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92
00791 There May Be Blue And Better Blue. =========================================================================
신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요해졌다.
처절한 울부짖음도, 살이 갈가리 찢기는 소리도, 기괴한 웃음도, 뼈까지 씹어 삼키는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변한 건 있었다.
더는 청량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 향기로운 냄새도 나지 않는다.
악독한 기운이 뭉클뭉클 치솟고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진한 피 냄새가 흐른다.
낭자한 선혈을 가운데에 두고 악신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 소강 상태는 아니었다. 애초 전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으니까.
그러나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우리를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탐색이 목적이 아닌, 어린 아이가 창 너머 장난감을 보는 듯한 호기심 어린 눈초리. 과히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 김수현.
불현듯 들려온 화정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이 정도로 가라앉은 음성은 예전 아틀란타를 앞뒀을 때 딱 한 번밖에 들어보지 못했다.
– 최악의 상황이야.
그 정도야 알고 있다. 들어가자마자 웬 여인이 죽어 놀라기는 했지만, 우리가 꼼짝도 못 하는 이유는 잔혹하게 살해하는 광경을 봐서가 아니었다. 당장 심장을 쥐어짜 터뜨릴 것만 같은 저 무지막지한 존재감 때문이다.
몸이 너무나 무겁다. 숨을 삼키기조차 어렵다. 칼자루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고 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똑같은 현상을 겪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콸콸 쏟아지는 악기(惡氣)는, 우리 전부를 찍어 누르고도 남을 만큼 넘쳐 흐르고 있었으니까.
그러한 찰나, 화정의 말이 이어졌다.
– 최선은 여인을 깨우는 거였고, 차선은 여인을 살리는 거였어. 하지만 지금 두 방법 모두가 원천 봉쇄당했지. 무슨 말인지 알아 들어?
‘누가 외부에서 개입했다는 말인가?’
–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야. 지금은 무조건 사는….
‘…….’
화정은 끝까지 말을 잇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는 데만 집중해라.
그러나 말을 흐렸다는 건….
– …살고 싶어, 살리고 싶어?
결국에는 그때와 똑같은 선택지인가.
‘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형도 한소영도 없다고. 지금이라면 열세 명을 미끼로 사용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비록 가슴은 아프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는 게 옳지 않을까.
그러나,
‘살리고 싶다.’
말은, 아니 대답은 나도 모르게 반대로 해버렸다.
왜, 왜….
왜 이렇게 생각한 거지?
– 염화(炎化) 능력 준비해. 뒤에 13명은 바로 도망치라고 하고.
화정은 간단하게 말했지만, 그만큼 확실하게 와 닿았다. 염화는 사용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사용하는 순간 네 수명이 오 분으로 줄어든다고 언제나 말하지 않았는가.
말인즉 죽음은 이미 기정 사실이라는 소리였다.
‘도망치게 하라고?’
– 왜. 그럼 다 같이 힘을 합쳐 싸우기라도 할까?
‘하지만….’
– 꿈 깨.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 지금 누구를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
– 신이야. 그것도 어지간한 신들은 범접할 수조차 없는 고위급 신. 그 찬란한 영광을 이룩한 고대 홀 플레인 거주민들도 떼로 덤벼들어 떼죽음을 당했는데, 고작 이 열네 명으로 뭘 하겠다는 거야?
화정의 말은 신랄했지만,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옳았다.
– 이제부터는 싸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너도 애초 나를 품고 있으니 발목이라도 붙잡을 수 있다는 거지, 쟤들 중에서 그나마 털끝이라도 건드릴 수 있는 애들은 두 명? 아니 세 명?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현재로써는 겨우 악신의 발목을 붙잡는 수준이라. 새 장비를 테스트하러 나온 것치고는 너무 가혹한 시험이 아닌가.
– 설령 네가 오 분 만에 저놈을 쓰러트린다손 쳐도, 그 사이에 전멸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천운에 천운이 따른다고 해도 절반…. 김수현!
그때였다.
화정의 외침과 동시에 본능에 따라 몸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찰나의 순간, 악신의 몸이 살짝 흔들리는 게 시야에 잡혔고,
“이지스 시스템(Aegis System)!”
잔뜩 긴장한 백한결의 음성이 울렸다.
아차 한 순간, 소리소문 없이 짓쳐 들어온 검은 것과 정육각형의 흰 장막이 맞부딪친다.
꽈앙!
챙그랑!
고막을 찢는 굉음과 유리 깨지는 소리가 겹쳤다.
그리고,
“까아아악!”
고통을 부르짖는 괴성이 이어졌다. 급히 몸을 돌렸다. 백한결은 허리가 절반으로 꺾인 채 공중을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백…!”
쾅, 벽에 금이 갈 정도로 강하게 부딪쳐 떨어진다.
“우우우욱!”
왈칵 게워내는 핏물에는 찌꺼기가 섞여 있었다. 내부가 진탕이 됐다는 방증이다. 두어 차례 피를 더 토해낸 백한결은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죽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위험한 상태처럼 보였다. 왜냐면 더 이상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으니까.
단 한 방에, 아니 일격 같지도 않은 일격에 백한결이 그로기 상태까지 몰린 것이다.
“한결아…!”
“뭐, 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고성과 괴성이 오고 갔다.
그러는 와중, 나는 황급히 달려가는 안솔을 나는 가만히 응시했다.
이상하다.
화가 나야 정상인데 이상할 정도로 머릿속이 급속히 냉각되는 기분이다.
– 김수현. 어서…!
그래. 관찰을 끝냈는지 비로소 악신이 움직일 낌새를 보인 것이다. 방금 공격은 아마 가벼운 인사였는지도 모른다.
