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81
00780 빙하(氷河)의 설원(雪原). =========================================================================
예상은 빗나갔다.
아니, 절반만 맞았다.
혹은 벗어났다고 해야 하나.
말인즉, 악령은 여인을 노리는 것 외에도 행동을 개시했다.
기적이 일어난 장소를 재 습격해 저주로 물들이고,
권속을 만들어 여인의 접근을 감시했다.
잠깐 되살아날 것 같던 세상은,
멸망을 향해 도로 나아갔다.
악령은 흡사 조롱이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 결과.
모든 상황이 최악의 결말로 치달리기 시작했다.
허나.
인간들은 그냥 무기력하게 보고만 있을 뿐,
딱히 어떤 행동을 취한 건 아니었다.
그냥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외려 예전보다 더욱 활기를 잃은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구원을 맛보지 않았다면 몰랐을까.
여인이 일으킨 기적은 확실히 희망을 선사했지만,
도로 찾아온 절망으로 인해 배의 고통을 삼켜야만 했다.
이미 종말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 인간들은,
멍하니 최후의 날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저항 의지를 잃은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여인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틀란타 남 도시 비밀 도서관 ‘무희 전설’ 中.』
*
어디선가 이 가는 소리가 귓전을 두드렸다. 간신히 눈을 뜨고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킨다. 어렵사리 천막을 둘러보니 이를 가는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리저리 널브러진 침낭 속에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리고 있다. 아마 추워서 이가 떨려 부딪치는 소리겠지.
가벼운 침음을 흘리며 침낭에서 기어 나왔다. 몸이 약간 굳은 느낌은 있지만, 소망의 셔츠 덕분인지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될 정도였다. 속으로 마르 만세라고 외치며 천막을 나서려는 찰나, 나는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간밤에 눈이 내렸는지 얼어붙은 땅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허나 중요한 건, 쌓인 눈 속으로 웬 침낭이 파묻혀 있다는 것이다.
왜 이 침낭 혼자 밖에서 자고 있는지는 둘째치고서 라도, 혹시 얼어 죽은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눈을 걷어내고 발로 톡톡 걷어차 보았지만, 침낭은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끙끙 앓는 신음이 흘러나올 뿐. 이런, 우선 상태부터 확인하는 게 낫겠다.
침낭을 쭉 빼고 안으로 손을 집어넣자 무언가 고슬고슬하면서 차갑고 딱딱한 것이 잡혔다. 차분히 더듬어보니 설 얼은 머리카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깨로 추정되는 것을 잡고 조심스레 끌어내자 비로소 깡 좋은 사용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제갈 해솔?”
제갈 해솔은 반쯤 눈을 뜨고는 안쓰러운 신음을 흘렸다. 낯은 시퍼렇게 질렸고 꽃잎 같은 입술은 파르르 떨고 있다. 문득 이 몹시 가련해 보이는 모습이 제갈 해솔의 신비로운 외모와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가만히 응시했다. 그나저나 죽지 않아서 요행이다만,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한 걸까.
“괜찮아요? 왜 밖에서 잔 겁니까?”
“어…. 제….”
제갈 해솔은 죽기 일보 직전의 사람처럼 끓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두어 번 뺨을 짝짝 때리니 이를 악물며 나를 쏘아본다. 음, 정신은 확실히 차린 모양이다. 제갈 해솔은 입을 좌우로 움직이는 매우 벅차 보이는 행동을 하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어제 클랜 로드가 큰 천막에 모여 자라고 했잖아요….”
확실히 그러기는 했다. 인간의 체온은 하나의 난로와도 같아, 같이 모여 자면 그나마 덜 추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요?”
“저는…. 남이랑 같이 못 자요….”
“…예?”
“잠자리 엄청나게 예민하다고요…. 그리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고작 그런 이유로라고 타박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제갈 해솔의 겉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이에요…? 소리 지를 거예요…!”
“그럼 한 번 움직여 보시죠.”
눈을 동그랗게 뜬 제갈 해솔은 용을 쓰기 시작했으나, 겨우 몸을 꿈틀거리는 데 그칠 뿐이었다.
“거 봐요. 이렇게 추운 산에서 잤는데 몸이 안 얼고 배깁니까? 동상이 안 걸리는 게 이상하죠. 동사하지 않은걸 요행으로 여겨요.”
“그, 그래도….”
“이상한 짓 할 생각 없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요. 오늘도 많이 걸어야 하니까. 그러게 누가 밖에서 자래요?”
“…….”
제갈 해솔은 입을 세게 짓씹었으나 할 말은 없는지 침묵했다. 발을 감싼 천을 조심스레 벗기자 꼿꼿하게 굳은 발가락이 눈에 들어온다. 귀여운 발가락이다.
“아, 안 돼…. 내 다리, 내 다리가….”
흡사 제발 만지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허나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발을 덥석 붙잡은 순간,
“아악…!”
