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00
00799 수나의 탄생. =========================================================================
시간을 돌려, 사흘 전.
쾅!
“뭐라고요?”
해도 떠오르지 않은 새벽, 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건물에서 무언가를 강하게 내려치는 소리와 고성이 겹쳐 울렸다.
건물 최상층의 방 안에는 두 여인이 있었다. 한 여인은 조용히 서 있는 것에 반해, 다른 여인은 손톱을 깨물거나 책상 주변을 서성이는 등 온몸으로 불안을 표현한다.
그렇게 1분을 돌아다니던 이효을은 간신히 책상에 앉아 연초 한 대를 꺼내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 때문인지 불을 붙이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그런 이효을을 빤히 바라보던 여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잠시, 연주 씨 잠시만요.”
그러나 말이 채 나오기도 전, 이효을은 재빨리 손을 들어 제지했다.
“저 이거 하나만 필게요. 지금 너무 놀라서 그래요. 네?”
흡사 애원처럼 느껴지는 음성에 고연주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필터 끝까지 연초가 타들어 갔다. 가까스로 진정한 이효을의 목울대가 작은 고저를 그렸다.
“그럼 상황부터 되짚어볼게요.”
“그러니까….”
“아뇨. 제가 말할 테니까 듣기만 하세요. 혹시 틀린 게 있으면 끊어주시고요. 머셔너리에서 탐험을 갔고, 감당치 못할 괴물을 만났고, 죽기 직전 또 다른 괴물이 소환됐고, 첫 괴물을 처치하고 머셔너리 로드의 목숨을 구했다. 맞나요?”
“맞아요.”
이효을은 이 모든 말을 아주 빠르게 쏟아냈다. 그리고 고연주가 수긍하자마자 강하게 팔걸이를 움켰다.
“그리고 지금 여기로 오고 있다? 그것도 반나절 안에 도착한다?”
“네.”
“네? 네라고 했어요 지금?”
“…….”
이효을은 기가 막힌다는 듯 반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단신으로 최정예 1만 명을 상대한 괴물이다. 게헨나가 처음 출현했을 때 같은 자리에 없었지만, 이후 강철 산맥 피해 수준을 집계하며 얼마나 놀랐던가.
“들어보면 그렇게 적대적이지는 않다고 해요.”
“우리 지금 당장은 안 터질지도 모르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 껴안고 같이 잘래요?”
고함만 치지 않았을 뿐, 이효을의 목소리는 명백한 힐난 조였다. 힘껏 노려보는 눈초리에 고연주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눈을 내리떴다.
“…미안해요. 따지고 보면 연주 씨 잘못도 아닌데, 제가 너무 흥분했네요.”
잠시 후, 이효을은 곧바로 사과했다. 말 그대로 고연주가 저지른 일도 아니거니와, 지금 화내봤자 무의미한 일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명석한 머리도 이번만큼은 쉬이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막말로 북 대륙 사용자 전원을 동원한다손 쳐도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어마어마한 혼란을 감수할 자신도 없었다.
“저는 도저히 모르겠어요. 연주 씨는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요?”
“우선은 만나서 이야기해볼 예정이에요.”
“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말씀드렸잖아요. 그 괴물이 직접 밝혔어요. 인간을 적대할 생각이 없다고. 실제로 우리 클랜원이 같이 있고, 무엇보다 수현의 목숨을 구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계속 있을 수는 없다고 하니까요. 돌아가기 전까지 수현의 옆에 있고 싶다고 하니까….”
고연주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이효을은 깊게 신음했다.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현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을 직감한 것이다.
이효을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젠장. 결국, 김수현과 특별한 관계라는데 걸 수밖에 없잖아. 무슨 임신이라도 시킨 건가?”
혼잣말을 중얼거린 찰나, 고연주의 몸이 움찔했다. 그러나 보지 못한 이효을은 힘없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출퇴근만 허락해주면 되나요? 따로 도와줄 건 없어요?”
“우선 이 이야기는 꼭 비밀로.”
“그건 당연하죠.”
“그리고 해밀 로드에게 연락해서 현 상황을 전하고, 머셔너리 캐슬로 와달라고 말씀해주세요. 저는 지금 바로 돌아가 클랜원들한테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해야 할 것 같아서.”
“해밀 로드? 해밀 로드는 왜요?”
“수현의 친형이니까요. 이 일에 관해 알 권리가 있고, 어떻게 비벼볼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죠.”