자꾸 흔들릴 것 같았지만, 나는 침착해지려 애쓰며 남다은의 견갑(肩甲)을 짚었다.
“사용자 남다은.”
깜짝 놀란 남다은이 나를 쳐다봤다. 예의 차가운 표정을 가장하고는 있으나 입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한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보통의 사용자였다면 이미 진작에 줄행랑을 쳤을 테니까. 게다가 나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는데, 다른 사용자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지시를 하나 내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책임지고 남은 인원과 함께 전장을 이탈합니다.”
“…네? 그게 무슨…!”
“방해가 돼서 그렇습니다.”
“……!”
남다은은 발칵 외치려고 했지만, 선수를 쳐 입을 닫게 만들었다. 동그란 눈으로 입을 뻐끔뻐끔 움직이는 게,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말문이 막힌 것 같다.
뜬금없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왜냐면 마침내 악신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내가 아니더라도 분명 누군가 죽는 이가 나올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놈의 관심이 내게 쏠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장 마력을 끌어올렸다. 체내의 흐름과 갑옷의 효과를 합산하면 마력 흐름 속도는 4.5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감각이 가시지를 않는다. 악신이 뿜는 압박감을 완전히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그때 심장을 중심으로 돌연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화정이 스스로 힘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게헨나를 상대할 때와 똑같은 상황.
“그럼, 부탁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앞을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크, 클랜 로드!”
한 박자 늦게 남다은이 붙잡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상황은 극히 불리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은 어렴풋하며 형체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식으로 공격해올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겨우 알아낸 거라고는, 아까 백한결이 공격받았을 때 놈의 공격이 무척 빨랐으며 무음(無音)이었다는 것. 정보가 너무나 부족하다.
그래서 돌진하는 속도를 적당히 조절했다.
우선은, 알아야 한다.
– 캌캌캌캌!
앞으로 느긋이 나오던 악신은 나를 보고 주춤하더니 갑작스레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이었다.
– 왼쪽!
한순간 길고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뱀처럼 튀어나와 휩쓸 듯이 나를 후려친다. 소리는 역시나 무음. 방향은 화정의 말대로 왼쪽. 그럼 저걸 놈의 오른팔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아주 짧은 순간이기는 했지만, 게헨나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신속에 가까운 속도였으나 게헨나 정도로 빠르지도, 강렬하지도 않다. 지옥 대공과 일전을 벌인 경험이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붙잡아준다.
찰나의 순간, 나는 흐르듯 안쪽으로 파고들어 공격을 스치게 했고, 그대로 몸을 돌려 무검을 크게 베었다. 회전력이 가미된 칼날이, 그대로…?
“뭐?”
어떻게 된 거지? 왜 어떤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 거지?
무검은, 하릴없이 연기를 뚫고 나왔다. 너무 쉽게 빠져나오니 외려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다음 순간,
– 왼쪽! 피해!
그 순간 무언가 스치는 느낌이 전해졌다. 반사적으로 이형환위를 사용하려는 찰나,
우웅!
꽈앙!
균형이 오른쪽으로 급격히 틀어지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확 기울었다. 내가 인지하지 못한 사이 눈앞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몸은 미끄럼틀을 탄 것처럼 오른쪽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아…!”
콰쾅!
무언가에 부딪혔는지, 부서진 얼음 잔해가 와르르 쏟아진다.
그제야 내가 오른 벽에 부딪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주변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박살 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어디 한 군데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절로 침음이 나온다.
눈앞을 물들이는 붉은 장막. 갑작스럽게 소비된 적잖은 마력.
…우선, 게헨나의 보호 구슬이 지켜줬다는 건 알겠다.
얼떨떨하게 왼쪽을 돌아보니 마찬가지로 나를 보고 있는 악신이 보였다. 아까 스치게 한 공격은 여전히 쭉 뻗어 나가 있었다. 허나 오른쪽이나 발차기라면 모를까. 나는 분명히 왼쪽으로 공격받았다.
그러면….
도대체 내가 어떻게 공격을 받았다는 거지?
“…….”
갑자기 정신이 멍해졌다.
*
– 콰쾅!
지직거리는, 노이즈 섞인 굉음이 어둠을 왕왕 울렸다.
“맙소사! 이거 정말 대단한데?”
어두운 공간, 영상을 구경하던 루시퍼가 화들짝 탄성을 터뜨렸다. 화등잔만 하게 떠진 눈동자는 몹시 놀라워하는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예상치 못한 일을 겪은 것처럼, 루시퍼는 양손을 깍지 낀 채 흥미진진하게 영상을 응시했다.
“공간을 저렇게 쉽게 비틀고 전이해서 공격한다고? 그것도 저게 가능한 일인가? 아니지, 저건 나도 못 막을 거 같은데.”
연신 의문과 감탄을 터뜨리던 루시퍼는, 이내 돌연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거 김수현은 문제도 아니겠어. 이 정도면 오히려 프로세르피나가 싸게 먹혔다고 봐야 해.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야.”
극찬에 극찬을 거듭한다.
이윽고 하하 웃은 루시퍼는 문득 옆을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는, 오직 어둠밖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지만, 루시퍼는 기분 좋은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탄.”
============================ 작품 후기 ============================
악신은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냉정히 말하면 놀고 있는 상태지요.
물론 김수현이 염화를 사용하면 그러지는 못하겠지만,
현재 상황으로는 압도적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물론 악신은 게헨나보다는 약합니다만, 두 존재의 차이는 있습니다.
두 존재가 김수현을 대하는 방식을 생각해보시면 그 차이는 물론, 현재의 상황이 이해가 가실 듯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