 형은 나를 쳐다보지 않고 책장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행동이 상당히 어색하다. 으음, 그러니까…. 굉장히 중요한 거래를 앞두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 있잖아. 너희 클랜원 중에 임한나 씨라고 있지 않나?”
“아, 한나?”
“아아. 맞아. 그 사람 좀 괜찮더구나. 갈 때마다 아주버님, 아주버님 하면서 아주 살갑게 구는 게…. 참 좋은 여인 같아.”
“뭐, 상냥하고 사려 깊으니까. 그런데 한나는 왜?”
형의 걸음이 미묘하게 빨라졌다. 오른쪽 벽면 책장을 왕복하더니 탁자 한 귀퉁이를 짚고 어설프게 주변을 돌아본다. 이해가 안 가는데. 왜 난데없이 임한나 칭찬을 하는 거지? 설마 관심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다. 왜냐면 내가 있는 이상 형은….
“아, 그게 말이다.”
툭.
데구루루….
형이 입을 열은 찰나, 문득 소매에서 둥글둥글한 것이 툭 떨어졌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구슬은 은은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저건…. 기록용 구슬이잖아?
“어헉.”
형은 크게 기함하더니 허둥지둥 구슬을 도로 주웠다. 평소의 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그건 뭔데?”
“아, 아무것도 아니다.”
형은 활짝 미소 짓고는 황급히 계단을 밟았다. 후다닥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절로 머리가 기울어졌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
어두운 하늘 아래, 남 도시 내 드높이 솟은 머셔너리 캐슬은 부산스러웠다.
아니. 사실은 전혀 분주하지 않았다. 한 도시를 대표하는 클랜인 만큼 여러 사람이 드나들고 있으나, 성 내 거주하는 사용자들은 조용히 침묵하며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흡사 폭풍전야처럼 고요하지만, 곧바로 무언가가 들이닥칠 것만 같은 느낌.
기실 머셔너리 클랜이 이렇게 된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김수현이 비밀 도서관 내 기록 개방 건을 위탁한 후, 곧장 캐슬로 돌아와 새로운 원정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물론 원정 자체가 놀랍다고 보기는 어렵다. 허나 갑작스럽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계획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클랜원이 의문을 표시했다.
머셔너리 클랜이 완전히 자리 잡은 이후, 김수현은 어지간하면 나서지 않았다. 실은 나설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하루에도 무수한 청원이 들어온다고는 하나, 머셔너리가 그저 그런 클랜도 아니고, 클랜원 선에서 정리 가능한 일들이 태반이다. 거의 전부라고 봐도 좋을 정도. 여기서 김수현은 방향을 제시해줄 뿐, 세세한 부분까지는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김수현이 직접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반드시 가로맡아야 할 상황이 발생할 경우, 나선다. 가령 원정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용이 잠든 산맥’을 가장 좋은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사건, 상황, 회의, 원정 순으로 과정이 이어진다.
한데 이번에는 사건 발생은커녕, 회의 소집도 거치지 않고 원정 계획이 발표된 것이다. 거의 모든 과정이 생략됐다. 그야말로 뜬금없는 원정이었다.
그러나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김수현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왜냐면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머셔너리 로드는 절대로 목적 없이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껏 진두 지휘한 원정 중,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는 사실을.
궁금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원정을 나간다는 사실 자체는 큰일도 잘못된 일도 아니니까. 실제로 김수현만이 아니라, B 등급 이상 클랜원은 스스로 캐러밴을 조직해 원정 보고를 올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물론 허가 여부는 김수현이 관장한다.)
아무튼, 원정에 관심이 있든 실적 쌓기에 욕심이 있든 관심사는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실력 있는 클랜원들은 이번 원정과 관련해 클랜 로드의 부름이 있기를 원했다.
그건 당일치기 임무를 끝내고 이제 막 식당으로 들어서는 이유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휴, 배고파….”
이유정이 굶주린 배를 쓰다듬으며 주방으로 가려는 찰나,
쾅.
식당 문이 세차게 열리는 동시, 무수한 여인이 우르르 밀려들었다. 몹시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그러나 통일된 복장을 갖춘 무리의 정체는 바로 하녀들이었다.
마침 저녁 시간을 맞이해 옹기종기 식사하던 클랜원들은 의아한 눈빛을 빛냈다. 하녀들이 저렇게 한꺼번에 일사불란이 움직이는 건 드문 현상이었다.
식당을 유심히 둘러보던 하녀 중 한 명은, 곧 총총히 탁자 사이를 가로질렀다. 걸음을 멈춘 곳은 남다은이 앉아 있는 탁자였다. 하녀는 꾸벅 고개를 숙인 후, 품에서 기록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막 숟갈을 든 남다은이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이건 뭔가요?”