고연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효을은 한참을 쳐다보다가 긴 한숨과 함께 통신용 수정을 집어 들었다. 그걸 확인한 고연주는, 소리소문없이 그림자로 스며들어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반나절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머셔너리 캐슬은 고요했다. 해가 뜬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고, 뿌연 안개까지 감돌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우선 동생의 목숨을 구해준 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머셔너리 캐슬 1층의 중앙 광장, 사방이 훤히 트인 쉼터에서 게헨나는 얌전히 의자에 몸을 묻고 있었다. 게헨나의 반대편에는 두 남녀가 앉아 있다. 잔뜩 긴장한 잿빛 눈동자의 고연주와 정중히 머리를 숙인 두꺼운 로브를 걸친 마법사. 김수현의 친형인 김유현이었다.
이윽고 김유현이 머리를 들자 게헨나의 눈매도 오연함을 되찾았다.
“감사는 받아들이겠다만, 어째 낯은 불청객을 보는 듯한 표정이로다.”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쨌든 당신으로 인해 인간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까요. 거기다 당신이 지닌 무력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도 남습니다.”
김유현은 순순히 시인했다. 그러나 게헨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엄청난 피해라고까지는…. 어지간하면 죽이지 않으려 노력했다만.”
“그때 그쪽이 출현한 것만으로 이천 명이 넘는 인간이 깡그리 녹아내렸죠.”
날 선 음성으로 답한 건 고연주였다.
“으응? 그건 내가 벌인 짓이 아니다만.”
“뭐라고요? 설마 기억이 안 난다는.”
김유현은 손을 들어 고연주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상황은 어느 정도 전달받았습니다. 현재 인간을 적대할 생각은 없다고 들었는데요.”
“흐음.”
게헨나가 고개를 까닥였다. 김유현은 잠시 쳐다보다가 품에서 작은 수정 하나를 꺼냈다. 진실의 수정이었다. 김유현이 느릿하게 수정을 밀어 넣자 게헨나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건 뭐지?”
“진실의 수정이라는 겁니다.”
“호오. 진실의 수정이라.”
“따지려는 건 아닙니다. 그냥 우리 내면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장치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아무튼, 여태껏 하신 말씀이 진실이라면, 그 구슬에 마력을 흘리고 똑같은 말씀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게헨나는 싱겁다는 듯 웃었으나 곧 차분히 진실의 수정에 손을 얹고 활성화했다. 이어서 방금 했던 말들을 그대로 되풀이했음에도 불꽃의 색은 변하지 않았다.
“이제 됐느냐?”
게헨나는 멍하니 쳐다보는 두 남녀를 보고 놀리듯이 말했다.
“아, 하나 더 추가로 말하자면….”
게헨나는 검지 끝으로 구슬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구슬 따위로 내 진심을 가늠하는 건 어불성설이라 말하고 싶구나.”
김유현의 얼굴이 바짝 굳어졌다.
“…방금 말씀은 하지 않는 게 더 유리하셨을 겁니다.”
“뭐, 그것 또한 내 진심이라고 해두마.”
게헨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대체 그때의 일은….”
“글쎄…? 이번에도 그랬듯이 나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소환된 거라서. 단, 정수리에 뿔이 돋아 있고 박쥐 같은 날개를 가진 놈들이라고 말해줄 수는 있겠군.”
그 순간 김유현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게헨나의 묘사가 김수현에게 들은 악마의 모습과 거의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1회 차에서 악마와 손을 잡은 마녀가 지옥 대공을 소환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도 떠올랐다.
‘이건…. 나중에 수현이한테 확인해봐야 한다.’
김유현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앞을 응시한 찰나, 고연주가 날카로이 눈을 빛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한 짓은 아직 남아 있어요.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학살이었죠. 그중에는 우리 동료도 있었고요.”
“그래서?”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러나 게헨나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했다.
“…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말이지?”
게헨나 특유의 자세가 나왔다. 의자에 편히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꼰다. 한 손으로 턱을 괴어 상대를 지그시 응시한다.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스멀스멀 흘러나와 둘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그대에게 물으마. 나는 분명 그때 인간에게, 아니 그대의 동료에게 해를 입혔다. 그럼, 나는 적인가?”
“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이번에는 네 동료를 구하고 게다가 김수현이라는 사내의 목숨까지 살렸지. 자, 이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는 이제 아군인가?”
“그, 그건.”
고연주의 얼굴에는 말문이 막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게헨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껏 비웃음을 띄웠다. 김유현은 마른 침을 삼켰다.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는데 게헨나가 어떤 존재인지를 잠시 간과한 것이다.
