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88
00787 최후의 기록. =========================================================================
“아!”
하승우의 말이 끝나자 누군가 깜짝 탄성을 터뜨렸다. 안솔이 놀란 얼굴로 하승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저 알아요. 진로 결계.”
“호. 알고 있다고요?”
하승우는 의외라는 어조로 반문했다. 안솔은 정신 없이 고개를 끄덕대며 나를 돌아봤다.(중간에 제갈 해솔이 “왜 쟤한테는 존댓말 해? 나한테는 반말하면서.” 라고 못마땅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에요…. 에, 어디였더라?”
무언가 대단한 것이라도 말하듯 폼을 잡던 안솔은 갑자기 잊어버린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 칠흑의 숲!”
그때 공교롭게도 이유정도 기억해냈는지 소리를 질렀고, 안솔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그래요! 칠흑의 숲이었어요!”
“맞아 맞아! 거기서 한 번 봤었어!”
손을 짝짝 맞부딪치며 좋아하는 두 여인을 하승우는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대단하군요. 결코 쉽게 구경할 수 있는 결계는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어땠나요?”
“응~. 오라버니가 그랬어요. 한 발자국만 잘못 디뎌도 큰일 날 수 있으니 꼭 조심해서 따라오라고요.”
“오호. 그래서요?”
“그래서 집중하고 걷다 보니까 어느새 세상이….”
안솔은 억지로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끙끙 앓았다. 허나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는 듯 하승우는 선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물론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진로 결계도 비슷합니다. 단 한 걸음에 의해 세상이 바뀐다. 잘 아는 사용자가 그러더군요.”
잘 아는 사용자. 결계를 다루는 사용자는 상당히 찾기 어렵다. 그럼 설마 이스탄텔 로우의 정창민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서로 접점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간단하게는 지형을 이용해 착시를 일으키는 것부터, 복잡하게는 아예 공간을 비틀어버리는 무서운 결계죠. 이것 참, 미아가 발생하지 않은 게 천운입니다. 하하.”
하승우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뚝 웃음을 멈추며 나를 돌아봤다.
“그런데 문제네요. 제가 알기로 진로 결계는 굉장히 깨기 어렵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클랜 로드는….”
하승우는 안솔을 흘끗거렸다. 말끝을 흐리기는 했으나 저의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하승우는 이미 진로 결계가 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실히…. 설마 결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우선 밑밥부터 깔아놓고.
이윽고 제 3의 눈을 활성화하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다. 이미 장소는 봐놨다. 신녀곡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이미 많은 시간을 허비한 만큼, 더 꾸물거릴 수는 없다.
나는 아까 이어놓은 얼음 다리로 이동해 중간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일부러 웃었다.
“사용자 하승우의 말이 맞았네요. 바로 이동하죠. 이제부터는 일자 진형으로 가겠습니다.”
세 명이 먼저 움직였다. 우선 하승우가 내 등을 붙잡고 그 뒤로 안솔, 이유정이 차례대로 붙었다. 그러자 남은 열한 명이 멍하니 우리를 쳐다본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진로 결계는 걸음이 중요합니다. 제가 클랜 로드의 걸음을 밟으면 사용자 안솔은 제가 내디딘 부분을 정확히 밟아야 하죠. 이런 식으로 이어서 걸어야 하니 일자 진형을 짜는 게 가장 좋습니다. 특히 발이 큰 사람이 앞에 서는 게 좋으며, 걸음을 내디딜 때는 되도록 발자국을 깊숙이 남겨주시는 게 좋습니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하승우가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하승우는 확실히 유능한 것 같다. 연차 값을 한다고 해야 하나. 전투에서 가끔 보이는 센스도 대단히 노련하고. 하기야 이 정도는 되니 그 정신 나간 집단을 오랫동안 이끌었던 거겠지. 아쉽다. 부랑자 출신만 아니었다면 신재룡 급으로 신임했을 텐데 말이지.
