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85
00784 군신(軍神)의 전설. =========================================================================
땅이 뒤집히고 눈보라가 일어난다. 휘말려 올라간 라이칸들이 마치 폭죽 터지듯 공중에서 폭발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겹겹이 에워싼 포위망이 한 번의 동작으로 깨끗이 소멸했다. 남은 건 후드득 떨어지는 잔해뿐. 김수현이 살점과 선혈로 이루어진 끈적한 빗속을 돌파한다.
처참히 흔들리는 하늘 아래, 간신히 살아남은 라이칸들은 또 한 번 모여들어 김수현을 에워싸려 발악했다. 동시에 약간 뒤쪽으로 웬 커다란 그림자가 비틀대며 몸을 일으킨다. 흘깃 눈을 돌린 공찬호는 그림자를 보고서 겨우 아래 상황을 이해했다. 정확히는 왜 라이칸들이 결사적으로 막으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림자의 정체는 라이칸 왕이었다. 다른 놈들보다 두 배나 큰 몸집을 보면 알 수 있다. 한데 놀랍게도 성한 상태가 아니었다. 전신에 잔뜩 보이는 자상(刺傷)은 둘째치고서 라도, 복부에 주먹만 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척 봐도 온몸이 핏물로 칠갑돼 있는 게 심각한 상처를 입은 게 분명하다. 누가 그랬는지는 불 보듯 뻔하다.
그랬다. 라이칸들은 왕을 지키기 위해, 저 침입자를 왕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항전하는 중이었다.
그 의기는 장하기 그지없으나 아쉽게도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김수현이 포위망이 다시 생성될 때까지 기다려줄 리가 없는 것이다.
마치 잡기 놀이라도 하듯 가볍게 벗어난 김수현은, 발을 한 번 놀려 사선으로 짓쳐 올라간다. 삽시간에 거리를 줄여오는 침입자를 라이칸 왕이 죽일 듯이 노려본다. 그리고 안간힘을 다해 그나마 성한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보이지 않는 검. 그러나 공간을 찌그러트릴 정도의 마력을 품은 검이 휘둘러지고, 햇빛을 반사하는 예리한 발톱이 위에서 아래로 날카롭게 내려온다.
콰앙!
격돌 지점이 세찬 폭음을 뿜었다. 엉터리 같은 일이다. 그냥 검을 베었을 뿐인데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다니. 정확한 정황을 말해보면, 부딪친 순간 무검이 품은 마력을 한꺼번에 해방해 터뜨린 소리였다.
크허어헝!
결과는 곧 나타났다. 찢어지는 울음을 토한 왕이 두어 걸음 물러난다. 혼신의 힘을 짜내 내리친 오른팔은 어깨까지 너덜거린다. 허나 김수현이라는 사용자는 절대로 승기를 놓치는 법이 없다. 한 번 더 박차 오르며 양손의 검을 시간차를 두고 베고 찌른다.
콰앙, 콰앙!
눈 한 번 깜짝하기도 전 연달아 폭음이 터졌다. 이번에는 왼팔이 날아감은 물론, 고통에 벌어진 주둥이가 왈카닥 핏물을 토해냈다. 토혈 속에는 찌꺼기 같은 것이 섞여 있다. 단순한 절삭(切削)을 넘어 내부에도 타격을 받았다는 방증이다. 왕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콰아아앙!
숨 쉴 틈도 없이 폭음이 이어진다. 그 순간 공찬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복부가 쥐어짜듯이 비틀리는 동시, 엄청난 마력이 뿜어져 나와 가리가리 찢어발기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검의 폭풍우가 배는 물론, 허리 전체를 터뜨리며 폭발한다. 그것은 라이칸 왕의 숨통을 끊는 최후의 일격이었다.
쿠웅. 마침내 건장한, 아니 건장했던 육체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네 번째 폭음은 라이칸 왕의 숨통을 끊는 최후의 일격이었다. 걸레짝이 된 시체서 핏물이 꿀렁꿀렁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라이칸 왕이 쓰러지는 걸 기점으로 전투는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김수현이 질척해진 눈밭을 가로질러 왕의 사체를 밟고 오른다. 얼굴은 물론, 갑옷이고 망토고 전신이 피와 살점으로 점철돼 있었지만,
“…흠.”
차분히 돌아보며 살며시 미소 짓는 김수현의 모습은 진정으로 군신(軍神)다웠다.
