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99
00798 내조(內助)의 여왕. =========================================================================
회의가 시작됐다. 교관, 연구 등 임무 수행 중인 이들을 제외하고 전원이 호출된 회의였다.
‘호오. 꽤 구색이 좋지 않은가.’
‘부군의 일상 모습을 보고 싶다.’ 라는 이유로 따라 들어온 게헨나는 1층 회의장의 풍경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광활한 면적과 천장과 바닥을 잇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 그리고 각 등급에 맞춰 가지런히 나열해 앉은 클랜원들과 최고 상석에 앉아 회의를 진행하는 김수현의 모습은, 흡사 중세 시대의 왕과 신하를 보는 듯했다.
회의의 첫 안건은 금번 원정을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원정에 참가한 클랜원들이 호명되고 실적을 확인받는다.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한쪽 구석에 앉은 게헨나는 흡족한 얼굴로 연신 배를 쓰다듬었다. 회의장에 들어온 이후 태아의 활동이 갑자기 활발해졌다. 왕의 운명을 타고나 이 풍경에 반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아비를 봐서 좋아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움직임이 지옥에 있을 때보다 갑절이나 활기 차다는 것이다. 뱃속에서 신 나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데, 배를 뻥뻥 차는 아픔 따위 당연히 감내할 수 있었다.
‘그래그래 이것아. 저 사내가 네 아비란다. 지금이라도 실컷 보려무나.’
게헨나가 얼른 나가고 싶다는 듯 마구마구 몸부림치는 태아를 살살 달랠 즈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신 코란 연합이 아직도 밤의 거리를 구현하지 못했다?”
어느새 새 안건으로 넘어갔는지 성난 목소리가 회의장을 짜르르 울렸다. 김수현의 음성은 낮았으나 ‘군주여, 호령하여라.’ 의 영향으로 회의장 구석까지 날카로이 전달됐다. 그 기운을 정면으로 받은 조승우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을 정도였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이스탄텔 로우의 지침은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건 동 도시 한정이고, 우리 남 도시는 해당 사항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허락했는데요.”
“예, 예. 그렇습니다만. 사정이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이대로 속행하면 이스탄텔 로우에 상당한 손해가 발생합니다.”
“손해라니요?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보세요.”
“그게 말입니다. 이스탄텔 로우 산하 클랜에서 불만이 터졌습니다.”
흐응, 콧숨을 흘린 게헨나는 흥미로운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여러 말이 들려왔으나 귀담아듣지는 않는다. 어차피 들어봤자 소용없으니까. 게헨나는 그보다 김수현과 클랜원들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는 중이었다.
“불만이요?”
“정확히는 밤의 거리를 금지하는 이스탄텔 로우의 법 때문입니다.”
“그게 어째서 문제가 됩니까?”
“신 코란 연합이 밤의 거리를 구현하기 직전, 동 도시에서 대대적인 성명(聲明)이 일었습니다. 밤의 거리를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이대로 산하 클랜을 탈퇴하고 모조리 남 도시로 넘어가겠다고요.”
살얼음 같은 말이 이어지는 가운데 게헨나는 턱을 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썩 나쁘지 않은 집합이로다.’
근 사나흘 동안 게헨나는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아니. 일종의 ‘유희’라 명명해도 상관없겠지만, 여하튼 근래 인간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을 나름 알아본 상태였다. 물론 기본적인 것들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그중에는 머셔너리 클랜 시스템도 포함돼 있었다. 김수현이 ‘왕’으로서 어떤 체제를 확립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허나.’
게헨나는 내리뜬 눈을 치뜨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설마 그런 성명이…. 그래도 이스탄텔 로우 로드의 성격이라면 그러라고 했을 것 같은데요.”
“여기서부터 사정이 복잡해집니다.”
“……?”
“주동자가 바람을 잘 넣었는지 넘어오겠다는 클랜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지분으로 따지면 동 도시 한정으로 2할, 모니카까지 합치면 4할입니다.”
낯을 찡그리고 있는 김수현과 차분히 말을 잇는 조승우.
‘일원화(一元化) 성향이 너무 강하구나. 지나칠 정도로.’
