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79
00778 새로운 출격(出擊). =========================================================================
이상 징후가 악령의 짓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한참이나 늦은 상태였다.
누구는 고대 악신의 재림이라 부르고,
또 누구는 누군가가 악령을 소환한 거라고 하나,
그건 전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악령의 해로운 기운이 삽시간에 하늘을 점령,
그 여파가 지상으로 미쳤다는 것이다.
전국(全國)은 악령을 토벌하려고 각각 토벌군을 조직,
이상 징후의 근원으로 파견하였다.
허나.
수십 번에 걸친 토벌 시도는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외려 아예 닿을 수조차 없는, 무익한 피해를 거듭할 뿐이었다.
뒤늦게 실책을 깨달은 왕들은
서로 힘을 모아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 연합군을 결성,
인류 최후의 토벌대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확실히, 최후의 토벌대는 이상 징후의 근원까지는 다다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보인 악령은 무자비하게 토벌대를 습격,
최후의 토벌대는 용감히 저항했으나
끝끝내 패주해 붕괴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인간의 마지막 희망의 끈도 사라졌다.
토지가 메마르고, 세상은 서서히 시들기 시작했다.
찬란하던 태양은 빛을 잃고, 하늘은 어둠에 가렸다.
어둠의 기운을 받은 동물은 인간을 찾아 물어 죽였다.
인간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등을 돌리는 시절이었다.
그리하여.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사치였는지
비로소 뼈저리게 알아차렸을 때.
한 아름답고 성스러운 여인이
천천히 떠나가는 세상에 등장했다.
신녀곡(神女谷)에서 걸어 나온 여인은
스스로 무희라 불렀다.
여인의 고아한 춤사위는 죽은 지상을 되살렸고,
단 한 번 선자(扇子)를 떨침으로써 하늘을 가리는 어둠을 물리쳤다.
흉(凶)과 화(禍)를 물리쳐 길(吉)과 복(福)을 불러왔다.
여인은 등 돌린 세상을 붙잡아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그 어떤 왕국도 이루지 못했던,
따뜻한 희망의 바람을 불러와 잃어버린 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적을 기록은,
오직 홀로 어둠과 맞서 싸운
한 여인을 위한 비망록(備忘錄).
우리는 그 여인을 일컬어 백야(白夜)의 무희(舞姬)라 부른다.
『아틀란타(Atlanta) 남 도시 비밀 도서관 ‘무희 전설’ 中 서장.』
*
“수현, 잠시만요.”
“음.”
한창 기록을 읽던 와중 나른한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나는 순순히 읽는 걸 멈추고 기록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아직 서장까지밖에 읽지 못했으나 나머지는 가면서 읽으면 되니까. 그리고 이 기록은 저번 ‘빅토리아 왕조 실록’처럼 양이 많지도 않고. 집중하면 한두 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양이다.
이윽고 복부까지 차오른 뜨거운 물에 몸을 묻었다. 머리를 젖히니 욕실을 뿌옇게 채운 더운 수증기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잠시 후, 가벼운 헛기침이 들리더니 누군가 물살을 가르고 가까이 온다. 나는 눈을 내려 그 누군가를 바라봤다.
“…….”
사슴처럼 길고 가는 목선과 아담한 어깨의 쇄골이 무척이나 뇌살(惱殺)적이다. 도 넘은(?) 풍만한 젖가슴 아래로 잘록한 곡선이 매끈한 허리를 그린다. 물에 잠겨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건강한 허벅지나 탱탱한 엉덩이가 아른아른 떠오른다.
“이제 거의 끝났어요. 씻기만 하면 되니까.”
이윽고 무언가 주섬주섬 정리하는 소리에 이어 욕조에 차오른 수면(水面)이 살그머니 낮아지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뻗어오는 손이 내 몸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수면이 낮아짐으로 서서히 드러나는 부분을 고연주는 구석구석 깨끗이 닦아주었다. 무척이나 정성스럽고 고운 손길이었다. 결국 더는 참을 수 없어, 나는 마주 손을 뻗어 양 젖무덤을 한 가득 움켰다.
“어허.”
엄한 음성이 들렸으나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젖을 만지작거렸다. 열기를 잔뜩 머금어서 그런지 뜨끈한 살결의 촉감이 손에 착착 감겨 들어온다. 양손으로 쥔 채 좌우 진자 운동을 하다가, 둥글게 원을 그리듯 말아 올렸다가….
그러나 고연주는 눈을 곱게 흘길 뿐, 딱히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이래서 고연주가 좋다니까. 아마 임한나였다면 등짝이 남아나지 않았겠지. 후후.
“어휴, 내가 못 살아.”