동료들은 어느 정도 이해한 듯 움직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곧 기차 놀이를 하듯 일렬로 늘어섰다. 잠깐 칙칙폭폭 이라도 시켜볼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여기서부터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중요하니까. 그만큼 집중해야 한다는 소리다.
“이제부터는 어떤 이상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시선은 땅으로 고정하겠습니다. 절대로 놀라지 말고, 무조건 걷는 데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낮은 음성으로 경고하니 갑작스레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지만, 낯빛만 봐도 알 수 있다. 긴장감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한 명씩 쭉 훑어본 후, 나는 천천히 오른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조금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왼발을 움직인 찰나였다. 갑자기 이질적인 공기가 느껴졌다. 감각을 차치하면 나쁜 현상은 아니다. 제대로 들어섰다는 방증이니까.
찰박!
“어, 어? 바다를…!”
“조용히!”
누군가 놀라는 소리가 들렸으나 바로 사그라졌다. 아마 제 3의 눈이 없는 사람이 보면 내가 수면을 걷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가기 전, 잠깐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시간이 늦은 터라 무의미한 일이었다. 하늘은 이미 노을 빛과 어둠이 절반씩 섞여 있었으니까.
“후우….”
숨을 길게 흘리고 나서, 나는 느릿한 속도로, 그러나 꾸준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진로 결계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
그저 새하얗던 눈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백을 넘었을 때부터 걸음 수는 더 세지 않았다. 시선을 무조건 아래로 고정한 채 무조건 길을 밟는 데만 집중했다. 진로(進路)를 이루는 주체가 바닷물이라 그런지, 잠깐 눈을 떼고 주변을 볼라치면 길이 급격히 틀어지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처음 느꼈던 이질감이 점차 심해지는 중이었다. 오죽하면 호흡에 지장이 올 정도. 칠흑의 숲에서 깼던 것보다 최소 몇 수는 높은 고난도의 결계였다.
물론 나 혼자라면 더 빨리 갈 수는 있다. 내심 갑갑한 기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13명이나 되는 동료를 생각하면 적당한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나저나 시간은 얼마나 흐른 걸까. 체감상 1, 20분은 지난 것 같은데. 바닥만 보고 걸으려니 여간 갑갑한 게 아니다. 아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상당히 웃기지 않으려나. 14명이나 되는 인원이 전원 고개를 숙인 채 느긋한 기차 놀이를 하고 있으니까.
“……?”
그때였다. 들어오는 내내 곤란 증세를 일으키던 호흡이 불현듯 탁 풀리며 몸이 편해졌다. 크게 숨을 들이켜자 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사방이 한없이 조용하다는 것도. 제 3의 눈으로 보이는 길은 어느새 더 이상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올리자 무언가 거대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클랜 로드? 끝났습니까?”
그때 하승우가 망토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목소리는 애써 곤란함을 참는 듯 미약한 떨림을 품고 있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내가 이질감을 느꼈을 정도니 동료들의 상태는 불 보듯 뻔했다.
“예. 끝난 것 같네요.”
나는 급히 안쪽으로 걸어가 동료들을 이끌었고, 몸을 돌려 인원수를 점검했다. 한 명 한 명 모습을 보일 때마다 참았던 호흡을 토해내듯 숨을 크게 내쉰다. 이윽고 하승윤을 마지막으로, 동료들은 다행히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진로 결계를 통과했다.
“놀랍군요. 진로 결계가 이렇게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결계였습니까?”
숨을 헉헉거리는 하승우가 흘리듯이 물었다. 그만큼 제 3의 눈이 사기적인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알려줄 의리는 없다. 딱히 말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고. 미미하게 웃으니 하승우는 흐음, 숨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 후, 호흡을 고른 동료들은 비로소 주변을 돌아봤고, 하나같이 탄성을 질렀다. 이어서 모두 넋을 잃은 얼굴로 중앙을 바라본다.
“여기는….”
그랬다. 바다 한복판을 탐험하던 우리는, 어느새 거대한 빙하의 눈밭에 서 있었다. 1회 차에서는 직접 참가하지 않고 말로 듣기만 한 터라, 실물로 보는 건 나도 처음이었다.