*
비릿한 피 내음이 코를 푹 찌른다.
아침 식사 때 시작된 전투는 점심이 채 되기도 전에 종결됐다. 수적으로 굉장히 불리한 전투였으나, 왜 그런 말도 있잖은가. 전투는 숫자로 하는 게 아니라 사람으로 하는 거라고. 아마 14명과 1000마리 정도 됐으려나? 정확한 수는 모르지만, 여하튼 대승이라고 봐도 부족함 없는 전투였다. 차소림이 부상당한걸 제외하면 우리측 피해는 전무하니까.
“괜찮습니까? 많이 다쳤어요?”
“아. 크, 클랜 로드.”
가까이 다가가자 차소림이 화들짝 놀랐다. 한창 치료받던 중인지 갑옷은 옆으로 벗어놓고 복부는 훤히 드러나 있다. 얼마나 옷을 올렸는지 봉긋하게 부푼 가슴 아랫부분이 살짝 드러났을 정도.
약간 야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빠끔히 노출된 배꼽은 의외로 귀여웠다. 차소림은 배꼽도 근엄하고 의젓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무튼, 허준영이 언덕으로 올라간 라이칸이 발톱을 뽑아 저격한 거라고 말해줬다. 들어보니 꽤 위험한 상황도 연출됐다고 한다. 그래도 찰나의 순간 우정민이 역으로 저격하는데 성공했고,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고.
“저, 저….”
안절부절못하는 차소림. 자꾸만 눈을 피하더니 살그머니 고개를 숙인다. 이해한다. 일신의 무력이 약한 것도 아니고, 한데 오직 홀로 다쳤으니 부끄러운 마음도 없잖아 있으리라. 특히 차소림 성격이라면 더더욱.
“괜찮습니다. 항상 좋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잖아요?”
어깨를 짚으며 위로조로 말하니 차소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예?”
“조, 좋은 모습이 아닙니까?”
“……?”
차소림은 잠깐 고개 숙여 자신의 배를 쳐다보고는 도로 나를 바라봤다.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허나 낯을 잔뜩 붉히며 간절함이 깃든 눈동자를 보인다.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물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항상 믿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적당히 에둘러 말했다. 그러자 차소림이 안색에 화색이 돌았다.
“가, 감사합니다! 예쁘게 봐주셔서….”
“그래요. 그럼 치료하고 있어요.”
왜 감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두어 번 손뼉 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 30분 안에 정리하도록 합시다. 여러분도 어서 이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겠지요?”
그러자 동료 전원이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사체가 천지에 널려 있는데, 아무도 여기서 계속 있고 싶지는 않을 터. 차소림의 완벽하게 회복하는 즉시 떠나는 게 좋으리라.
하지만 그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눈을 돌려 라이칸 왕의 사체를 찾아낸 후, 나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심히 훼손된 상태이기는 하나 그래도 얻어낼 것은 많다. 따뜻한 털가죽이나 맛 좋은 고기는 부수적인 수입에 불과하다. 반드시 얻어야 하는 건 바로 왕이 체내에 있는 ‘열쇠’.
그럼 오랜만에 도축이나 좀 해볼까?
“응?”
잠시 후, 사체를 앞에 두고 무검을 뽑으려는 찰나였다. 돌연히 어디선가 이상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공찬호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지? 부담스럽게.
“왜? 가죽 좀 벗기고 고기 좀 발라내려고 하는데.”
“…….”
“도와주고 싶어서?”
“…….”
연이어 말을 걸었으나 공찬호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눈을 감더니 조용히 몸을 돌렸다. 서서히 멀어지는 공찬호를 보니 약간은 어이없는 기분이 든다. 저래 놓고 나중에 고기는 잔뜩 먹겠지.
…양이 많으니 상관없으려나.
*
설원으로 들어오자마자 대규모 전투를 치른 우리는, 이후 단 한 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고 행군할 수 있었다. 그것도 무려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이나 말이다.
결국 이 설원은 라이칸 부족이 꽉 잡고 있었다는 뜻인데, 우리와의 전투로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니 한동안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도망친 놈들도 여럿 있을 테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테고.
그렇게 끝없는 설원을 횡단한 우리는 입성한 지 나흘 만에 1차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췄다고 해야 하나. 왜냐면 더는 걸어서 갈 수 없는, 거대한 바다가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먹물 빛이 물든 하늘 아래, 구름 그림자가 드리운 어두운 바다가.