“클랜 로드 님이 전하라셨습니다.”
흠칫, 찡그려진 이맛살이 순식간에 회복됐다.
“…클랜 로드가요?”
“네. 그리고 꼭 오늘 밤까지는 답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숟갈을 놓은 남다은은 얼른 전령을 받았다.
기록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읽어 내려가는 눈동자가 살며시 가늘어지고 낯빛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남다은을 살피던 클랜원들은 살금살금 모여들었다.
“검후 님. 갑자기 전령이라니요. 무슨 내용입니까?”
“원정 관련 내용이에요.”
“예? 원정이라면…. 아, 혹시 저번에 발표하신….”
“그래요. 그나저나 삼 개월짜리 원정이네요.”
웅성웅성.
“사, 삼 개월이라고요?”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식당은 삽시간에 시끄럽게 변했다. 그러는 동안 하녀들은 평소 전담하는, 혹은 전령을 전할 사용자를 찾아 속속히 기록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하기야 집단으로 조직되는 원정인 만큼 남다은 혼자만 포함될 리 없었다.
“행선지는…. 동쪽?”
우정민은 약간 의외라는 듯,
“예상 인원은 11명, 아니면 12명이라고 적혀 있군요.”
차소림은 차분하게,
“어, 나도 나도? 나도 받는 거야? 형님이 저도 부른 거예요?”
진수현은 호들갑을 떨며,
“흠, 출발 시기는 사흘 후라. 삼 개월 원정이면 꽤 빠듯하겠는데.”
허준영은 담담히 전령을 받았다.
“히익? 크, 큰일 났다! 오라버니한테 물어볼 거 있는데!”
헐레벌떡 식당을 뛰쳐나가는 안솔을 보며 이유정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남은 이들의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원정이 발표된 이후 몰래 기대감을 키워왔는데, 선택 받지 못했으니 기대가 꺾인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구성원 선발은 원정을 총괄하는 사용자의 고유한 권한이라, 그냥 아쉬움을 삼킬 뿐.
‘후유, 어쩔 수 없지. 아직은 E 등급인걸.’
속으로 한숨을 흘린 이유정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탁!
그때였다.
“……!”
이유정의 코끝을 날카롭게 스친 무언가가 벽면에 박혀 들었다. 마력을 가득 머금은 얇고 뻣뻣한 기록 한 장이 벽에 박힌 채 파르르 떨고 있다. 크게 놀란 이유정이 고개를 돌리자,
“우리 유정이, 운도 좋네? 나 대신 들어가다니.”
어느새 나타났는지 빙긋 웃고 있는 고연주를 볼 수 있었다.
“네, 네?”
“수현 씨가 잠깐 실수했나 봐. 나는 곧 사용자 아카데미로 들어가잖니. 그래서 정정 사항을 전하러 온 거야. 아무튼, 우선은 읽어보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는 대신, 이유정은 고연주의 손짓에 따라 살그머니 기록을 빼내 읽기 시작했다.
“아…!”
잠시 후, 이유정의 눈동자는 황망한 빛으로 물들었다.
한편, 같은 시각.
4층 집무실 안에는 김수현이 책상 의자에 앉은 채 빙긋 미소 짓고 있다. 책상에는 푸른 구슬이 말간 빛을 흘리며 누군가의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통신용 구슬이었다.
(아, 그러면 되나요?)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흡사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이 깨끗하고 고왔다. 언뜻 보이는 형상은 하얗고 갸름한 턱에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흘러내린,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다. 김수현은 과연 누구랑 통신하고 있는 걸까?
(그럼~. 사흘 후라는 말씀이시죠?)
“예. 꼭 좀 부탁 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김수현의 말을 마지막으로 구슬의 빛이 꺼졌다.
그렇게 통신을 끝낸 김수현은, 숨을 길게 토해내며 테라스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홀 플레인의 지도는 예전에 한 번 작성하다가 말았습니다. 그림판으로 시도했는데, 어느 정도 만들고 보니 동그라미, 세모, 네모의 집합체에 불과하더라고요. 도저히 보여드릴 만한 수준이 되지 않아 삭제했습니다. 현재 새 지도 제작은 예정에 없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사용자 정보는 캐릭터의 주요 무기까지 포함해 새로 준비하는 중입니다. 워낙 인원이 많아 시간이 상당히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완성되면 후기를 통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웬만하면 독자 분들의 눈이 어지럽지 않도록 깔끔하게 작성할 예정입니다. 이 참에 아예 버전을 하나 올려놓고, 차후 갱신될 때마다 계속 업데이트해나가는 것도 괜찮을 듯싶네요. 단 모바일로 보시는 분들의 접근성은 고려하면 어디에 올릴지는 여전히 고민이네요. 우선은 완성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독자 분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