제갈 해솔은 마치 처녀를 잃은 여인처럼 애절한 교성을 흘렸다. 젠장, 왜 강제로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애써 기분을 떨치고 나는 제갈 해솔의 발을 천천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화정의 힘을 일으키며 발에서 종아리로 그리고 허벅지까지 거침없이 유린, 아니 주무른다. 허리, 어깨, 팔까지 주무르자 제갈 해솔은 비로소 뜨거운 비음을 토해냈다. 낯빛이 발그레한 게 아까보다 훨씬 낫다.
“어때요. 많이 괜찮아졌죠?”
제갈 해솔은 분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침낭을 여며 다리를 감쌌다.
“흑. 어떡해. 결국에는 당해버리고 말았어.”
그리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 쇼를 해라. 쇼를 해. 나 참, 살을 만졌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맨 살은 발바닥밖에 만지지 않았는데, 뭐가 이리 불만인지 모르겠다. 어이없는 기분에 연초를 꺼내 물자 제갈 해솔이 힐끔 나를 쳐다봤다.
“반응 좀 해봐요. 민망하니까.”
“어떻게 반응하라는 말입니까.”
“우선은 연초를 깊게 빨아들이면서 최대한 비열한 미소를 지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거죠.”
“……?”
“후, 그렇게 고고한 척하더니 결국 너도 똑같은 암컷이었군. 뭐, 그래도 꽤 괜찮은 육체였다. 앞으로 내가 책임지고 귀여워해 주지. 큭큭!”
“…….”
누구 멋대로 내 성향을 정의하려는 건가.
“사용자 제갈 해솔. 굉장히 걱정돼서 물어보는 건데, 혹시 마조히즘이라도 있는 겁니까?”
“이런, 들켰네요. 네, 사실 피학 성애에 관심이 있기는 해요. 전문 용어로는 펨섭(Femsub)이라고도 하죠.”
제갈 해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야릇한 미소를 지었고, 나는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모아 가볍게 이마를 튕겨주었다.
“아야. 왜 때려요?”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완전히 회복된 것 같네요. 여하튼 적당히 하시고, 수송 준비하세요. 야영지 정리하고 바로 내려갈 거니까.”
핀잔하는 어조로 말하니 제갈 해솔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흥. 셔틀 취급은 그만둬 줄래요?”
나는 더 이상 대꾸 않고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잠이 깼는지 천막에서 한 명 두 명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오고 있다.
“…고마워요.”
그 순간 등 뒤로 들려오는 자그마한 음성.
그래도 고맙다고는 하는군.
*
기상 후, 동료들은 아침은 내려가서 먹자는 말에 전원 찬성했다. 아마 한시라도 빨리 이 산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듯싶다. 그리하여 우리는 제갈 해솔의 수송 능력을 빌어 아래로 이동했고, 적당한 장소에서 차가운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아쉽지만 산 아래서는 그 흔한 나무 한 그루조차도 없어, 우리는 카오스 미믹에 담아온 마른 고기로 식사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한창 건육을 찢어먹는 와중, 진수현이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큰일이네요. 여기서는 나무는커녕 산짐승 한 마리 보이지 않으니…. 걱정 없는 건 식수뿐인가?”
“그러게. 그래도 마른 고기는 꽤 있잖아? 여기까지 오면서 오빠가 계속 외부에서 식량을 조달했으니까.”
이유정이 고기를 쭉 찢으며 중얼거렸다. 가슴이 뜨끔했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것이겠으나, 의외로 날카로웠다. 아마 고연주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확실히 의심했을 것이다. 변명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담담히 식사를 잇기로 가닥을 잡았다. 괜히 반응하기보다는 은근슬쩍 넘어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으니까.
“그런데 여기는 어떤 지역일까요? 추위가 사라지니까 좋기는 한데.”
좋아. 백한결이 화제를 돌려줬다.
“그러게요. 확실히 얼음 바람이 사라지기는 했는데…. 여기는 꼭 눈 사막 같은 데요? 아니, 눈의 나라라고 해야 하나?”
하승윤이 고개를 휙휙 돌리며 말을 받는다. 그 말대로 산 아래는 사방 천지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빛이 흐르는 이 드넓은 설원(雪原)은, 곳곳에 눈의 언덕이 솟은 일종의 구릉 지형이라 볼 수 있다. 언덕의 수는 시야가 탁 트였다 보기 무리가 있을 정도로 많았는데, 크기 또한 천차만별이다. 과장 하나 안 보태서 거의 빌딩 크기로 쌓인 언덕도 여럿 있었고, 덕분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곳도 상당수였다.
이유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신비롭기도 하고, 을씨년스럽기도 하고…. 고요해도 너무 고요해. 그리고 산보다는 훨~씬 낫지만, 추운 건 여전하고. 또 먹을 것도 보이지 않잖아? 여기서 누가 살 수는 있으려나.”
“헤. 그럼 괴물도 없지 않을까요?”
“아마도요?”
“그렇죠? 그렇죠!”
무에 그리 좋은지 하승윤은 물개처럼 손뼉 치며 도를 넘은 반응을 보였고, 이유정은 떨떠름한 눈으로 하승윤을 응시했다.
