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91
00790 조우(遭遇). =========================================================================
오늘 회에는 잔인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원치 않으시는 독자 분들은 건너뛰시는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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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前兆) 없는 들려온 비명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사그라졌다. 마치 누군가 억지로 틀어막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잘못 들은 것도, 나만 들은 것도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시시덕거리며 물을 짜고 있던 동료들 낯빛이 딱딱히 굳었으니까.
진짜 신녀곡(神女谷)을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들뜨던 분위기가 가라앉고 긴장감이 빈자리를 채운다.
스르릉.
칼날이 시원스레 쓸리는 소음. 긴말은 필요 없다. 방금 들려온 비명으로 상황은 충분히 인지했다.
기척을 최소화해 다리를 건너 얼음 신전으로 다가간다. 동료들도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는 게 느껴졌다. 똑, 똑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가슴을 쿵쿵 노크하는 듯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잠시 후, 다리 끝에 이르렀을 즈음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건….”
좌우 방향으로 높이는 약 2미터, 길이는 약 4미터 정도 돼 보이는 얼음 상(像)이 보인다. 동물을 조각한 것 같은데 익숙한 형상이다. 턱 아래 고드름처럼 흘러내린 갈기 형상을 보니 바로 연상되는 놈이 있었다.
“그 괴물이 아닙니까? 저희가 설원에 들어오자마자 싸웠던….”
차소림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흐렸다. 아직 정확한 명칭이 붙지 않았다 보니 라이칸이 아니라 그 괴물이라고 말한 것 같다. 여하튼 왜 이 얼음 상이 여기 있는지는 모르나 짚이는 바는 있었다. 라이칸 왕을 처리하고 도축하는 과정에서 ‘열쇠’를 획득하지 않았는가.
아니, 잠깐만.
문득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문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무어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다. 잘 맞물려 돌아가던 톱니바퀴가 갑자기 어그러졌다고 해야 하나. 과거와 현재의 간극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휘젓는다.
하지만 나는 전진을 선택했다. 우선은 일의 경중을 따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갈등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다.
정적이 흐른다. 아까 들었던 비명이 환청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조용하다. 감지에 걸리는 것도 없고, 우리를 제외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숨 막힐 듯한 고요함이 외려 불안을 일깨운다.
잠시 후, 다리 너머 십 층으로 나뉜 각진 얼음 계단을 올라 문 앞에 섰다. 신전의 문은 은은한 푸른빛이 흐르는 투명한 얼음 문이었다. 두께가 육중해서 그런지 안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한데 두 가지 특이한 점은, 문이 청량한 향기를 풍긴다는 것과 라이칸 모양이 양각(揚角)돼 있다는 것이다. 문양의 중앙에는 곡선을 그리는, 송곳니처럼 생긴 홈이 움푹 파여 있었다.
물끄러미 문을 응시하던 김한별이 홀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문에서 굉장히 강력한 마력이 느껴지네요.”
“동의합니다. 이 문은 보통 문이 아니에요. 섣불리 손을 댈 수는 없고, 어딘가 해제 장치가 있을 것 같은데요.”
하승우의 음성이 들려온 찰나,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승우의 말이 정답이라서가 아니었다. 아니. 해답에 가까운 추론은 확실히 놀라웠지만, 방금 말을 들은 순간 아까 느꼈던 오묘한 간극이 조금 더 확실하게 와 닿았다.
나는 수면 아래 신녀곡을 우리가 처음 발견한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과거에 읽은 신녀곡의 탐험 기록에서 수중 동굴을 찾으라는 내용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이칸 왕을 잡고 체내에 있는 열쇠를 획득했다는 내용은 있었다. 한데 진로(進路) 결계 안 신녀곡이라 착각했던 장소에서는 열쇠를 사용할 거리가 없었다.
과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클랜 로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의 경중을 따지겠다 해놓고 나도 모르게 삼천포에 빠졌다. 얼른 옆을 돌아보니 제갈 해솔이 카오스 미믹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이거요.”
왼팔을 불쑥 내민다. 손에는 희멀건 빛을 반사하는 송곳니 하나가 잡혀 있다. 일전 라이칸 왕을 도축하다가 얻은 척했지만, 실체는 봉인된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였다.
찾는 수고는 덜었다만, 제갈 해솔은 이건 또 어떻게 알고 꺼낸 걸까?
“문 중심에 패인 홈을 보니까 갑자기 이게 생각나서요. 모양도 크기도 비슷하지 않아요?”
제갈 해솔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부연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나는 간신히 머리를 끄덕일 수 있었다.
“제가 한 번 맞춰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옆으로 걸음을 비켜주자 제갈 해솔이 문 앞으로 섰다. 손에 든 송곳니를 이리저리 돌리는가 싶더니 조심스레 홈으로 꽂아 넣는다.
그 순간이었다.
꽈앙!
땡, 땡, 땡, 땡그랑!
“아악!”
갑작스러운 폭음과 동시, 굳건하던 문이 크게 떨어 울리며 세로금이 쩍 갈라졌다. 그 어떤 예고도 없는 폭격이었다. 제갈 해솔이 떨어지며 등 뒤가 이지러졌다.
“어떻게 된 거야!”
“모, 몰라요! 가, 갑자기 충격이…!”
“그건 어디로 갔어?”
“방금 튕겨서 아래로…!”
삽시간에 소란이 일었다.
“조용!”
