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96
00795 본처(本妻) 강림(降臨). =========================================================================
가히 수백을 헤아리는 열화검(熱火劍)이 모조리 악신의 몸에 명중했다.
작렬하는 섬광은 신전을 환히 밝혔고, 이내 들끓는 소음을 내며 연기를 불사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화마(火魔)는 기하급수적으로 강도를 더해 악신을 갈가리 찢어발긴다.
화아아아아아아악!
폭발적인 발광(發光)은 육안으로 감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라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마력으로 눈을 보호했음에도 부담이 느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무검을 바스러지도록 움켰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속으로 자꾸만 울분이 치밀어 오른다.
세상에. 임산부를, 만삭의 여인을 공격하다니. 그것도 내 아이라는데.
어쩌면 큰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악신이라는 놈을 오체분시하지 않고서는 이 끓는 속이 가라앉지 않으리라.
이윽고 조금이나마 빛이 사그라졌다. 나는 아주 결딴을 낼 요량으로 공중을 활공하며 무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용솟음치는 화정의 힘이 외부로 드러나 무검을 나선으로 휘감는다.
빛무리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억지로 눈을 치뜨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응?”
아래에는 아직 잔존한 화정의 기운이 물결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중앙에는 주먹만 한 불씨가 사방팔방 널려 있다.
“…….”
아주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점차 사그라지는 불씨 안을 바라본 순간 나는 크게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조각조각 찢긴 검은 연기가 서서히 연소하고 있었으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악신의 거대한 몸체는 보이지 않았다.
“주, 죽었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물론 염화 능력을 사용했고, 필살기나 다름없는 열화검도 제대로 들어가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악신인데. 화정보다 서너 수 떨어진다고는 하나 무려 신이지 않은가. 전투가 시작된 이후, 시종일관 처맞기만 하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다.
– 에휴….
그때 한심하다 느껴지는 한숨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문득 화정은 모종의 사정을 알고 있으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으나, 나는 아래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말로, 진정으로 믿어지지가 않는다.
혹시 어디로 도망친 건가. 아니면 죽은 척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오만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경계를 풀지 않고 바닥으로 내려갔을 즈음, 어느새 불씨는 좁쌀만 하게 작아진 상태였다.
불현듯 검은 연기를 사르르 흘리는 둥글게 뭉친 작은 덩이 하나가 눈에 밟혔다. 나는 홀린 듯한 기분으로 그것을 주워들었다. 말랑하면서 뭉클뭉클한 감촉이다. 어쩌면 이게 악신이 소멸한 흔적이 아닐까.
– 김수현.
‘응?’
– 악신은 소멸했으니까.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그래?’
내가 계속 갸웃하는 걸 알았는지 화정이 확실하게 말해줬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화정의 확언을 듣자 약간은 마음이 놓인다.
– 그보다 이제 너를 걱정하는 건 어때? 이제 한 4분 정도 남은 거 같은데.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아차 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시시각각 몸 안의 기운이 사라져 가는 느낌이 엄습한다.
짝짝짝짝.
돌연히 손뼉 치는 소리가 들렸다. 게헨나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역시 내 반려가 될만하구나. 그렇지? 수나야.”
게헨나가 배를 어루만지며 미소 짓는다.
수나라고…?
드드드드드드드드!
그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심히 떨리는 소음이 일더니 실제로 주변 공간이 덜덜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서 있는 바닥까지도.
“무….”
주변을 둘러보려는 찰나 쿵 소리와 함께 천장 한쪽이 무너졌고, 이어서 바닥이 갈라지고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난리가 날 건 명약관화(明若觀火)였다.
쩌저저저저저저적!
느닷없이 얼음 바닥에 커다란 금이 갔다. 금을 기점으로 수십, 수백의 균열이 일어나 사방이 위태하게 흔들린다.
그러나 얼른 속을 가라앉혔다. 놀라기는 했으나 예상한 일이었다. 의심까지 받아가며 수송 어빌리티를 아낀 건 바로 이때를 위해서가 아니었나.
일단은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다.
“게헨나!”
그렇게 생각한 나는 게헨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호오, 신역이 해제되는 건가. 이대로 있다가는…. 응?”
무어라 중얼거리던 게헨나는 깜짝 놀라 나를 돌아봤으나 설명할 틈은 없었다.
“제갈 해솔!”
마력을 담아 외치며 뒤를 돌아봤다. 어디 있는지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입구 쪽에 모여 있는 대 여섯 명 사이로 제갈 해솔이 나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척하면 척이라고, 제갈 해솔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모두 입구로! 수송 어빌리티로 벗어납니다!”
한 번 더 외치고 나서, 나는 게헨나의 손을 이끌어 달렸다. 중간중간 좌우를 둘러보자 나와 마찬가지로 입구로 죽어라 달리는 이들이 보였다. 공찬호나 차소림이나 황망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우선 벗어나야 한다는 의견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윽고 제갈 해솔의 주변으로 푸른 물방울 같은 것들이 모이기 직전, 나는 잠깐 뒤를 쳐다봤다. 손은 꽉 잡고 있었으나 괜스레 뜻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혹시, 눈을 뗀 사이 게헨나가 사라지는 게 아닐까고.
“…….”
“…….”
그러나 고맙게도 게헨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외려 잔잔한 얼굴로 나만을 바라보고 있다. 어여쁜 선홍 빛 눈동자서 까닭 없이 강한 신뢰감이 느껴졌다.
다시 앞으로 눈을 돌렸다. 백한결의 보호막이 있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아쉽게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제갈 해솔의 영창도 거의 끝나가는 듯 보였으니까.