“글쎄요.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지 않을까요.”
그때 김한별이 서늘한 음성으로 초를 쳤다. 이유정의 오른쪽 눈이 살그머니 치켜 떠졌다.
“그럼 너는 있다는 소리야?”
“모르죠. 하지만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왜?”
“인간도 그렇고 동물은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직 전부를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속단하는 건 이르잖아요.”
똑 부러지는 설명에 이유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그럴걸요.”
“그래. 뭐,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나저나 나 물 한별만.”
“네. 잠시…. 뭐라고요?”
김한별은 손을 뻗다가 홱 고개 돌려 이유정을 노려봤다.
“농담, 농담이야. 악의는 없다고 했잖아. 일일이 반응하지 마라니까?”
이유정은 까르르 웃으며 손사래를 쳤으나 아무도 웃지 않았다. 이내 머쓱해 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이유정을 전원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나도 그랬다. 서로 무시하면서 지내는 것 같더니 언제부터 저렇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걸까? 딱히 친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통과의례 시절의 수준까지는 회복한 것 같다.
어떻게 관계를 회복했는지 궁금했지만,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다. 오히려 환영이다.
“항별.”
흐뭇한 기분에 스리슬쩍 끼어들려는 찰나, 김한별이 죽일 듯한 기세로 나를 쏘아본다.
“…아, 아니다.”
나는 어색이 헛기침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냥 입을 닫는 게 좋겠다.
그때였다.
“김수현.”
허준영이 돌연히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불렀다. 평소의 공허한 음성이 아닌, 약간 긴장한 어조였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문득 눈 덮인 땅으로 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진동은 잠깐 느껴졌다가 곧 사라졌다. 마력 감지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다.
스르릉!
칼날이 시원스레 쓸리는 소리에 이어 침묵이 내려앉는다. 우정민이 카타나를 꺼내 들었다. 방금 진동을 나만 느낀 게 아니라는 방증이다.
“가까워지고 있었나요?”
“모르겠습니다. 단, 곧 약해지기는 했지요.”
남다은의 물음에 우정민이 오른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쳐다보는 방향에는 완만한 경사면이 끝없이 이어지는 설판(雪板)이 보였다. 뚝 꺾이는 장소에 선다면 현재 우리가 있는 장소가 바로 노출될 것이다.
조용히 몸을 일으키자 시선이 쏠렸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일어나라 손짓한 후 가까이 있는 두 개의 눈 언덕을 가리켰다. 커다란 언덕 두 개 사이로 몸을 숨길 수 있을 테니까. 간단히 식사한 터라 따로 챙길 건 없었다. 황급히 흔적을 지운 후, 우리는 발소리를 한껏 죽인 채 언덕 사이로 무사히 들어갔다. 그런데 한 명이 보이지 않는다. 하승우.
하승우는 방금 우리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아직도 쭈그려 앉아 있었다.
“하승우…!”
약간 소리 높여 부르니 하승우는 왼손을 들어 올렸다. 이어서 오른쪽 경사면을 쳐다보고는 곧장 몸을 돌려 언덕으로 뛰어왔다.
“뭘 하고 온 거지?”
하승우는 내 말에 답도 않고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 ────. 차단(Shut Out).”
후웅!
가벼운 바람이 언덕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차단 마법?”
“아아. 클랜 로드. 잠시만.”
하승우는 한 번 더 경사면을 쳐다보더니 긴장한 눈빛을 빛냈다. 그리고 나를 잡아 끌어 목소리를 한껏 죽인 채 입을 열었다.
“흔적을 지우고 오느라 조금 늦었다.”
“흔적? 아까 지우지 않았나?”
“하지만 온기는 지우지 않았지. 그래서 주변 온도랑 맞추려 냉기 바람 주문을 외웠는데, 이상하게 마법이 제대로 먹히지가 않더군.”
“…….”
물끄러미 응시하자 하승우는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청력을 높이지 않으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접근 방식이 우리와 비슷하다.”
“무슨 말이야?”
“사냥감에 가까이 갔을 때, 의도적으로 기척을 죽였거든.”
“은폐 목적으로?”
“그것도 있지만, 혼란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해. 어느 방향으로 오는지 알 수 없게 되니까. 여하튼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내 말이 뭘 뜻하는지 알겠나?”
“설마….”
그러자 하승우는 살짝 끄덕이고는 세 번째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접근하는 놈들이, 우리가 저기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오는 거라는 소리다.”
그때였다.
갑자기 경사면의 끝으로, 눈부신 은빛을 반사하는 큼직한 것들이 우수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건….”
============================ 작품 후기 ============================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 분들의 다정한 응원에, 그리고 따끔한 말씀에 힘입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울함도 많이 사라졌고, 약간이나마 활력을 되찾은 기분이네요. 아마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역시 계속 적는 게 정답이었던 것 같아요.
후기로 하소연하는 건 오늘까지만 할게요. 차 회부터는 내용이나 후기나 즐겁게 적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한 저를 믿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아니 상쾌하고 활기찬 아침을 맞이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