게헨나는 그런 둘을 바라보며 살그머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정도로…. 으음. 그래도 밤의 거리 구현이 무기한 정지된 건 과하지 않습니까. 결국에는 이스탄텔 로우의 눈치를 봤다는 거잖아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터졌으니까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 클랜 로드. 잠시만….”
잠시 말을 끊은 조승우는 조심스레 김수현 옆으로 다가갔고, 이어서 블록 필드(Block Field)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두 사내 주변으로 뿌연 막이 일어나 둥글게 감쌌다. 오고 가던 말소리가 차단되자 회의장에 삽시간에 정적이 내려앉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게헨나는 끊임없이 상념을 잇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뿌리를 내린 건가. 제 뜻대로 움직이겠다는 생각은 알겠으나, 그만큼 약점도 극명히 드러난다.’
‘그나마 뒤늦게 알아차린 것 같기는 한데…. 이미 늦었다. 등급제로 충격은 줬겠지만, 익숙해지는 순간 도로 정체될 터.’
‘세분화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호전은 가능할지 몰라도 완치는 힘들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일지 몰라도, 안은 사상누각이로다. 이럴 때 내부를 부드러이 보듬어줄 안주인이 있어야 하는데….’
놀라운 일이었다. 고작 며칠이나 지났다고, 게헨나의 혜안(慧眼)은 머셔너리 클랜의 현황을 정확히 짚어냈다.
‘흐응. 이대로 신세만 지다 가기는…. 그리고 이런 웃기지도 않는 연극에 계속 어울리는 것도 그렇고.’
‘조금은 진심으로 해볼까.’
그렇게 생각한 게헨나는 살며시 눈을 들었다. 김수현 근처의 앞자리에는 여러 여인이 앉아 눈이 빠져라 블록 필드를 응시하고 있다. 게헨나는 킥킥 소리 죽여 웃었다.
‘나 원. 저렇게 부선장이 많으니…. 정말, 난봉꾼 같기는.’
그때였다.
“……?”
“……!”
찰나의 순간, 게헨나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잠깐 구석을 돌아본 고연주와 눈을 마주친 것이다. 비록 바로 고개 돌리기는 했으나 분명히 느꼈다. 실제로 고연주만이 아니라, 몇몇 여인이 게헨나를 흘깃거리고 있다. 해코지라 보기는 어렵지만, 김수현과 함께 있던 식당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게헨나는 속으로 살그머니 웃었다. 저들이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면 게헨나는 김수현이 여인이 많다고 해서 조금도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면 대상이 인간이니까. 고대 악신도 아이 다루듯 하는데 일개 인간을 경쟁 상대라 여길 리 만무하다. 혹시 화정이 강림하거나 타나토스의 힘을 품은 여인이 나타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게헨나가 인간을 보는 관점은 인간이 벌레를 보는 관점과 하등 다르지 않다.
“…그럼 우선 그렇게 하는 걸로 하죠.”
“예. 알겠습니다. 아마 부르면 바로 달려올 겁니다. 하하.”
그때 두 사내의 말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비밀 이야기가 끝났는지 조승우가 블록 필드를 해제하고 돌아 나오고 있다. 걱정을 떨쳐서 그런지 안색이 확 밝아졌다.
“회의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김수현이 회의의 종료를 알리는 동시, 회의장 내 경직된 분위기도 풀어졌다. 이윽고 한 명 한 명 일어나는 클랜원들을 보며 게헨나도 느긋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구를 나가기 직전,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는 김수현과 눈을 맞춘 후 가볍게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게헨나는 과연 알고 있을까.
며칠 내로 폭발적인 질투를 느낄만한 인간 여인과 대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
회의가 끝난 후 고연주는 곧장 숙소로 이동했다. 명색이 교관인 이상 계속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연락을 하기도 또 떠나기 전 누군가와 만나야 한다. 시간에 맞추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 괴물의 근황은 어떻습니까.)
“괴, 괴물이 아니라 게헨나에요. 그리고 딱히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네요. 약속대로 조용히 지내는 중이에요.”
