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83
00782 군신(軍神)의 전설. =========================================================================
안 된다고 했다.
말리고, 또 말렸다.
확신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뜻을 꺾지 않았다.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며
부디 자신을 막지 말아 달라며
부드러이 고개를 가로젓고 몸을 돌렸다.
악령이 있는 곳으로.
필자는, 아니 나는
절망을 물리치고 세상을 지키려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지는 여인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그 방법밖에는 없는 것일까.
엎드려 좌절하는 나를 두고
불현듯 여인의 걸음이 정지했다.
그리고 고요한 음성으로 말을 흘렸다.
『아틀란타 남 도시 비밀 도서관 ‘무희 전설’ 中.』
*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계속 쫓아오는 놈을 보며 근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가에게 들려가는 와중 용케도 한 번 더 주문을 외웠지만, 결과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성과라고 하면 아주 잠깐 속도를 느려지게 했을 뿐. 그것도 미약한 정도에 불과했지만.
“플레어(Flare) 마법이 별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높은 수준의 마법 저항을 지녔을 거라 추측됩니다.”
“알겠으니까! 우선은 들어가자고!”
진수현은 헉헉거리면서도 근원을 고쳐 안으며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다.
근접 계열이 상대적으로 육체 능력치가 떨어지는 마법사와 사제를 안고 달리는 건 확실히 좋은 생각이었다. 라이칸(Lycan)들은 흡사 미끄러지듯이 설원을 질주하고 있었다. 아마 안고 달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중간에 붙잡혔으리라.
이윽고 선두의 차소림을 시작으로 사용자들은 줄줄이 언덕 사이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멀리서 봤을 때는 겹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가보니 직경 5미터 정도의 공간이 트여 있었다.
침입자들이 언덕 사이로 사라진 걸 본 라이칸들은 나직한 울음을 흘렸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은빛 눈동자와 예리한 빛을 뿌리는 송곳니. 어찌 보면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다 잡았다고 여긴 것이다.
실제로 부채꼴 모양으로 달리던 라이칸들은 서서히 반으로 갈라지는 중이었다. 우익은 언덕 오른쪽 사이로, 좌익은 언덕 왼쪽 사이로 짓쳐 들어가 퇴로를 차단한다. 그리하여 중앙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침입자들을 확인한 후, 주둥이를 쩍 벌리며 좌우에서 한꺼번에 뛰어들었다. 그때였다.
거리가 크게 좁혀지기 직전, 난데없이 반투명한 우윳빛 막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고,
파앙, 파앙!
캐애애애애애애앵!
공기 터지는 소리와 찢어지는 괴성이 겹쳐 울렸다. 힘차게 달려들었던 놈들이 모조리 나가떨어지며 바닥을 구른다. 그러자 뒤에서 달려오던 라이칸들이 주춤, 질주를 멈췄다. 그것은 허연 막이 돌진을 방해해서만은 아니었다.
본능이라고 해야 하나.
웅웅웅웅웅웅웅웅!
웅혼한 공명(共鳴). 한 여인이 들어 올린 양손이 희멀건 빛으로 가득히 물들어 있다. 기운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섭게 회전해 허공을 이지러트렸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공기가 억지로 구겨지는 것 같기도 했고, 서늘한 칼날에 스쳐 베이는 것 같기도 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한 곳으로 힘을 응축한 마력이 놀란 심장처럼 꿈틀 요동쳤다. 흡사 어서 나가고 싶다고 몸부림이라도 치는 것처럼.
이윽고 제갈 해솔이 좌우를 둘러보며 싱긋 미소 짓는다.
“어서 와요.”
크릉?
“낙빙(落氷)은, 처음이죠?”
그 순간이었다.
제갈 해솔이 양손을 힘차게 하늘로 떨치는 동시,
쐐애애애애애애액!
얇게 응축된 바람이 하늘로 쭉 뿜어졌다. 벼락처럼 쏘아진 바람은, 흡사 뱀이 몸을 휘감듯 두 언덕의 봉우리를 썩둑 휩쓸며 스쳐 지나쳤다.
다음 순간,
끄그그긍! 끄그그긍!