고연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들더니 내 머리를 받쳐주며 가슴을 가까이했다. 반사적으로 입을 벌리자 젖꼭지 부근이 자연스레 입안으로 도킹한다. 한껏 입을 오므리니 킥킥거리는 야릇한 비음 섞인 웃음이 이어졌다. 우물우물.
“정말, 애도 아니고. 젖만 물리면 얌전해지네. 왜 이렇게 가슴을 좋아하는 거예요?”
잘근잘근.
“잠깐. 깨물지는 말아줄래요?”
쪽쪽.
하아, 긴 한숨을 흘린 고연주가 옅은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마저 몸을 닦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용자 아카데미는 언제 들어가요?”
젖을 문 채 입을 요리조리 움직여 말하니 고연주가 나를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오늘 밤에 입장이 끝난다네요.”
“그래요? 그럼 꽤 바쁠 것 같은데.”
“큰 상관은 없어요. 총 교관도 아니고. 그리고 이건 수현이 불러서 해주는 거잖아요?”
“으음.”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허나 굳이 고연주를 부른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번 ‘신녀곡’ 원정은 갑작스레 잡혔고, 그 결과 사용자 아카데미에 참가한 클랜원은 선발에서 자동으로 제외됐다. 그리고 고연주는 저번 ‘야만 왕의 무덤’도 그렇고 이번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미리 언질이라도 줬으면 좋았으련만, 겉으로 내색을 안 할 뿐 속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없잖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른 것이다. 약간이라도 달래주고 싶었으니까.
“자, 다 됐네요. 옷도 입혀줄까요?”
“잠깐.”
젖에서 입을 떼며 몸을 일으키려는 고연주를 붙잡고, 왼손으로 옆을 더듬었다. 작고 동글동글한 것이 손에 잡혔다. 바로 입안으로 넣어주자 고연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기는 했지만, 별 반항 없이 받아먹었다. 우두둑, 우두둑. 잘 먹네.
“이건 뭔가요? 별로 맛은 없네요.”
“우선 삼켜봐요.”
“뭔데 그래요. 혹시 발정제?”
“왜 꼭.”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 거냐 핀잔을 주려다가 그냥 입을 닫았다. 배시시 웃는 고연주의 목울대가 가벼운 고저를 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1초 후, 미소는 삽시간에 사라졌다. 아마 지금쯤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고연주의 눈동자에 황망한 감정이 번지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스치듯 옆을 지나쳤다. 문을 열고 나서기 직전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절로 가벼운 미소가 지어진다.
“그, 근력 2 포인트 상승…?”
그래. 놀랐겠지. 현재 고연주는 상당한 고년 차 사용자인 터라, 영약 또는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능력치 상승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능력치도 높아 장비 덕을 보기도 어렵고.
사실 엄밀히 말해서, 고연주가 근력 영약을 먹는 것은 공찬호가 복용하는 것 이상의 효율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비슷하다고 볼 수도 없다. 그냥 암살자 클래스인 만큼, 어쨌든 나쁜 선택은 아니라는 것 정도로 볼 수 있으려나? 그래도 나는 고연주한테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챙겨주고 싶다는 사심이 가득한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이미 안에서 깨끗이 털고 나와 더는 닦을 필요는 없었다. 아마 모두 1층에 모여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서둘러 장비를 걸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도복을 잡았다가 싱겁게 웃으며 손을 놓았다. 일단 속옷 먼저 입고, 우선은 소망의 셔츠부터 입어볼까?
“오호.”
소망의 셔츠를 입으니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욕실에서 바로 나와 추운 기운이 없잖아 있었는데, 셔츠를 입은 순간 곧장 사그라졌다. 딱 적당한 온도가 전신을 흘러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확실히 보물은 보물이다.
아직 끝이 아니다. 라실라스의 축복을 팔목에 장착하고, 치우천왕의 갑옷을 걸치고, 오벨로 기사 부츠를 신는다. 붉은 달의 망토를 어깨에 두른 후 검을 챙겼다. 준비를 끝내고 돌아보니 선웃음이 나온다. 두꺼운 칠흑 빛 장갑(裝甲)에 은은한 붉은빛이 흐르는 망토라니. 어울리는지는 모르겠고, 너무 눈에 띄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수, 수현!”
그때 이제 좀 진정됐는지 고연주가 서둘러 욕실 문을 나왔다. 그러나 나를 보며 또 한 번 멍한 표정을 짓더니 살며시 입을 벌렸다. 말은 기다려도 이어지지 않는다. 고연주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보기 드문 얼굴이다.
“그럼 다녀올게요. 수고해요.”