고연주는 통신용 수정을 마주 보며 쓰게 웃었다.
(그렇군요. 그럼 수현이는요?)
“깨어났고, 밥도 잘 먹고, 회의도 잘해요. 아, 회의가 끝나고 게헨나 씨와 같이 나가는 것 같던데요?”
(으음. 그림자 여왕이 보기에 어떤가요. 수현이도 좋아하는 것 같나요?)
“아….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후, 정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수현이 이 녀석, 이런 일을 벌여놓고 나한테는 연락도 없으니….)
“호호. 정 걱정되시면 한 번 와보시는 건 어때요?”
수정에서 흘러나오는 저음의 음성이 한탄하듯 말하자 고연주가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억지가 다분히 묻어나는 선웃음이었다. 그 미소를 봤는지 상대는 잠시 침묵했다.
(…미안합니다.)
“네? 아니, 왜….”
갑작스러운 사과에 고연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정말 못할 부탁을 한 것 같습니다.)
“에이, 아니에요. 아주버님. 이해하고 있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
(…….)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나면 수현한테 톡톡히 보상받을 생각이에요. 우리 모두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요?”
자박자박.
그때 호젓한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잠깐 뒤를 돌아본 고연주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연 씨가 오는 모양이네요. 이만 끊을게요.”
(알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 부탁합니다.)
이윽고 수정의 빛이 꺼지는 동시에 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살그머니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연한 낯빛을 빛내는 여인은 바로 정하연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방금 아주버님이랑 연락 끝냈는데.”
“미, 미안해요. 잠시 구경 좀 하느라….”
고연주의 핀잔 아닌 핀잔에 정하연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구경?”
고연주가 의아히 눈을 치떴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일었어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보다…. 이제 다시 가셔야 하죠?”
정하연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고연주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리 준비한 짐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네. 오늘 가면 한 이틀은 내리 있어야 할 것 같네요. 사용자 이효을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고요.”
“그렇군요….”
“아무튼, 제가 없는 동안 잘 좀 부탁해요. 상남 씨나 노노 언니가 잘해주고는 있지만, 아직 어색한 클랜원들이 보이더라고요. 아예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애도 있는 것 같고.”
“네….”
왜인지 정하연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연 씨?”
짐을 들고 몸을 돌린 고연주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정하연의 상태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망연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게 흡사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인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정하연의 잔잔한 바다 빛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투명한 눈물로 가득히 괴어가기 시작한다.
“흑.”
문득 눈물이 한 줄기 주룩 흘러내렸다. 무언가 북받쳐 오르는 걸 참지 못한 듯, 정하연은 그대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흑, 흐흑, 으흑, 흑!”
결국에는 파르르 어깨를 떨며 뚝뚝 눈물을 떨구기 시작한다.
“하, 하연?”
깜짝 놀란 고연주는 얼른 다가가 정하연의 양어깨를 부여잡았다. 상체를 비스듬히 숙이며 서러이 울어 젖히는 정하연의 얼굴을 살핀다.
“왜 갑자기 울어요?”
“부, 분해요. 흑!”
“…네?”
“으흑. 부, 분하다고요. 두, 둘이서 산책을 하는 모습을 봤는데….”
“…….”
“그, 그런 수현의 얼굴은 처음 봤어요. 너, 너무 부드럽고, 해, 행복해하고. 저, 저는 5년 동안 그런 모습, 하,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너, 너무 분해서….”
연신 말을 더듬으면서 정하연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고연주는 확연히 가라앉은 낯으로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팔을 내밀어 정하연을 안았다. 그리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달래기 시작했다.
“알아요. 그 마음 왜 모르겠나요. 수현이 정말 나쁜 놈이에요.”
“흑, 흐흑!”
“조금만, 조금만 더 참도록 해요. 이제 며칠만 더 참으면….”
“흐윽….”
고연주가 말끝을 흐리고, 정하연의 울음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과연 김수현이 잠든 사이, 머셔너리 클랜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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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헨나양이 : 냥♡, 냥♡, 냥♡, 냥♡!
하연양이 : 냐앙~. 냐아아앙~.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