쏴아아아…. 쏴아아아….
철썩…. 철썩….
수면을 가르며 오는 물살이 우리가 서 있는 눈의 대지에 부딪혀 희게 부서진다.
진한 청 빛이 흐르는 차가운 설원 바다는 굉장히 드넓고 광활하다. 곳곳의 서 있는 빙하로 시야가 방해 받기는 하지만, 끝없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바다는, 평평한 수면과 하늘이 맞닿아 경계를 이루는 수평선이 보일 지경이었다.
“오오….”
“와아~.”
백한결과 안솔이 감탄하는 눈으로 바다를 응시한다. 비단 둘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정신 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신기하겠지. 시냇물이나 강은 몇 번 봤어도 바다는 아마 처음 보는 것일 테니까. 물론 홀 플레인에서.
“그러니까 이 바다 어딘가에 그 신녀곡이라는 장소가 있다는 거죠?”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던 김한별이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자 우정민이 머리를 주억였다.
“나도 그렇게 읽었어. 그런데 이상하군. 곡이라는 건 골짜기나 깊은 굴을 뜻하는 말로 알고 있는데…. 산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바다에서 찾으라는 거지?”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상하네요. 하지만 기록에는 분명 바다라고 나오지 않나요?”
도란도란 말을 나누는 김한별과 우정민을, 일부는 경청하고 일부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이상하게 쳐다본다. 이 두 그룹(?)의 차이는 하나. 비밀 도서관에서 가져온 기록을 읽고 안 읽고의 차이. 오면서 기록을 한 번이라도 정독했다면 둘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저기 둥둥 떠 있는 것들이 뭐예요? 혹시 빙하인가요?”
…아무래도 안솔은 ‘관심 없음.’ 이라는 그룹인 모양이다. 반짝반짝 눈을 빛나는 눈으로 나를 꾹꾹 잡아당기며 물어보는 모습이 선웃음만 나온다.
아무튼, 안솔의 말대로였다. 바다는 망망대해였으나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육안으로 쳐다보면 저 멀리 허연 색의 무언가가 수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게 보인다. 비교적 작아 보이는 것들은 둥둥 떠다니나, 커다란 것들은 육중한 몸을 단단히 뿌리박고 서 있다. 그 수는 상당히 많아 흡사 바다에 수림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랬다. 우리는 이제부터 저 바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단, 여기서는 제갈 해솔의 수송 능력을 제한해야 한다.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게 아니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즉 아껴놔야 한다는 소리였다.
수송이 사기성 짙은 편리한 어빌리티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대기 시간이 있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이 대기 시간이라는 것을 잘 계산해야 한다.
신녀곡이 있는 장소는 알고 있다. 내 예상에 따르면, 우리가 여기서부터 출발한 시점부터 목적지에 도달해 일을 처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 대기 시간 내에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수송 어빌리티는 일을 처리한 직후를 위해 남겨놔야 한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때 분명 필요한 상황이 올 테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그건 바로….
“히익!”
그 순간이었다. 마치 어린애처럼 계속 내 망토를 쥐고 있던 안솔이 불현듯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크게 움찔한 기척이 망토를 타고 전해졌다.
“어, 어마?”
이어서 또 한 명의 누군가가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제갈 해솔이 깜짝 놀란 낯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돌연히 발이 꼬여 주저앉는다. 사소한 소란이기는 했지만, 다른 동료들의 시선이 모조리 두 명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안솔과 제갈 해솔은 한동안 멍하니 바다를 응시하다가 불현듯 서로를 쳐다봤다.
“어, 언니도 들었어요?”
“으응. 그럼 너도?”
“마, 맞아요. 뭐, 뭐라고 들으셨는데요?”
“그게….”
무언가를 말하려던 제갈 해솔이 입을 벌린 채 고개 돌렸다. 바다를 바라보는 망연한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오호라….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는 사용자들이라서 그런 걸까?
아무래도 벌써 알아차린 모양이다.
이 바다의 함정을.
============================ 작품 후기 ============================
노우 노우. 아니에요.
저 사내라고, 로유진이라고 인정해주시는 덧글 엄청 많습니다.
거의 대부분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죠.
그러므로 저는 사내라고 인정받았습니다.
이제 로유미도 영원히 안녕이네요.
잘 가 로유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