이윽고 입구에 도착한 순간 영창을 마친 제갈 해솔이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인원을 점검하더니 망설임 없이 주문을 외쳤다.
*
퉁!
흡사 공이 튀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눈앞의 시야가 달라졌다.
발 아래 단단한 설판이 밟혔다. 어디로 이동하나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우리는 바다를 앞두고 있었다. 제갈 해솔의 수송 어빌리티가 진로 결계마저 뛰어넘었다는 방증이다. 물론 정확한 좌표를 모르면 말짱 꽝이겠지만.
아무튼, 탈출은 성공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진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몸에서 힘이 사라지고 있었고, 지금으로써는 간신히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아무래도 벌써 시간이 다 된 모양이다.
“으이? 으에에에에에에엑!”
누군가 괴성을 지르며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안솔의 비명인데. 설마 게헨나를 봐서 그러는 건가? 그나저나 나도 주저앉고 싶군.
“뭐, 뭐야? 다, 당신은…!”
“워워, 진정하거라. 시끄럽지 않느냐.”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응? 아아. 신역은 단 하나의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그리고 만들 수 있는 공간이지.”
제갈 해솔의 물음에 답한 건, 다름 아닌 게헨나의 목소리였다. 그걸 바라고 물어본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하하.
일순간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으나 게헨나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목적을 다 했거나 공간이 존재하는 의의가 사라진 이상, 신역이 유지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애초 그리 형편 좋은 공간도 아니라서. 현재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결계 안에 있는 모양인데…. 아마 지금쯤 한창 가라앉고 있을 테지.”
“저, 저기요. 상세한 설명은 고마운데요. 그걸 물어본 게 아니거든요? 아까는 너무 급해서 보고 넘어갔는데, 그쪽은….”
“후후. 날붙이들은 이만 거두지 그러느냐. 이제 너희와 적대할 이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도 안 되니까.”
“그래서도 안 되니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니, 우리가 그쪽을 어떻게 믿죠?”
설명해야 한다. 얼른 몸을 돌리고 설명해야 한다. 게헨나는 적이 아니라고, 오히려 우리 목숨을 구해줬다고 말해야 한다. 자세히는 못 하더라도, 최소한 한 마디라도 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띠링!
돌연히 가벼운 알림음이 들렸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익숙한 소리였다.
『전설의 업적! 사용자 김수현 외 열네 명은 고대 악신과 악마 14 군주 ‘프로세르피나’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고대 악신은 인간 세상에 뿌리 깊은 원한을 간직한 채 강제로 잠들었습니다. 그러나 악마 14 군주를 제물로 깨어난 이후, 백야의 무희를 살해하는 걸 시작으로 타나토스의 명령을 이행하려 했지만, 결국 영원한 소멸을 맞이했습니다. 비록 뜻하지 않은 행운이 따랐다고는 하나, 세상을 구원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용자 김수현 외 열네 명은 고대 악신 20,000,000 Gold Point, 악마 14 군주 프로세르피나 5,000,000 Gold Point, 총 25,000,000 Gold Point를 획득합니다!』
『각 사용자당 1.666.667 Gold Point를 분배 받습니다.』
『캐러밴 시스템 확인! 각 사용자의 공헌도에 따라 추가 Gold Point를 지급합니다. 1. 게헨나(80%) 2. 김수현(10%) 3. 안솔(5%). 4. 차소림(1%)…. 그러므로 사용자 김수현은, 총 보상 Gold Point의 10%인 2,500,000 Gold Point를 추가로 부여 받습니다!』
『캐러밴 시스템 확인! 막타를 친 사용자 김수현에게 250,000 Gold Point를 추가로 지급합니다!』
허공에 메시지 여러 개가 주르륵 출력되는 것 같다. 아니, 분명히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고대 악신 정도면 충분히 업적으로 인정받을 만하니까.
그러나 나는 하나도 읽지 못했다. 글자가 보이기는커녕, 메시지조차도 물에 번진 물감처럼 흐릿했기 때문이다.
툭.
손에 쥐고 있던 검은 덩이가 떨어졌다. 이어서 가물가물한 시야에 거뭇한 형상이 드리웠다.
누구지…?
“…….”
아…. 이제 정말 한계인가….
잠시 후.
“젠장, 무슨 메시지가 이렇게…. 클랜 로드. 아무래도 저희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셔야…. 클랜 로드?”
누군가 내 어깨를 건드린 순간,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느닷없이 시야가 핑그르르 돌더니 푸른 바다가 아닌 흰 것이 아른아른 눈에 들어온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머리가 꺾여 숙여졌다.
“클랜 로드? 클랜 로드!”
“오빠? 오빠 왜 그래? 오빠아아!”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아, 아니! 나는 아무것도…!”
주변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문득 후회가 들었다.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게헨나한테 부탁할 걸 그랬나.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아이 씨, 그나저나 누가 이렇게 흔들어 젖히면서 빽빽 소리 지르는 거야? 안 그래도 어지러워 죽겠는데.
“고생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한숨 푹 자두거라.”
그때 누군가가 따스한 음성으로 내 귓가에 속닥거렸다. 그러자 불현듯 온몸이 가라앉는 듯한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마치 고요한 수면에 서서히 침잠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조용…! 왜 이리들 호들갑을…. 정신이 하나도…. 해명하는 것도 좋지만…. 우선 내 부군부터 살려야…. …좀 그러니, 적당한 장소를 안내….”
아스라이 들려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잘 보이지 않는 눈을 완전히 감았다.
부디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 모든 것이 평화롭기를 바라며.
============================ 작품 후기 ============================
캣 파이트…. 좋지요.
단, 비슷한 상대끼리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한소영이라던가,
또 예를 들면 세라프라던가요. 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