거대한 굉음이 울리더니, 양 언덕의 봉우리가 힘찬 눈 연기를 뿜어내며 굳건한 몸통과 비스듬히 어긋났다. 바로 이어, 봉우리는 점차 가속이 붙은 속도로 사선을 타고 내려와 그대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아무도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언덕 내 모든 존재가 그저 하늘을 멍하니 응시한다. 제갈 해솔이 이루어낸 현상은, 인간이고 괴물이고를 떠나 진정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봉우리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 찰나, 비로소 라이칸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졌다. 허나 늦어도 이미 한참이나 늦었다. 굴러 떨어진 두 개의 봉우리는 무리 진 라이칸들을 찍어 누르듯 세차게 덮고 터뜨렸다.
꽈뜨찌찍!
콰앙!
마치 고막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굉음. 사용자들은 낯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 증상이 귓속이 왕왕 울렸다. 이내 간신히 진정됐을 때 사용자들의 눈에 들어온 건, 낙하에 의해 산산이 조각난 얼음 잔해와 곤죽 된 라이칸의 시체, 그리고 핏물과 살점으로 질퍽해진 눈의 대지뿐이었다. 찍소리도 단말마도 들리지 않았다. 사방으로 비산한 핏물이 스며들어 순결이 빛나던 설원이 차츰차츰 빨갛게 변해간다.
낙하의 여파는 당연히 사용자들에게도 미쳤다. 그러나 백한결이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 보호막을 유지한 덕분에 사방팔방 사출된 잔해의 비속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도 제갈 해솔의 계산 내였다.
“너…. 마력 능력치가 얼마나 높은 거지?”
얼마나 놀랐는지 하승우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놓고 말았다.
“글쎄? 그건 실례 아니려나?”
반말에는 반말로. 상큼하게 웃은 제갈 해솔은 느닷없이 거한의 등을 찰싹 쳤다. 멀거니 앞을 바라보던 공찬호가 펄쩍 놀라며 뒤를 돌아본다.
“무, 무슨…?”
“뭐해요? 기껏 상황도 만들어줬건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예요?”
“어, 어?”
“호기잖아요. 저렇게나 혼란해 있는데 어서 들이쳐야죠. 근접 계열들이 나설 때라고요!”
제갈 해솔의 말대로였다. 선두에 있던 놈들은 모조리 깔려 죽었고, 요행으로 살아난 놈들은 잔해의 후폭풍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상태. 허나 후방에 있던 라이칸들은 비교적 건재했다. 크게 혼비백산해 이리저리 날뛰고 있기는 했지만.
공찬호는 생각을 깨끗이 비우기로 했다. 무언가 굉장한 걸 봤는데, 이해하기보다는 그냥 내키는 대로 날뛰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생각을 정리한 공찬호는 우렁찬 기합을 지르며 수라마창을 꼬나 쥐고 돌진한다.
가는 와중 수라마창이 요행이, 그러나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놈의 대가리를 힘차게 후려갈겼다.
캐앵!
퍽, 라이칸의 머리가 수박 깨지듯 가볍게 터지며 핏물이 비산했다.
그 소리에 다른 사용자들도 정신을 차렸다. 숨을 들이켜며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는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모든 것이 제갈 해솔의 말대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적들이 혼란에 빠진 지금이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잠시 후, 남다은을 선두로 한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공찬호와는 반대 방향으로.
난전의 시작이었다.
한편, 같은 시각.
“저건 또 뭐야.”
그 누구보다 빠르게, 그러나 은밀히 경사면을 올라온 김수현은 어이없는 탄성을 질렀다. 시선은 봉우리가 성둥 잘려나간 두 언덕에 꽂혀 있다. 어찌나 깔끔하게 잘렸는지 반질반질한 면이 피겨 스케이트라도 탈 수 있을 듯하다.
“저 정도 두께를 자르다니…. 제갈 해솔의 작품인가?”
번쩍!
그때 새하얀 빛줄기가 서너 개가 내리꽂혀 안 그래도 흰 언덕을 더욱 밝게 물들였다. 김수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오호. 안솔의 천벌이군. 한데 마법 공격은 별 효용이 없을 텐데…. 아, 신성 주문은 좀 다르려나?”
그 누구도 없건만 김수현은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카우우우!
아니, 아무도 없는 게 아니었다. 아래쪽으로 느닷없이 기다란 울음이 들려온다. 아까 들었던 소리와 거의 비슷하지만, 무언가 황급해 하는 기색이 없잖아 있었다.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는 김수현의 입가에 싱거운 미소가 자리 잡는다.