“…….”
무어라 말로 형언하기에는 상당히 이상한 장소였다. 일단 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빙하가 산등성이처럼 사방을 둥글게 에워쌌고, 그 아래로 부드러운 호선을 타고 내려오면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장소가 있다. 즉 현재 디디고 있는 설판은 분지와 비슷한 형태였다.
이런 건 주변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약 50미터 앞 분지의 중심으로 동굴이 나 있는 거대한 설산 하나가 조용하게 솟아 있다는 것. 당연히 눈으로 이루어지기는 했는데, 새하얀 빛이 아닌 은은한 푸른빛이 흐르는 게 까닭 없이 신비한 느낌을 자아낸다.
“허, 정말 대단한데.”
“정말 믿을 수가 없을 정도에요. 저희 조금 전까지 바다에 있던 거 아니었나요?”
“진짜 다른 세상 같아…. 아, 혹시 저번 원정처럼 이상한 차원으로 들어온 건 아닐까요?”
“그건 아닙니다.”
연달아 들려오는 탄성에 하승우는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 장소는 그저 공간을 비틀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 즉 공간 안의 공간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부연 설명에 안솔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빛을 100% 드러냈다. 하승우는 쓰게 웃었다.
“차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지요. 비록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이렇게 들어오기도 어렵지만요.”
“에?”
“그러니까….”
“에?”
그렇게 하승우가 불가능한 일에 한창 심력을 쏟는 동안, 나는 비로소 관찰을 끝마치고 안도할 수 있었다.
확신할 수는 없으나 잠정적으로 결론이 나왔다. 우선 현재 눈앞에 보이는 건 신녀곡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렇게 깨끗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아직 봉인이 깨지지 않았다는 소리가 아닐까? 그 고대 악신이라는 놈이 깨어났다면 분명 박살이 났을 테니까. 아니면 최소한 자국이라도 남아야 하는데, 그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 흠.
‘화정?’
– …아니, 아니야. 우선은 안으로 들어가 봐. 그리고 제 3의 눈 켜두는 거 잊지 말고.
‘당연하지.’
– …그런데 있잖아. 왠지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
화정의 한숨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나는 얼른 무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마력을 담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원 전투 준비. 방진으로.”
여기저기서 흠칫 놀라는 기척이 느껴졌으나,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신속히 동굴을 향해 걸었다. 급하게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비밀을 숨기고 의심을 피하려는 의도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여기 오기까지 시간을 너무 낭비했다.
물론 언뜻 안전해 보인다고는 해도, 아직 정확한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처리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괜히 여유를 부리다가 1초 차이로 봉인이 풀리고 악신이 깨어나는 상황 따위, 절대로 사양하고 싶었다.
동굴 안의 통로는 지름이 2미터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의외로 좁았다. 허나 걷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길이 점차 넓어지더니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비교적 너른 공간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곳은 마치 작은 방을 연상케 하는 곳으로, 직경 20미터 가량 돼 보이는 네모난 공간이었다. 외부에서 본 설산의 거대한 크기를 생각해보면 역시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면은 눈 벽으로 막혀 있고, 걸어온 통로를 제외하면 정면 방향으로 육중한 얼음 문 하나가 놓여 있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후, 한껏 안력을 높여 들여다보았으나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것이 흐릿했다. 눈을 떼고 뒤를 돌아보자 모두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간간이 어리둥절해 하는 빛이 보였으나 아직 긴장은 버리지 않은 것 같다. 사실상 동굴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전투 상황이라 봐도 무방했다.
나는 집게손가락을 세워 입에 댄 후에 조용히 얼음 문을 가리켰다. 그러자 동료들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며 각자 무기를 세웠다.
신호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잠시 후.
“…진입하겠습니다.”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하는 동시, 나는 힘껏 얼음 문을 밀어젖혔다.
끼긱, 끼기기긱!
문은, 흡사 부서지는 것처럼 얼음 갈리는 소음을 내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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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다가 피곤해서 깜빡 졸았는데, 일어나니 새벽 네 시였습니다. 죄송해요.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