망연히 쳐다보는 고연주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서 느긋하게 방문을 나섰다. 물론 기록 그리고 빛과 어둠의 결정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확실히 갑옷 그리고 셔츠의 효능은 굉장했다. 정확히는 ‘경량화’와 ‘일체감’ 효과의 합작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갑옷은 정말 오랜만에 입는 거라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조금도 거슬리지 않는다. 흡사 내 몸의 일부라도 된 듯, 행동은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외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울리는 철그렁거리는 쇳소리가 어색할 지경이었다.
1층에는 역시나 무수한 클랜원이 모여 있었다. 선발 인원은 물론, 선발되지 못한 이들까지.
“모두 모였습니까?”
1층 로비를 가로지르며 차분히 주변을 둘러본다.
남다은, 우정민, 이유정, 진수현, 차소림, 허준영, 하승윤. 나를 포함해 근접 계열 8명.
김한별, 근원, 제갈 해솔, 하승우. 마법사 4명.
안솔. 사제 1명.
백한결. 특수 1명.
이로써 총원 14명. 원래는 11명 ~ 12명 사이로 생각했으나 어젯밤 잇따른 참가 요청을 받아 14명으로 늘어났다. 물론 아직 한 명 참가할 사용자가 있지만, 정문에서 만나기로 했고. 그나저나 왜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거지?
머리를 갸웃하는 와중, 아기 페가수스를 안은 채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마르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오른쪽 무릎을 굽혔다. 오늘 내가 원정을 떠나는걸 알고 인사차 응원하러 온 것이다. 기특하기도 해라.
“마르야.”
기껏 불러도 마르의 반응은 고연주와 비슷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계속 쳐다만 보고 있다. 토실한 볼을 콕콕 찔러도 반응은 여전했다. 계속 이대로라면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 나는 얼른 품에서 빛과 어둠의 결정을 꺼내 마르의 앞에 놓았다.
“이건 선물이야.”
“…….”
“이걸 마르한테 맡길게. 어떤 식으로든 사용해도 좋아. 알겠지?”
“…….”
…아니, 선물 줬잖아. 예의상 한 번 쳐다보기라도 해야지. 아니면 혹시 시간이라도 멈춘 건가?
“출발 준비는 끝났나요?”
몸을 일으켜 물었으나 묵묵부답인 건 여전했다. 결국에는 무검을 칼집 채 꺼내 세게 땅을 쳤다.
탕!
“정신들 안 차립니까?”
『‘군주, 호령하여라.’ 가 발동됩니다.』
응?
문득 출력된 메시지 하나. 갑자기 왜 이런 메시지가 떴는지는 모르겠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전원이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으나 어느 정도 정신은 차린 듯 보였으니까.
“예, 예! 끄, 끝났어요. 형님. 이제 출발만 하면 됩니다.”
“그렇군. 그럼, 사용자 제갈 해솔?”
진수현의 황급한 음성에 머리를 끄덕인 후, 나는 눈을 돌리며 최대한 엄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사실 제갈 해솔을 선발하는 데는 약간의 난항이 있었다. 아직 한창 연구 중이다, 얼마 전에도 다녀왔는데 왜 또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느냐는 등 굉장히 싫어했기 때문이다. 허나 최대한 빠르기 도착하기 위해서는 제갈 해솔의 수송 능력이 꼭 필요해 거의 반 강제로 끌고 온 상태였다.
“네, 네?”
“우선 동문에서 용병과 합류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황무지를 벗어나는 즉시 빠르게 이동할 예정이니, 그 즈음에 맞춰서 수송 능력을 준비하세요.”
“네, 네…. 준비하겠습니다….”
“……?”
허나 예상외로 제갈 해솔은 상당히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였다. 자기가 무슨 셔틀이냐는 둥 입을 삐죽거릴 줄 알았는데, 외려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열 손가락 끝을 맞춰 꼼지락 꼼지락 손장난을 하고 있다. 뭘 부끄러워하는 건지. 약간은 허무함이 느껴질 정도로 평소의 모습과 거리가 있는 태도였다.
“그럼 출발하죠.”
그렇게 마지막으로 인원을 확인한 후, 나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캐슬을 나서기 직전 흘끗 올려다본 하늘은,
“…어둡네.”
여전히 어두웠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오늘 몸이 너무 무기력하네요.
비단 집필 활동만이 아니라, 생활 전반적인 측면에서 의욕이 없습니다.
산책이나 체조 등 별 짓거리를 다해도 그때만 잠깐 좋아지고, 곧 되돌아옵니다.
구상은 이미 다 끝내놨는데, 생각대로 글이 안 나오니 정말 환장하겠네요.
예전에도 비슷한 적이 두세 번 있었는데, 이번이 가장 심하게 찾아온 것 같습니다.
슬슬 고비가 오려는 듯합니다. 어떻게든 한 번 견뎌보겠습니다.
여태껏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극복할 수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독자 분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