차소림의 예측대로 앞서 모습을 드러낸 라이칸들은 전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부에 불과했다. 경사면 너머 아래에는 무려 선발대의 세 배가 넘은 수가 무리를 짓고 있었다. 12마리가 한 무리씩, 총 52 무리가 사방을 경계하고 있다. 못해도 600마리는 넘으리라.
무엇보다 무리의 중앙에는 여타의 놈들보다 훨씬 큰 거대한 라이칸 한 마리가 있었다. 모두가 서서 돌아다니는 와중, 오직 홀로 앉아 있음에도 덩치가 두 배는 커 보인다. 뜻밖에도 라이칸 왕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김수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외려 ‘설마 없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왕이 있다는 건 물론, 얻을 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카우우우, 카우우우!
비명과도 같은 짧은 울음이 연달아 허공을 흔들었다. 그러자 라이칸 무리 사이로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주변을 서성이며 경계만 하던 놈들이 일제히 언덕이 있는 방향을 쳐다본다. 이어서 라이칸 왕이 거구의 몸을 서서히 일으킨다.
스릉!
그와 동시에 칼날이 시원스레 쓸리는 섬찟한 소리가 울렸다. 김수현이 라이칸들의 움직임에 맞춰 무검을 뽑아 든 것이다.
내심 언덕 전투 상황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김수현은 딱히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저놈들이 제대로 진을 갖추고 사방에서 한꺼번에 덤벼들었을 때가 골이 아프지, 이렇게 각개 격파가 가능한 상황에서는 기우에 불과하다.
물론 현 상황도 맹점이 없는 건 아니다. 제갈 해솔이 세운 작전이 빛을 보려면, 김수현이 라이칸 본대를 완벽히 마크한다는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기실 제갈 해솔이 요청한 건 마크가 아닌 교란이었다. 본대가 있다는 가정 하, 치고 빠지는 게릴라 식으로 주의를 끌어주기 바랐다. 그리고 이걸 성공하려면 무력은 물론, 상황 판단이나 회피에 도가 튼 사용자가 나서야 하는데, 14명 중 김수현이 가장 제격이었다. 만일 본대가 없으면 돌아와 언덕 전투에 가세하고.
허나 본대를 발견한 이상, 김수현은 제갈 해솔의 요청대로 곧이곧대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굳이 귀찮은 짓을 하지 않더라도 본대를 묶을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건 바로, 왕을 공격하는 것. 왕과 선발대의 가치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굳이 저울질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크르르륵…?
또 한 번 짖으려는 찰나, 소리가 갑작스레 뚝 끊겼다. 동시에 막 눈판을 오르려 폼을 잡던 라이칸들이 일거에 동작을 멈췄다. 경사면을 올려다보는 라이칸 왕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김수현이 드디어 모습을 보였다. 무검을 뽑은 것도 모자라, 왼손으로 귀걸이를 꺼내 검으로 변화한 빅토리아의 영광을 쥔다. 김수현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치우천왕의 갑옷에 깃든 능력을 사용했다.
『사용자 김수현의 마력 흐름이 2.5배로 상승합니다!』
활성화된 마력이 둑 터진 강물처럼 흘러나와 전신의 회로를 질주한다. 화정을 얻은 이후, 김수현의 마력 흐름은 두 배로 상승했다. 즉 현재 김수현의 마력이 흐르는 속도는 보통 사용자의 4.5배라는 뜻이다.
이 현상은 단순히 흐르는 속도의 상승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 강한 힘을, 더 빠른 속도로. 흐름을 제대로 제어할 수만 있다면, 김수현을 이길 수 있는 사용자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우우웅!
전신의 마력 회로를 채우는 기세가 몹시나 강렬해 외부로까지 그 힘이 표출된다. 마력을 잔뜩 머금은 검이 울음을 토하고, 김수현의 주변으로 묘한 진동이 덜덜거리며 일기 시작한다. 이 가공할만한 기운을 견디지 못해 공간마저도 반응하는 것이다. 허나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기세는 기하급수적으로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절정에 다다랐을 즈음.
“화정.”
화르르륵!
마침내 김수현이 눈이 번쩍 떠졌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삽시간에 뜨거워져 벌건 불꽃을 튀겼다.
까마득한 고대 시절,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신의 반열에 오른 무의 신 치우천왕(蚩尤天王).
불패의 신화를 이룩한 군신(軍神)의 전설이, 바야흐로 빙하의 설원에서 재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