진정하라는 의미로 왼손을 들어 올리며 앞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깨끗하던 얼음 문은 어느새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물에 투하된 물감처럼 퍽 터지더니 차차 넓게 젖어 퍼지고 있다. 옅은 혈향(血香)이 코를 찌른다.
착시일지도 모르나, 찰나의 순간 은빛이 번쩍였다가 사라진 것 같기도 했다.
무검을 다잡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시 가져오세요.”
어수선한 와중, 잽싸게 몸을 놀린 우정민이 튕겨 나간 송곳니를 주워 건넸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홈으로 재차 송곳니를 꽂으며 외쳤다.
“전원 전투 준비!”
웅웅웅웅웅웅!
끄릉, 끄르르릉!
웅혼한 공명(共鳴)에 이어 딱 붙어 있던 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이 가서 그런지 얼음 갈리는 소음이 심했으나 틈은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결코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이렇게 문이 열린다는 건, 방금 폭음이 정상적인 발생이 아니었다는 방증이니까. 신전 내부에서 모종의 사건이 발생한 게 분명했다.
이윽고 30센티미터쯤 벌어진 틈으로 비로소 신전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
나도 모르게 흠칫 숨을 들이켰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마치 실 끊긴 인형처럼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전라(全裸)의 여인이었다.
찬란한 은발이 아래로 쏟아지듯이 흘러내린다. 힘없이 흔들리는 양팔 역시 바닥을 향하고 있다. 180도 뒤집어진 고개는 핏물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훤히 노출된 풍만한 젖가슴이 떨리듯 흔들거리고, 잘록한 복부는 쉼 없이 오르락내리락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아, 아, 아, 아…!”
여인의 두 다리는 발목이 붙잡히기라도 한 듯, 양방향으로 쭉 뻗다 못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이미 팽팽하게 당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좌우로 찢어진다.
결국 잡아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했는지, 타원형으로 확장된 음부가 쭉 찢겨 갈라졌다.
다음 순간,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직감할 수 있었다. 차마 상상하기도 싫은 그것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찌지지지지직!
“아…. 아아아아아아아악!”
연한 살이 찢어지는 소리와 울음 섞인 처절한 비명이 겹쳐 울렸다. 가랑이부터 찢겨나간 갈래는 짧은 곡선을 그리며 양 넓적다리를 대차게 뜯어냈다. 찢긴 사타구니서 퍽, 핏물이 폭발하듯 터졌다. 상반신만 남은 여인의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갈 곳 잃은 소장과 창자가 어지러이 흩어진다.
쿵!
그와 동시에 비로소 문이 완전히 열렸다.
저 모든 상황이 채 5초도 되지 않아 일어난 것이다.
– 킼캌캌캌! 킼캌캌캌! 킼캌캌캌캌캌캌캌!
난데없이 이어지는 기괴한 웃음 소리. 붉은 선혈이 낭자하다 못해, 끔찍하리만치 뜯긴 여인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에 무언가가 통쾌하다는 듯이 웃는다.
가슴이 철렁 흔들렸다. 정체 모를 기운이 물밀 듯 흘러나와 전신을 압박한다. 너무나 포악하고, 너무나 흉포하다. 악하디악한 기운이 발끝부터 스멀스멀 타고 올라와 심장을 옥죈다. 오금이 저릿하다. 그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봉인은 이미 진작에 깨졌다는 것을.
고대 악신의 부활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 젠장!
불현듯 화정이 크게 흥분했다.
나는 그제야 그 무언가, 아니 악신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정확하게 보이지가 않는다.
까마득한 천장을 가득 채울 정도의 커다란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다. 시커먼 액체가 형체를 이루는 것 같기도, 혹은 검은 연기가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흐물흐물하고 흐릿한 무언가를 보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거대해 형상을 명확하게 인지하기도 어려웠다. 팔이나 몸통, 다리가 보일라치면 순식간에 위치가 변화했다.
도저히,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최소한 악신이라는 사실은 절절하리만치 확신할 수 있었다. 저 기묘한 형체는 청량하고 신성한 공간을 자신의 기운으로 깡그리 잠식해나가고 있었으니까. 존재감 또한 무시무시해 우리 전부를 찍어 누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때였다.
– 캌!
뚝 웃음을 그친 악신이 돌연히 아가리로 추정되는 부분을 쩍 벌렸다. 그리고 상체만 남은 은발의 여인을 주워들었다. 이때까지 살아 있었는지 여인의 몸이 잠깐 흠칫했다.
그러나 악신은 마치 승리자라도 된 듯 느긋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여인을 들어 올렸고, 힘없이 꺾여 널브러진 고개 부분을 통째로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힘차게 씹는다.
콰그작!
무언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핏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동시에 미세하게 움찔거리던 여인의 몸이 덜커덕 정지하더니 축 늘어졌다.
악신의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후루루루루루루룩!
으적, 으적, 으적, 으적!
여인의 남은 몸은 물론, 흡사 국수를 흡입하듯 대롱거리는 장기까지 빨아들이고는, 아까 찢은 두 다리까지 모조리 씹어 삼켰다.
이윽고 한껏 만족한 듯 입맛을 쩝쩝 다시고 나서야 악신은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봤다.
선혈을 잔뜩 묻힌 채, 벌건 빛을 번들거리는 주둥이 꼬리가 스리슬쩍 올라갔다.
============================ 작품 후기 ============================
아…. 감사합니다.
설마 기억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예상외로 많은 독자 분들께서 알고 계셨군요. 하하.
조금 울컥할 뻔했어요. ㅜ.ㅠ ㅋㅋ
생일 축하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