“왜 대답이 없지?”
“…….”
“후후. 그래, 그렇겠지. 너희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몸서리가 쳐질 만큼 똑같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자기중심적인 사고는 여전해.”
“…….”
어느새 고연주와 김유현은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였다. 게헨나가 내뿜는 기세가 워낙 강렬해 몸을 찍어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연주는 속으로 자책했다. 김유현처럼 감정을 배제해야 했는데 은연중에 적의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나 둘은 알고 있을까. 게헨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사실을.
“하기야 이해는 한다. 애초 이 세상도 나를 허락하지 않는데, 너희의 사고로 나를 이해하기 바라는 건 요원한 일일 터.”
그러한 찰나, 게헨나의 붉은 눈동자가 요사스러운 빛을 뿌렸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말이다.”
그와 동시에.
“나도, 너희가 무척이나 밉다.”
부릅뜬 게헨나의 눈에서 진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
모든 일과를 마친 후, 나는 게헨나와 함께 집무실로 돌아왔다.
“으음. 좋구나. 더 쓰다듬어다오.”
내 몸에 기댄 게헨나가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린다. 나는 배를 쓰다듬는 손을 한층 부드럽게 놀리며 게헨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분 좋아?”
그러자 게헨나는 흘깃 나를 쳐다보더니 낯을 붉히며 어흠,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내가 아니라, 배 속의 아기가 좋아하는구나.”
“그래? 그걸 어떻게 아는데?”
“원래 어미는 느낄 수 있는 법이다.”
“오호.”
놀라워하니 게헨나는 빙긋 웃으며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배를 내려다봤다.
“봐라. 지금도 배를 마구 발로 차지 않느냐.”
흠. 배를 마구 찬다고. 막 차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않으려나.
“한 번 들어보겠느냐?”
“어? 아, 응.”
게헨나는 복부 아랫부분을 살며시 짚으며 나를 돌아봤고, 나는 냉큼 꿇어앉아 배에 귀를 갖다 붙였다. 아, 따뜻한 살결. 한껏 설레는 마음으로 청력을 집중했지만, 발차기는커녕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안 들리는데?”
“그럴 리가…. 아.”
귀를 떼고 위를 올려다보자 게헨나가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더니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방금, 다시 차기 시작했다.”
“응?”
“신기하구나. 그대가 귀를 댈 때 움직임을 멈추더니 떼자마자 다시 차는 건…. 후후.”
“…….”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게헨나의 말이 무척이나 서운하게 느껴졌다.
“뭐, 부끄러워하는 건가.”
우연한 일치라 애써 자위하며 천천히 무릎을 폈지만, 입맛이 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차, 게헨나. 그러고 보니 출산 예정일은 언제야?”
“아마 곧…. 이지 않으려나. 요새 움직임을 봐서는 당장에라도 나오고 싶어하는 것 같다만.”
“증상은 어때.”
“글쎄. 그나저나 슬슬 졸리구나.”
기껏 물었으나 게헨나는 묘한 미소로 말을 돌릴 뿐, 자세히 말해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침대에서 한참 더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게헨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상태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윽! …현! …큭! …현!”
불현듯 들려오는 신음에 눈을 뜨자, 시커먼 어둠이 내려앉은 방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수현! 김수현!”
돌연히 애달픈 음성이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화들짝 옆을 바라본 순간 나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옆으로 돌아누운 게헨나가 몸을 둥글게 만 채 몸을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 게헨나?”
반사적으로 부르자, 게헨나는 벅찬 고갯짓으로 겨우 눈을 돌렸다. 인중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과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유난히 눈에 밟힌다.
이윽고 게헨나는 무척 힘겨워하는 어조로 겨우 입을 열었다.
“배, 배가….”
애끓는 듯한 목소리.
그 순간, 머릿속을 맴돌던 수마가 깡그리 걷혀나갔다.
나는 번개같이 몸을 일으켰다.
============================ 작품 후기 ============================
얼마 전 약간 가슴 아픈 코멘트가 있었는데요. ‘수나’라는 이름이 참 성의 없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저는 이름 참 예쁘다, 부르기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독자 분들의 눈에 별로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혹시 따로 좋은 이름이 있으시면 코멘트로 적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나는 태명으로 할 수 있으니까요. 🙂
PS. 몰랐는데, 선작 4만이 넘었네요. 독자 분들의 사랑, 정말로 감사합니다.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지만, 완결까지 더욱 노력하겠습니다.